| 저자 | 박동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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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공시사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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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억
— 왜 저 사람은 내 말을 듣지 않는 걸까.
왜 저 사람은 무지한 것일까.
그런데 깨달아야 할 것은
이러한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다.
타인과 교감한다는 주제는 인문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주제를 일생의 과업으로 삼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나 있다. 이를테면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Joseph Bohm, 1917~1991)은 그의 말년을 ‘대화’(dialogue)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데 바쳤다. 그의 삶을 조금 살펴보자. 데이비드 봄의 아버지는 헝가리계 유대인이었으며 미국으로 이민한 뒤에도 지역 랍비를 맡아 유대식 전통을 지켰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데이비드 봄은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7세기의 스피노자가 그랬던 것처럼 봄은 자신이 속한 유대교 공동체를 거부했으며, 이미 십 대 때부터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믿었다. 결국 봄은 물리학자의 길을 택했고 이후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의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한편으로 청년 시절 공산주의 소모임에 관심을 두었던 그는 1951년에는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인해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직되고 여러 나라를 전전하게 된다. 그는 1957년 영국에 정착하기 이전까지 브라질과 이스라엘을 전전하며 불안한 시기를 보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이 곧 ‘이주’라면 데이비드 봄은 두 가지 의미의 이주를 체험한 셈이다. 하나는 자신이 선택한 탈출이었고, 다른 한 번은 타인의 뜻대로 행해진 추방이었다. 따라서 이방인이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이해했던 그가 대화라는 주제를 어떠한 마음으로 탐구했을지 떠올려보게 된다. 그는 대화에 관한 저술을 1970년부터 199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스무 해에 걸쳐 발표했다.1) 이를테면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On Communication, 1970)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두 가지 방식의 대화를 대조한다. 그에 따르면 “양쪽이 서로에게 고정된 정보를 주듯이 특정 개념이나 관점을 전달하려고to communicate” 하는 대화가 있고, 이와는 달리 “뭔가를 공통된 것으로 만든다to make something common”는 의미의 대화가 있다.2) 좀 더 한국어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봄은 ‘설득하는’ 방식의 말하기와 ‘참여하는’ 방식의 말하기를 구분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그는 현대인들이 대화를 오직 ‘설득하는’ 방식으로만 행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대화에 실패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이 상대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서로 무관심해질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중요한 말을 건네는 순간이 있다. 그 말의 내용은 때론 열렬한 사랑의 고백이 될 수도 있고, 때론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의 전달일 수도 있으며, 때론 반드시 따라야 할 신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때 사람마다 서로 입장과 믿음이 다를지라도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예의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번번이 실패한다. 상대방은 마치 편견을 갖고 꽉 막힌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왜 저 사람은 내 말을 듣지 않는 걸까. 왜 저 사람은 어리석은 것일까.3) 그런데 깨달아야 할 것은 이러한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설득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봄은 이렇게 답한다. “이런 ‘폐쇄성’의 본질은 회피가 아니라 무감각이다.” 이는 다음의 사실을 뜻한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진실은 사실 타인의 입장에서 떠올린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즉 내게 중요한 것이 상대방에게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불편한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선배가 후배에게 조언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도움이 될만한 ‘중요한’ 경험을 고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봄은 그것만이 설득의 동기가 아님을 강조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하는 것만이 설득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봄은 말하는 기쁨, 즉 ‘희열’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사실 설득하는 자는 왜 상대방이 경청하지 않을 때도 말한다. 왜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믿을까. 설득이란 실은 자기 삶이 틀리지 않았다고 자문자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봄은 답한다. 요컨대 내 경험이 이제 세상에 무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람은 설득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곧 타인도 자기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설득하는 자는 상대방이 ‘나’를 피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야말로 자신과 타인의 삶이 다르다는 진실을 회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설득하는 자는 타인과 마주 보고 있지 않다. 그가
마주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이다.
사실 설득하는 자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인 것이다. 자신의 삶이 옳음을 확신하기 위해 그가 말하고 있다면, 설득하는 자는 타인과 마주보고 있지 않다. 그가 마주보는 것은 자기 삶이다. 반대로 서로 마주보는 형태의 대화, 즉 ‘참여하는’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봄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오랫동안 노력했다. 우선 그것은 답을 정해놓지 않고 행하는 대화라고 봄은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합의나 공통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에 가깝다. 또한 어떤 사실의 경중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동참함으로써 유대감과 소속감을 끌어내는 자리여야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발언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유대가 목적이라면 침묵하는 자조차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타인과 교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득하는’ 말하기와 ‘참여하는’ 대화의 구분은 봄의 또 다른 글 「참여형 사고와 무한」(Participatory Thought and the Unlimited)에서 ‘사실형 사고’(literal thought)와 ‘참여형 사고’(participatory thought)라는 용어로 바뀌어 나타난다. 사실형 사고가 모든 대화에서 사실을 검증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면, 참여형 사고는 모든 존재의 유대를 주목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좀처럼 ‘참여하는’ 대화의 사례를 서구 사회에서 찾기 어려웠는지 봄은 북극의 원주민들을 참여형 사고의 대표로 꼽는다. 인간과의 교감만이 중요해져 버린 문명인은 모든 대화 속에서 사실 확인을 중시하지만, 자연적 삶을 지속하는 북극 원주민은 ‘자연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느끼고 세상 모든 것과 교감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대인에게 정령과 같은 관념은 신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원시인은 정령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연을 존중하고 교감의 대상으로 여긴다. 봄은 그러한 가없는 교감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한 물리학자의 사상은 대화에 대한 이론을 넘어서 문명 비판과 생태적 윤리로 확장해나간다. 참여형 사고란 모든 존재가 대화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는 봄의 한계에 대해서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떤 의미로 그의 글은 대화라는 주제에 충실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의미로 그렇다. 첫째로 저자는 대화 상황 ‘안에서’ 고민하고 있지 않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실제로 대화할 때 고민하는 것은 대화의 가치가 아니라 제스처다. 대화하면서 우리는 여러 사람 중 어느 쪽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언제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도 좋을지 고민한다. 봄은 대화의 가치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실제 대화에서 행하는 몸짓에 대해서는 소홀히 대한다. 둘째로 그가 줄곧 ‘참여하는’ 대화를 지향한 것과 달리 그의 글은 ‘설득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그의 글에서 공감이라는 주제는 어떻게 다뤄지는가. 봄은 세상을 이론화하고 탐구하는 한 물리학자의 시선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글은 대화를 유형화하고 우리에게 ‘옳은 대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따라서 데이비드 봄의 사유를 데이비드 봄의 사유보다 철저히 실현하려면, 우리는 그의 이론을 제스처로 번역해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대화할 것이냐는 추상적인 질문을 적어도 ‘어떻게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마주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도 있겠다. 더 분명히 떠올려야 할 것은 우리의 몸이다. 봄의 이론을 몸의 언어로 바꾸어 이해해보자. 봄이 주장하는 요지는 말하는 입장이 아니라 듣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경청하는 자는 안다. 타인이 얼마나 다른 목소리를 지녔으며, 얼마나 다른 뉘앙스와 단어로 그의 삶을 발음하는지 말이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가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가며, 얼마나 함께 살아가는지 깨닫는데 어려운 이론은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다.
— 오직 얼굴과 얼굴만이 마주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얼굴이 형언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 순간 얼굴은 오직 나의 힘으로만 이해하고
감당해야 하는 타인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실은 공감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공감의 제스처에 집중하는 학자의 글을 찾기란 어렵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학자의 몫이 아니라 작가의 몫인 것처럼 느껴진다. 문학을 문학답게 만드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뜻을 전달하는 것이 문학의 핵심이라면 구태여 어조를 세공하고, 아름답게 말을 고르며, 때론 여백을 넣을 필요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한 편의 시는 마치 우리가 서로 마주 보는 순간을 닮아 있다. 우리는 타인 앞에서 말씨를 부드럽게 하고, 섣불리 단어를 내뱉지 않으며, 듣기 위해 침묵한다. 이처럼 문학 작품은 항상 일대일 대화에서 지속할 하나의 제스처를 간직하기 마련이다.
얼굴, 두려움이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얼굴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질 수 없는
얼굴, 걱정밖에 안 남은 얼굴 천근만근 무거운 얼굴, 모가지가 두 개는 되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
침대에 나뒹구는 얼굴, 솜으로 채워진 얼굴, 얼굴을 베고 잠든
베개, 자그마한 구명보트가
이마에 정박해 있는 얼굴,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심장의 박동을 느낄 때
오늘도 실패했구나 생각하며 경련이 이는
얼굴, 빗물받이처럼 두 귀가
쇠구슬 같은 눈물을 모으는
얼굴 보고 있는 것들이 모조리 통과되고
있는 얼굴, 골똘히 잠든 얼굴, 약간의 근육운동이 약간의 희로애락이
미미하게 정차하다 떠나는
얼굴, 뒤통수 뒤로 숨는 얼굴
머리카락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얼굴
입을 약간 벌려 말을 거는 얼굴에게
얼굴을 갖다 대고 귀를 기울이면
더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숨을 뱉는
얼굴, 맹세를 놓아줌으로써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얼굴
- 김소연,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전문(《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문학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마주보고 행한 제스처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제스처의 출발점이 아닐까. 타인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것은 얼굴이 곧 한 사람의 고유함을 식별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감정과 생각이 ‘얼굴을 통해’ 드러나듯, 마주 본다는 것은 두 존재를 연결하는 사건인 것처럼 느껴진다. 김소연 시인의 작품에서 다루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건이다.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걱정과 슬픔을 가늠해보려는 사려 깊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당신의 얼굴 앞에서, 우선 김소연 시인은 당신의 시선을 읽는다. 자신의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질 수 없는” 당신의 두 눈이 있다. 그는 자신을 돌보는 데 지쳐버렸다. 그래서 그는 타인에게 눈길을 두지 못한다. 그다음 시인은 당신의 피부를 헤아린다. 걱정뿐인 당신의 피부는 당신 홀로 견디기에 무겁다. 대신 자신을 견뎌주기를 바라는 듯한 당신의 표정이 ‘솜이불’처럼 헐겁게 나뒹굴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의 피부밑에 흐르는 피와 눈물을 가늠해본다. 어두운 밤 당신이 두 손으로 짚어보던 심장 박동이 있었고, 당신의 두 눈으로 삼켜낸 눈물이 있었다. 어쩌면 떠나버릴 것 같은 당신, 그러나 하루를 한 번 더 견디며 맹세하듯, 아니 어쩌면 “맹세를 놓아줌으로써” 타협하듯 잠으로 달아나는 당신의 얼굴이 있다.
물론 이 작품에 마주 봄은 없다. 당신은 침묵하고 있으며 자기 안에 갇혀 있다. 따라서 당신에 대한 나의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공감은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김소연 시인은 언제든지 당신이 눈 돌리면 발견할 수 있는 위치에서 당신과의 눈 맞춤을 기다린다.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김소연 시인의 제스처는 지극하다. 지극하다는 표현이 적절한 이유는 그가 한 사람의 얼굴을 이루는 선(線)과 면(面)과 깊이를 모두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신의 두 눈이 무엇을 견뎌야 하는지 나는 본다. 당신의 피부가 어떤 힘으로 버티고 있는지도 나는 어루만진다. 당신의 얼굴이 짊어진 당신의 삶을, 침묵하듯 숨을 내쉴 뿐인 당신의 숨결을 나는 듣는다.
바로 이 지극한 제스처야말로 문학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참여하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공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묻자. 이 작품은 오직 얼굴‘만을’ 말하고 있다. 사회적 직함이나 얼굴의 아름다움을 떠나서, 그저 얼굴만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얼굴을 마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얼굴과 얼굴만이 마주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얼굴이 형언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 순간 얼굴은 오직 나의 힘으로만 이해하고 감당해야 하는 타인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얼굴은 명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은유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 어렴풋한 것, 그래서 항상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얼굴은 신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타인의 얼굴을 완벽히 해석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오롯이 타인의 존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서로 상처입히지 않고 얼굴을 지극히 마주 할 수
있는 거리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공감의 목적지인 셈이다.
타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그것은 설레는 사건이지만, 동시에 두려움과 위험을 동반하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찬가지로 타인과 마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대화는 깊어질수록 위험을 초래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생각하는 두 개의 몸이 지닌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끝내 사랑은 존재를 파멸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행복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존재와 몸마저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착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정확한 공감의 거리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과 다르지 않다. 서로 상처입히지 않고 얼굴을 지극히 마주 할 수 있는 거리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공감의 목적지인 셈이다.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떼야 할 서류가 있는데
무인발급기가 나를 식별하지 못한다
내 살갗무늬가 나의 단서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나를 확인한다
나는 나를 떠나버린 것 같다
“잠시만 안고 있어!”
제 아이를 내 품에 안겨놓고 돌아오지 않는 여자처럼
비가 오니까
피부가 촉촉하게 팽창해서
내 지문이 변했을지 모른다
빗길에 차선을 넘은 트럭처럼 나는 나로부터 잠시 미끄러졌는지 모르겠다
이탈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민원실에서
의자를 당겼는데 테이블도 움직인다
분리불안을 느끼는 관계처럼
신체와 영혼처럼
의자와 테이블이 일체형이다
버릴 때는 폐기물 처리비 납부필증을 한 장만 붙이면 되겠지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야 하는데
나의 여부를 알수 없다
봄비가 오니까
사람들은 지나치리만치 외로워서 자아라는 존재를 발명한다
어린 나를 더 어린 내게 던져두고
사라진 엄마를 미워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ㅡ 김이듬, 「법원에서」 전문(《문학인》, 2023년 봄호)
시 「법원에서」의 말미에 “사람들은 지나치리만치 외로워서 자아라는 존재를 발명한다”라고 김이듬 시인은 쓴다. 어떤 의미로 이 문장은 자아가 곧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이러한 결론과는 달리 이 작품은 줄곧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나’가 경험한 두 개의 사건을 다룬다. 하나는 현재의 사건이다. 그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으려 하지만 무인발급기는 자신의 지문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하나는 과거 회상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나’를 떠나버렸다. 중요한 것은 ‘나’가 이러한 가족사를 우회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이다. “제 아이를 내 품에 안겨놓고 돌아오지 않는 여자”라는 시구와 어머니가 “어린 나를 더 어린 내게 던져두고” 사라졌다는 시구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어머니가 어린 동생을 내게 버렸다는 뜻인지, 아니면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돌려서 말하는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혼란스러움 자체가 우리에게 진실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누구나 자신 안의 트라우마적 진실을 쉽게 드러내기 어렵다. 그것을 직시하는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린 나를 더 어린 내게 던져두고” 떠나갔다는 문장에서도 아픈 기억은 간접적으로 되살아난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나’를 두 개로 분열된 것으로, 무엇보다 ‘어린 나’와 ‘더 어린 나’라는 미성숙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분열과 미성숙은 그가 겪은 고통이 견뎌내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결국 이 시를 마음의 진실에 따라서 배열한다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애초에 ‘나’는 사실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던 순간부터 자신을 떠나간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홀로 견뎌내야 했던 유년을 떠올렸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지나치리만치 외로워서 자아라는 존재를 발명한다”라는 작품 말미의 문장은 고통의 크기를 표현한다. 이 작품에서 ‘나’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횟수가 곧 고통을 고백하는 방식인 셈이다.
좀 더 나아가자. 김이듬 시인의 시는 마주침을 상실한 자의 방백을 그려낸다. ‘나’의 시선과 목소리는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다. 그가 간절히 마주보기를 바랐던 것은 그의 어머니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에게 간절했던 것은 피부 접촉이다. 그것이 이 작품에 일관되게 촉각적 심상이 나타나는 이유이다. ‘나’가 고통스럽게 상실한 것은 그의 “지문”이다. “피부가 촉촉하게 팽창해서” 그는 자신의 지문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 그 습기가 슬픔을 연상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신체와 영혼” “의자와 테이블”처럼 떨어져서는 안 되는 그 어떠한 접촉을 그는 떠올린다.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다’라는 서술어 또한 엄마와 ‘떼어진’ 화자의 아픔을 연상케 한다. 그에게는 그를 지지해줄 타인의 피부가 결여되어 있다.
— 시는 사람은 몸과 몸짓 사이에서 헤매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몸과 몸짓의 경계를 다시
그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발에 채이는 사랑을 발견했네 사랑을 발견한 순간 나는 전력으로 질주를 시작하네
드디어 당신이 있는 곳에 도착한 순간 당신 입에 있던 담배를 뺏어 문 순간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나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하네 나는 달리기 시작하네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날을 상상하던 장면으로부터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던 장면으로부터 당신에게 달려가던 순간으로부터 당신과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으로부터 나는 달아나네 나는 달아나기 시작하고 있네 나는 전력으로 달아나네
반대편에서는 바람이 당신을 데려가네 먼 곳으로 데려가네 당신과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으로 당신이 나를 기다리던 순간으로 담배를 피우던 순간으로 당신과 마주보고 있던 순간으로
지금은 우리가 입을 맞추려던 순간이다
당신은 어디에 있지?
- 유혜빈, 「젊은 연인들의 키스―“ ”를 읽고」 전문(《웹진 문장》, 2023년 2월호)
통속적인 제스처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제스처를 만드는 것 역시 시를 쓰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유혜빈 시인은 전형적인 연인의 포즈를 아이러니한 표현으로 냉소한다. 이 시의 첫 문장에서 ‘나’는 사랑하는 상대를 발견하는 순간 전력 질주를 시작한다. 우리의 통념은 이 전력 질주의 방향이 연인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를 읽어나갈수록 그러한 예상은 깨어진다. 사실 시인은 연인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당신의 입술과 눈을 바라보는’ 그 사랑의 제스처로부터 달아나는 것임을 우리는 확인한다.
“지금은 우리가 입을 맞추려던 순간이다 / 당신은 어디에 있지?” 이 마지막 문장은 당연히 연인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들이 놓인 상황 자체를 향하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만약 이 문장을 연인에게 향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형용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눈앞의 상대에게 ‘어디에 있냐고’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키스하는 상황 자체를 향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입을 맞추는’ 제스처 속에 있다. 그런데 이 제스처는 지금 우리 스스로 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이 만들어낸 것을 모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가.
사실 ‘“ ”를 읽고’라는 부제 속에서 유혜빈 시인은 미리 답하고 있다. 쌍따옴표(인용 표시)가 암시하듯 연인과 행하는 사랑의 제스처는 ‘연인의 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에 은폐된 문화적 억압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유혜빈 시인은 ‘연인을 향한 질주’라는 통속적 이미지와 ‘연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질주’라는 낯선 이미지를 포개어 놓는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한국에서 대중문화 속 연인의 행복한 이미지는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프로포즈와 결혼이라는 통과의례를 떠올려보자. 그러한 통과의례는 우리의 존재를 마주볼 수 있게 하는가, 아니면 그저 역할극에 사로잡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의 제스처를 바로 잡기 위해 중요하다.
한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혜빈 시인이 그려낸 ‘나’가 몸의 감수성을 확장해나간다는 점이다. 자율적인 대화의 가치를 말하면서도 대화하는 자의 몸을 빠트리는 학자적 글쓰기와 달리, 반대로 시인은 몸의 위치에서 문화적 모방을 비판하는 감수력을 만들어나간다. 이 때문에 “당신은 어디에 있지?”라는 물음을 독자를 향한 것으로 읽어도 좋다. 우리의 몸은 어디에 있가. 우리는 자율적인 몸속에 있는가, 그저 타인을 모방하는 연극적 몸짓 속에 있는가. 이렇듯 시는 사람은 몸과 몸짓 사이에서 헤매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몸과 몸짓의 경계를 다시 그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1) 1992년에 간행된 On Dialogue는 그의 몇몇 산문을 수록한 선집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 『대화란 무엇인가』(에이지, 2021)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하 인용은 한역본을 참조한다.
2) 데이비드 봄, 위의 책, 39~40쪽.
3) 최근 반지성주의라는 담론이 자주 강조된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이를테면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국내적으로 초저성장과 대규모 실업, 양극화의 심화와 다양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력이 흔들리고 와해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반면 데이비드 봄은 이러한 정치적 입장에 맞선다. 그에 따르면 진실을 강조할수록 갈등은 심각해질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자신과는 다른 신념이나 정치적 입장을 소유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묘사하는 예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편 지구를 멸망시킬 소행성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대중이 외면한다는 내용을 다루는 영화 <돈 룩 업>(2021)은 현대인의 반지성주의자를 조롱하는 대표적 작품인데, 우리는 이러한 영화를 대화의 파국이라는 관점에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어떻게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가, ‘어떻게’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가. 이 질문 속에서 어떠한 단어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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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