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황동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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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인] 황동규
신작시: 나지막한 담장 / 큰 노을 / 코로나 파편들
자선시: 히아신스 / 그날 저녁
[시인론] 이숭원(李崇源) "영원과 더불어 사는 기쁨"
신작시
나지막한 담장
서달산 산책 오르내리며 이 골목 저 골목 골라 걷던 곳에
다세대 주택들이 빼곡 쳐들어 왔다.
지나가며 슬쩍슬쩍 넘겨다보면
조금씩 색다르게 차린 자그만 꽃밭들이 나 여기 있어! 하던
나지막한 담장들,
낮은 대문 지붕에 애완동물처럼 앉아 있던 엄청 큰 호박,
오가며 서로 낯익히던 강아지들 고양이들,
다 사라졌다.
목청 별나게 좋았던 새도.
산책길에 하나씩 점등되던 제각각 등불들,
눈 내리면 현관 앞에서
대형 눈사람처럼 웃던 몇몇 조그만 눈사람들까지
모두 주섬주섬 포대에 들어가
추억의 다락방에 쌓여 있게 되었다.
다시 꺼내더라도 윤기 다 휘발되어
전처럼 만지듯 즐길 수는 없을 거다.
옛 책 뒤적이다 끼워두고 잊었던 단풍잎 만나듯
꽃 대신 남새 심으며 마지막까지 버티던 집 낮은 담장에
갈잎 하나쯤 얹혀 있을까?
바람 일면 빨갛게 곤두서 바르르 떨기도 할까?
큰 노을
가을 태안에 일 갔다가
큰 노을 만났다.
섬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붉고 퉁퉁한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를 조금씩 덮어 가다
확 풀린다.
바다를 날던 새들이 하늘 속을 날고
바다 한가운데 길고 넓은 새 물길이 태어나
하늘보다도 더 밝게 출렁인다.
달아날세라 꽉 붙잡고 놓지 않았던 생각들
멀리 떠나보내려 해도 꿈쩍 않던 생각들이
다 같이 옷 붉게 해 입고 밝은 물길에 몸 던지고
어깨춤들 춘다.
마음이 빈다.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이때다!
노을 한 장 마음에 떠 가지고 쾌히 떠날 채비 하니
한두 장으로 뜨기엔 너무 큰 노을.
코로나 파편들
4인끼리만!
오랜만에 식당에서 아들 내외 손주들과 식사,
모르는 사람들끼리보다도 더 멀찍이 떨어져서.
*
보고 싶은 사람 수 줄기 시작하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
8년 전에 세상 뜬 친구 김치수
어젯밤 꿈에 나타났다.
글 읽었어!
지공다스* 한 병 내밀었다.
마스크 없이.
*
집콕의 극치는 역시 혼자 있음.
그 있음에 외로움 하나라도 빠트리면
혼자 없음.
*
오래 집콕하며 고이는 생각.
왜 나를 미워하는 자를 꼭 미워해야 하는가?
미워하기, 그건 너무 손쉬운데.
*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온다.
저녁이 가고
눈발 제법 흩날리는 저녁이 온다.
혼자 있음.
혼자 없음.
지내다 보니
있음이 없음보다 한없이 비좁고 불편하다.
이 둘을 반반씩 섞어 살다 간다면!
*
마지막 시 쓰기 좋은 저녁이 올 것이다.
* 비평가 김치수가 유학한 프랑스 론 지방 특산 와인. 대체로 가성비 높다.
자선시
히아신스
원주에 둥지 틀고 사는 후배 시인이
코로나 확장세 뚫고 히아신스 한 다발을 보내왔다.
비닐 옷 벗기고 꽃병에 담아 탁자에 올리자
바로 이때다! 꽃들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가,
확 터지는 향기, 정신이 어찔어찔.
발코니 창문을 열어줘도
나갈 염을 않는다.
가만, 발코니에 내놔야 할까 부다.
꽃병에 손을 내밀자
꽃들이 손대지 말라는 듯 허리를 고쳐 세운다.
‘지금 우리는 단 한 번 주어지는 한창 삶 살고 있어요!’
단 한 번 주어지는 한창 삶이라?
이제는 너무 멀어져서 도통 희미하지만
나에게도 그런 게 있긴 있었겠지.
히아신스에겐 그게 바로 지금이군.
심호흡을 한다.
매해 몇 번 만나는 국화 향기, 잘 씻긴 하양이나 노랑이라면
히아신스 향기는 무게 살짝 입힌 은빛.
찬찬히 허파에 넣는다.
감각들이 바빠진다.
다시 심호흡을 한다.
허파꽈리들이 무겁게 열렸다 닫히고
숨에 무게가 실린다.
그 누군가가 한창 삶 사는 걸 건드리지 않는 일은
이 우주에 몸담고 있는 모든 동승자의 도리가 아닐까.
그날 저녁
세상 뜰 때
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 하고
(말 대신 손 한번 꽉 잡아주고)
가구들과는 눈으로 작별, 외톨이가 되어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리.
가만, 근자에 아파트와 빌라들 가득 들어서
둘러볼 골목 별로 남지 않았군.
살던 아파트 지척, 구두 수선 퀀셋 앞 콘크리트 바닥에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무작정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서
작은 밤 한 봉지 사 들고
끝물 나뭇잎들 날리는 서달산에 오르리.
낮비 잠시 뿌렸는지 하늘과 숲이 밝다.
하직 인사 없이 헤어진 다람쥐가 나를 알아볼까?
약수터에 전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떠 있을까?
그런 호사스런 생각은 삼가기로 하자.
운 좋게 귀여운 다람쥐를 만나 밤 몇 톨 꺼내놓고
몇 발짝 걸어가다 되돌아와 밤 다 내려놓고
길에 굴러들어온 돌멩이는
슬쩍 걷어차 길섶으로 되돌려 보내고
서달산 능선 길을 아끼듯 걸으리.
벤치 하나, 둘이 서로 얽히듯 서 있는 나무, 약수터가 지나간다.
하늘에 샛별이 돋는다.
이 별 뜨면 가던 걸음 멈추고
무언가 맹세하곤 했지.
참 맹세든 헛맹세든
지난 맹세는 다 그립다.
내일 저녁에도 이 별은 뜨리라.
걸으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길이 슬그머니 바닥을 지울 때까지.
황동규 l
195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풍장』 『사는 기쁨』 『연옥의 봄』 『오늘 하루만이라도』 등이 있음. 〈대산문학상〉 〈만해대상〉 〈호암예술상〉 등 수상.
시인론 / 이숭원(李崇源)
영원과 더불어 사는 기쁨
황동규의 신작 시 3편과 자선 시 2편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의 시 전반에 대한 개괄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그의 제15 시집 『사는 기쁨』(2013)과 제16 시집 『연옥의 봄』(2016), 제17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2020) 수록 시편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 세 시집에 지난 십여 년간 보여준 그의 시적 탐구와 변화의 양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몇 차례 반복해서 이야기했지만, 황동규 시의 기본 흐름은 ‘사람의 탐구’다. 그의 시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놓인다. 그의 시는 ‘인간의 고통과 환희’에 집중해 왔다. 그의 시를 단순히 인간주의 시라고 줄여 말하지 않는 것은, 고통과 환희를 표현하되 시야가 인간에 국한되지 않고 생명 전반의 문제로 넓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의 시는 인간이나 생명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물로 시선이 확대되면서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성찰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에는 인간, 생명, 사물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의식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의식은 그의 정신 내부에 하나의 세계관으로 형성된다. 그것은 일찍이 예수와 불타의 대화를 다룬 작품에서 모습을 드러낸, 동서양 융합의 세계관이다. 황동규 시인은 서양의 종말론과 선불교의 순환론을 융합하여 자신의 독특한 사유를 구성하고 이를 시로 형상화하는 노력을 보였다. 노년에 이르면서 그러한 융합의 사유가 더욱 심화하여 생활의 영역에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국면들을 언어로 재구성했다. 그 결과 삶의 유한한 영역에서 벗어나 영원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시인은 현실의 삶에 머물면서도 마음의 영역에서 유한성을 넘어서서 영원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삶이 허망하다는 관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넘어서게 한다.
그의 과거 시편들은 여기에 이르는 경로를 잘 보여준다. 그가 삼십 대 후반에 쓴 시는 제5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에 담겨 있다. 이 시집 표제 시의 메시지는 ‘바퀴’라는 이미지에 수렴된다. 바퀴는 둥근 외형과 구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바퀴의 능동적인 회전의 속성을 통해 그렇게 구를 수밖에 없는 생명의 본성을 튀어 오르는 공처럼 탄력 있는 언어로 표현했다. 여기서 둥근 바퀴는 생명의 본성인 자유를 상징한다. 시인은 자유를 막는 요소와의 정신적 싸움을 ‘굴리고 싶다’라는 말로 나타냈다. 이것은 추상적 차원의 자유가 아니라 생물이 지닌 본능적 차원으로서의 자유다.
정신적으로는 자유의 지평을 추구하면서 그의 자아 성찰은 구체적 현실의 자극을 받아 내면의 변화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가 이론과 실천의 토대를 마련한 ‘극서정시’는 자아가 타자를 새롭게 만남으로써 내적 전환을 이룩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특징을 갖는다. 작품의 구조 속에서 ‘타자와의 만남’이 전제가 되고 ‘내면의 변화’가 결과로 나타난다. 가령 「오미자술」의 경우 “막소주 분자가 /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이 변화의 전제가 된다. 그러니까 타자는 사람이나 사물만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나 정황도 가능하다. 오미자술의 고운 빛깔과 맛이 시인 내부에 자극을 주어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 전화 걸기 전에 / 내가 갑자기 환해”지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한 내면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발견’이다. 이 인간의 발견은 제11 시집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의 그 유명한 ‘홀로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시어로 정착된 ‘홀로움’은 환한 외로움, 온전히 감내할 만한 외로움을 의미한다. 아무도 없는 고독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때 비로소 “외로움과 슬픔이 이처럼 가까운 이웃!”임을 알게 되고 “외로움이 홀연 홀로움으로”(「버클리 시편 4」) 바뀌게 된다. 우리는 홀로움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의 발견’을 중요한 요소로 새겨둘 필요가 있다.
‘사람의 발견’이라는 내적인 사유가 마음의 영역을 넘어서서 육체의 체험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은 1997년 1월에 겪은 오른쪽 귀의 진주종 수술이다. 네 시간 반에 걸친 큰 수술이었고 그 후유증으로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안면신경마비가 와서 재입원도 했다. 회갑도 되기 전인데, 입이 돌아간 채로 평생 살게 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시인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호전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퇴원해서 쓴 시가 「퇴원날 저녁」이다.
흑반(黑斑) 잔뜩 끼어 죽어가는 난 잎 어루만지며
베란다 밖을 살핀다.
저녁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다.
주차장에 누군가 차 미등 켜논 채 들어갔나,
오른쪽 등 껍질이 깨졌는지
두 등 색이 다르다.
안경을 한번 벗었다 다시 낀다.
눈발이 한번 가렸다가
다시 빨갛고 허연 등을 켜놓는다.
난 잎을 어루만지며 주인이 나오기 전에
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온기를 잃지 말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는
눈감지 말라고
치운 세상에 간신히 켜 든 불씨를
아주 끄지 말라고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의.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ㅡ 「퇴원날 저녁」 전문
베란다의 시들어가는 난과 주차장의 배터리 닳아가는 자동차 미등을 보며 시인은 추운 세상에 간신히 켜 든 생명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소망을 읊조린다. 이 장면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되는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자동차 배터리부터 시들어가는 난과 자신의 병든 육체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존재할 만한 가치를 동등하게 지닌다는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 사물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여기서 그의 의식과 세계관은 중요한 변화를 보인다.
그의 사유가 생명을 넘어서서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심화한 내력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제13 시집 『꽃의 고요』(2006)에 실린 「보통 법신」이란 시를 읽어야 한다.
‘그대의 산상 수훈(山上垂訓)과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른가?’
나무들이 수척해져가는 비로전 앞에서 불타가 묻자
예수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의 답은 이렇네.
마음이 가난한 자와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르지 않은가?’
비로자나불이 빙긋 웃고 있는 절집 옆 약수대에
노랑나비 하나가 몇 번 앉으려다 앉으려다 말고 날아갔다.
불타는 혼잣말인 듯 말했다.
‘청정 법신보다
며칠 전 혼자 나에게 와서 뭔가 빌려다
빌려다 한마디 못하고 간 보통 법신 하나가
더 눈에 밟히네.’
무엇인가 물으려다 말고 예수는 혼잣말을 했다.
‘저 바다 속 캄캄한 어둠 속에 사는 심해어들은
저마다 자기 불빛을 가지고 있지.’
어디선가 노란 낙엽 한 장이 날아와 공중에서 잠시 떠돌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ㅡ 「보통 법신」 전문
예수와 불타의 대화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마음 가난한 자’와 ‘청정 법신’이 결국은 같지 않겠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불타는 이렇게 답한다. “청정 법신보다 / 며칠 전 혼자 나에게 와서 뭔가 빌려다 / 빌려다 한마디 못하고 간 보통 법신 하나가 / 더 눈에 밟히네.” 진정으로 중생을 사랑하는 불타의 관점에서 보자면 번뇌에서 벗어난 청정 법신보다는 번뇌의 굴레에 갇혀 괴로워하는 평범한 사람이 더 눈에 밟힌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어떤 절대의 성취보다 앞서는 것 아니냐는 유마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불타가 80세로 입적할 때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에 이미 자기 불빛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저마다 자기 불빛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청정 법신과 보통 법신은 차이가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캄캄한 어둠 속에 사는 심해어들”도 인간과 동등한 존재들이다. 이것은 인간을 사소하게 보는 시각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보는 화엄적 사유다. 그의 화엄적 사유의 상상력이 심해어의 생명의 불빛에까지 확대된 것이다.
제14 시집 『겨울밤 0시 5분』(2009)의 표제 시에 나오는 다음 대목은 생명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을 보여주고 있어서 정독할 필요가 있다.
나머지 한 변이 시작되는 곳에
막차로 오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
흘끔흘끔 휴대폰 전광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키 크고 허리 약간 굽은,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무엇인가 외우고 있다.
그 옆에 아는 사이인 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리 가볍게 치다 만 것 같은 하늘에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아 오리온,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ㅡ 「겨울밤 0시 5분」 부분
인용한 부분은 이 작품의 세 번째 연이다. 시인은 눈발이 날리다 멎은 겨울밤 길을 걸어 버스 종점까지 갔다가 한 여인을 보고 그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에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오리온 등 별자리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라고 감탄했다. 여기서 살아 있다고 감탄한 것은 하늘의 별을 생명체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공해로 찌든 서울 하늘의 병든 환경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하늘에 별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뜻밖에도 여러 별자리가 그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낱별로 뜯겨져 버림받은 외톨이가 되지 않고 별자리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반갑고도 고마웠다. 별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그 모습이 얼마나 대견스러웠을까? 아무리 참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이웃 별들과 결속하고 있는 본연의 자태에 시인은 감탄한 것이다.
별을 생명체로 여기고 공생의 정경에 감탄한 시인의 의식은, 세상의 고초를 많이 겪은 듯한, 허리 굽고 안색 파리한 여인을 향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앞에 별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에 5연에 ‘혜성의 삶’ 운운하는 별과의 문답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었다. 이것은 시인의 치밀한 미학적 구성의 결과다. 시인은 낱별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 있는 별자리와 개체로 분해되지 않고 공존하는 인간이라는 두 위상을 순조롭게 연결하는 정교한 시적 배치를 한 것이다. 산문으로 바꾸어 말하면 ‘평범한 인간들이 나누는 공생적 유대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시의 메시지가 시적 아우라를 거느리게 된 것은 ‘별의 생명체적 인식’이라는 모티프가 중요한 기능적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황동규 미학이 이룩한 중요한 성과다.
같은 시집에 다음과 같은 작품도 있다.
그대가 창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
물결이 창에 뛰어올라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눈 질끈 감고 뛰어오른 파도가
이처럼 창에 바싹 붙어 서서
방 안의 우리를 정답게 들여다보며
흐르기 싫다는 듯 싫다는 듯 흘러내리는 모습
(이보다 더 그립게 지워지는 삶 어디 있으랴)
앞으로 또 어디서 보게 될 것인가?
후포항이 그대 뜬 항구를 떠나
그대 비슷한 모습만 봐도 반가움에 떨며
세상 이 구석 저 구석을 기웃거릴 때.
ㅡ 「한여름 밤의 끝」 부분
이 시는 시인과 그 동지들이 거의 매년 찾던 울진군 후포항의 본가를 처분한 김명인 시인에게 주는 헌사 형식의 작품이다. 일행들이 후포에 들렸으나 늘 머물던 집에 들어갈 수 없고, 다시 찾을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 마주했다. 그 쓸쓸한 전환의 시점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 것이다. 그대가 창을 향해 손을 들자 파도 물결도 이것이 작별의 순간인 줄 아는지 애틋한 아쉬움의 몸짓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기 위해서인 듯 “두 눈 질끈 감고 뛰어오른 파도”의 단호한 저돌성, 다시 보기 어려운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창에 바싹 붙어 서서 / 방 안의 우리를 정답게 들여다보며 / 흐르기 싫다는 듯 싫다는 듯 흘러내리는 모습”은 작별의 안타까움을 시각적으로 환기한다. 후포항이 그대가 떠난 곳을 찾아 “그대 비슷한 모습만 봐도 반가움에 떨며 / 세상 이 구석 저 구석을 기웃거릴 때”라는 구절에 이르면, 자연을 포함한 공간 전체가 거기 깃들던 사람과 교류하며 감정을 나누는 장면이 떠오른다. 시인은 자연의 생명성만이 아니라 공간 전체의 생명성을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 역시 특별히 기록해야 할 중요한 시적 성취다.
제15 시집 『사는 기쁨』(2013)에 있는 다음 작품도 유사한 관계를 설정했는데, 자연과의 교감이 시인의 실존적 인식으로 전환되고 있어서 인식의 국면에서 다른 맥락을 드러낸다. 시인의 명상은 노년의 고비에 다가올 생의 끄트머리를 향해 움직인다. 시간의 바퀴가 우리 몸을 잠식해 들어올 때 우리 몸에 밀착되어 남아 있던 삶의 맛은 어디로 가는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궁금하게 여길 이 문제를 시인은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다.
지난해 늦장마에 쓰러졌다가 일으켜 세워져
죽은 채 가을 겨울 보내고
봄이 오자 몸살처럼 되살아나
허리 언저리로 쉬지 않고 새잎 내보내던 소나무
이번 큰물에 또 쓰러졌다.
잔뿌리 모두 배에 올려놓고 누웠군!
하며 보니 그 나무였다.
이번에 누가 일으켜 세우려 들지도 않는구나.
엉덩방아 찧으려는 몸짓마저 못 해보고
쿵! 뿌리째 내동댕이쳐졌을 때
봄부터 조심히 새로 엮어오던 삶 일순 공백이 되었을 때
나무의 느낌이 어땠을까?
몰려드는 잠 밀치며 하나하나 새로 연결하던 뿌리의 실핏줄
햇빛 속에 첫 이파리 뾰족히 내밀던 순간의 떨림,
기어오르는 넝쿨 식물들이 새잎 덮어버리거나
위에서 죽은 잎들 쏟아져 내려와 숨통 막으면
다시 조심조심 옆 피부를 찢고 새 이파리 내밀던 마음 조임……
그만 가시라고 실뿌리들이
가볍게 바람에 몸을 흔들었다.
뿌리 뽑혀도 남는 생각이여
나무에게도 추억이 있다고 생각 못 했던 생각이여
나무의 새 삶이 그냥 지워졌다고 생각진 말자.
상처에 새살 돋을 때
상처에 아린 살들 촘촘히 짚어가며 하나씩 꿰매다 확 터지곤 하던
저 아픔의 환한 맛,
이 지구에 생명이, 생명이 묻어 있는 한
지워지겠는가?
ㅡ 「아픔의 맛」 전문
지난해 늦장마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생명을 유지하던 소나무가 이번 큰물에 다시 쓰러져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시간의 바퀴가” “우리 몸을 통째로 뭉개” 버리는 그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 순간 나무의 느낌이 어떠했을까? 시인은 재생의 새순이 돋아나던 그 시간을 떠올리며 이파리를 뾰족이 내밀던 순간의 떨림이라든가 “옆 피부를 찢고 새 이파리 내밀던 마음 조임” 등을 생각한다. 시인은 여기서 시상을 전환하여 소나무의 뿌리가 뽑혀도 남는 그 무엇이 있다고 명상한다. 나무에게도 추억이 있고 나무의 새로운 삶이 그냥 지워진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마른 피부에 상처를 딛고 다시 생살이 돋아날 때 느꼈던 “아픔의 환한 맛”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이 끝나는 지점을 지나도 아픔의 맛, 몸의 맛은 생명의 어느 틈에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생각, 영원에 대한 명상이다.
영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모색한 작품이 「사는 기쁨」이다. 사람들은 현실의 가혹함을 체험하면서 영원한 세계의 환상과 비속한 현실 세계의 중간 지대에 서 있다. 가혹한 삶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때가 있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시인은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을 누릴 수밖에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는 시야를 살필 수 없는 초월 세계 대신에 갑남을녀가 부대껴 사는 세속의 공간을 택한 것이다. 희로애락의 삶 속에서 우리는 잠시 황홀을 만나기도 하고, 황홀함이 사라진 뒤 적막의 시간 속에 또 다른 황홀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산다. 그것이 ‘사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육신의 기력이 조금씩 쇠퇴해 가도 거기에 맞는 사는 기쁨, 삶의 맛은 그것대로 존재한다고 시인은 위로한다.
제16 시집 『연옥의 봄』(2016)에는 시인의 70대 중반 이후의 시편이 수록되었다. 나이가 더 든 상태에서 나온 시편이기에 죽음과 연관된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아끼던 제자의 부음,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 과거에 알았던 사람의 죽음, 자신이 맞이할 마지막 날에 대한 상상, 죽음을 담담히 맞이하겠다는 다짐 등 죽음의 음영은 다양한 양상으로 노출된다. 죽음과 관련된 명상이 펼쳐져도 시상은 어둡지 않고 어떤 경우 가벼운 유머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의 연작시 『풍장』(1995) 이후 그를 관통하는 세계관이 된, 죽음을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유가 더욱 뚜렷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자연 사물을 통해 인간과 생명의 문제를 표현하는 특징은 이전에 그가 보여준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방법을 통해 그가 전하려 하는 것은 ‘마음의 위안’이다. 「천남성 열매」 같은 작품은 외부의 사물이 어떻게 자신을 위안하는가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이 시에는 바람에 찢긴 낙엽, 자기 가슴을 찢고 붉은 속살을 보여주는 석류 등 “얼음 칼로 맨살 얇게 저미듯” 쓰라리고 아픈 형상이 열거된다. 시인도 착잡한 생각 가득해 마음의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렇게 마음이 불편한 날 러시아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의 “얼음 칼로 맨살 얇게 저미듯 아프고 아름다운” 모차르트 협주곡 연주를 들으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음악도 하나의 축복이 된다고 생각하고 앞을 보자 천남성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천남성은 붉은색 열매의 맨살을 그냥 내보이고 있다. 시인은 이 모습에서도 위안을 얻는다. 생각이 깊어지면 석류처럼 껍질이 찢겨 속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겉이 그대로 속 열매가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그에게 위안을 준다.
「햇빛에 놀란 무지개 춤」에서는 산책길에 놓여 있는 나무 그루터기 의자를 소재로 시상을 펼쳤다. 시인은 그 나무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다람쥐나 새들 같은 자연의 정경을 완상하곤 했다. 그 의자 위에 눈이 쌓여 새 발자국이 몇 개 남고 갈색 깃털도 올라와 있다. 시인은 그 미세한 자취를 보며 새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 순간 갈색 새 하나 덤불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자신이 새를 떠올리니 자연도 공감의 반응을 보인 것일까? 자신의 마음이 새에게 전해진 것일까? 새가 날아오르며 흩뿌린 눈가루가 햇빛에 빛나며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펼쳐낸다. 다음에 나오는 “누군가 몸을 부르르 떤다”라는 시행은 자연이 준 선물에 대한 미묘한 반응을 표현한 것이다. 추워서 떤 것이 아니라 생의 환희와 전율 때문에 떤 것이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명의 떨림! 시인은 이것을 생의 환희에서 오는 전율로 받아들인다. “살아 있는 것들 하나같이 열심히 피고 열리고 기고 있는” 생명의 오체투지, “누군가 몸을 부르르” 떠는 생명의 환희와 전율. 이것이 시인이 갈 길임을 우리에게 암시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지면에 실린 신작 시 3편과 자선 시 2편을 읽으면 시인의 의식이 지향하는 방향과 세계관의 형질을 더욱 뚜렷이 파악할 수 있다.
「나지막한 담장」은 서달산 산책길에서 늘 보던 풍경이 사라졌음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길에서 보던 대상들은 시인과 떨어져 존재하는 별개의 사물들이다. 사물의 속성으로만 보면 그 대상들은 시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시인이 그 사물에 마음을 주고 의미 있는 대상으로 마음에 끌어들였기에 친숙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 기울인 마음이요, 마음에 착색된 대상의 이미지다. 마음과 대상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실체로서의 사물과 접촉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이미지와 만나면서 우리의 삶이 전개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으니 모든 현상이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임을 알면 곧 진리를 아는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설파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가 가득한 세상에 사는 것이고, 그 이미지가 내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가에 의해 우리의 삶이 구성된다. 『화엄경』에는 “누군가가 삼세 모든 부처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현상 세계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이미지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유명한 사구게(四句偈)가 나온다. 세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끝없이 변화하는 현상만 있으니 그것을 이미지라고 본 것이다. 그림자에 매달려 헛된 망상에 빠지지 말고 현상을 똑바로 보라는 뜻이다.
시로 다시 돌아와 이야기하면 시인이 걷던 길에는 사라진 것들이 많다. “조금씩 색다르게 차린 자그만 꽃밭들이 나 여기 있어! 하던 / 나지막한 담장들”이 사라졌고 담장 너머 작은 마당이 있던 낮은 대문의 집들도 사라졌다. 그 대신 다세대 주택이 빼곡히 자리를 잡았다. “낮은 대문 지붕에 애완동물처럼 앉아 있던 엄청 큰 호박, / 오가며 서로 낯익히던 강아지들 고양이들”, “목청 별나게 좋았던 새”도 사라졌다. “산책길에 하나씩 점등되던 제각각 등불들”, “눈 내리면 현관 앞에서 / 웃던 몇몇 조그만 눈사람들”도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사실은 사라진 것에 대한 실망과 함께 새로운 이미지가 시인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당장은 실망이 더 크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꺼내더라도 윤기 다 휘발되어 / 전처럼 만지듯 즐길 수는 없을 거다.”라고 말한다.
모든 추억의 영상은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시간과 장소가 변하면 이미지의 색상이 변한다. 변한다 하더라도 시인은 그 이미지의 다른 모습과 만나기를 희망한다. 추억의 이미지를 담은 내력은 “옛 책 뒤적이다 끼워두고 잊었던 단풍잎” 다가오듯 나타날 것이요, “마지막까지 버티던 집 낮은 담장에” 얹힌 갈잎의 형상으로 다가올 것이다. “바람 일면 빨갛게 곤두서 바르르 떨기도” 하며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겠지만, 시간과 장소가 달라졌기에 그 이미지는 과거의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지 자체가 사라지는 법은 없다. 이미지는 사물의 근원적 속성이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영감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종말론에 의하면 죽음 다음은 무(無)이거나 초월적 영생(永生)이 있다고 본다. 불교의 순환론에 의하면 죽음 다음에 인과 윤회의 과정이 이어진다고 본다. 시인은 이 둘을 융합하여 자신의 독특한 사유를 형성하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했다. 시인은 현실의 삶에 머물면서도 마음의 영역에서 삶의 유한성을 넘어서서 영원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 사라지고 변한 풍경은 삶의 유한성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풍경이 단순히 소멸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형상으로 변형되어 다가오리라는 상상은 유한성을 넘어선 영원의 세계를 표상한 것이다. 영원을 기대하는 이미지가 시에서는 옛 책에 끼워둔 단풍잎, 낮은 담장에 얹힌 갈잎의 이미지로 나타났다. “바람 일면 빨갛게 곤두서 바르르 떨기도 할까?”라는 상상은 유한한 삶을 넘어서서 영원의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내면을 드러낸다. 시인은 대상의 이미지를 마음의 갈피에 섬세하게 접어 넣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도 삶의 유한성에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의 이미지가 사라진다 해도 그것은 다른 이미지로 변형되어 존재의 지속성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에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어 시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시는 산책길의 풍경 변화가 아니라 정식으로 세상 뜨는 날의 정황을 상상했다. 가슴 아픈 그날의 상상이다. “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는 뜻을 “말 대신 손 한번 꽉 잡아주”는 것으로 표현하고, “외톨이가 되어 /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 한 번 더 둘러보고” 가겠다고 말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애잔한 상상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시행은 애절한 고혼의 영결 장면이 아니라 평시의 산책길 그대로다. 근자에 들어선 아파트와 빌라들을 거쳐서 “구두 수선 퀀셋 앞 콘크리트 바닥에 /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무작정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서 / 작은 밤 한 봉지 사 들고” 평소와 다름없이 서달산 언덕에 오른다는 것이다. 육신을 떠난 영혼의 상태에서 눈에 익은 풍경들을 스치며 서달산 능선 길을 걷는다. 산책길의 풍경 묘사는 구체적이고 세밀하다. “길에 굴러들어온 돌멩이는 / 슬쩍 걷어차 길섶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처럼 현실의 행동 양식이 상상의 세계 속에 그대로 수용된다. 이를 통해 현상계와 상상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죽음의 세계는 단절과 종말이 아니라 삶의 연장으로 재현된다. 이렇게 걷다 보니 하늘에 별이 돋는 시간에 이른다. 전에는 이렇게 샛별이 뜰 때 맹세를 한 적도 있지만 세상 떠나는 마당에 새로운 맹세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인은 지금 떠나지만 “내일 저녁에도 이 별은 뜨리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의식에는 영원에 대한 명상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상상하지 않고 생각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생각은 현실에 기반을 둔 사유 작용이다. 현실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망자가 된 시인의 산책은 계속 이어진다. “길이 슬그머니 바닥을 지울 때까지” 걷겠다고 말했다. 시인의 보행은 세상에 있건 세상을 떠나서건 변함이 없다. 시인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이 스스로 바닥을 지울 때까지 걷겠다고 했으니 사유의 차원에서는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일은 없다. 길이 스스로 사라질 뿐이다. 이렇게 시인은 죽음의 소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시간의 유한성을 넘어서서 영원의 세계로 가는 생각을 펼칠 뿐이다. 그 생각의 흐름은 이미지의 연쇄로 전개되기에 구성 자체가 시적이다.
「코로나 파편들」은 조금 다른 상황을 설정해서 시인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코로나 격리 지침으로 가족들과 식당에 모일 때도 멀찍이 떨어져서 앉아야 한다. 산사람들과도 이렇게 격리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경우를 당하니 만날 수 없는 옛사람들이 떠오른다. 8년 전에 세상 뜬 친구 김치수가 꿈에 나타나, 당신의 글 읽었다고 말하며, 애호하던 와인 한 병을 내민다. 현실에서는 집에 콕 틀어박혀 있으니 ‘혼자 있음’이 생활화되었다. 그 ‘혼자 있음’에서 외로움이 빠지면 ‘혼자 없음’이 되는가 자문해 본다. 그는 일찍이 온전히 감내할 만한 환한 외로움을 ‘홀로움’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제 그는 ‘혼자 있음’에서 ‘혼자 없음’을 연상한다. 이 말이 함축하는 내용도 융합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서양의 종말론이나 불교의 순환론 어느 한쪽에만 머무른다면 이런 사유가 나올 수 없다. ‘혼자 있음’에서 외로움을 빼고 ‘혼자 없음’의 상태를 관조하는 것은 종말론과 순환론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의 세계로 이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시간의 흐름을 관망하다 보니 그에게 ‘혼자 있음’과 ‘혼자 없음’의 구분도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둘을 반반씩 섞어 살다 간다면!” 하는 새로운 상상도 한다. 반반씩 섞어 살기 위해서는 종말론과 순환론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여기에 아무도 접하지 못한 시인만의 독특한 상상적 전환이 있다. 사물의 이미지에 충실하고 이미지의 변화를 통해 영원에 가 닿으려는 시도를 벌이는 것. 이것이 시인이 이룩한 독특한 형이상학적 전환이다.
이 전환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1970년부터 싹트고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 50년 세월을 넘어 이러한 사유의 세계관에 도달한 것이다. 경이로운 것은 사유의 내용보다 사유의 지속성에 있다. 이 사유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사유와 세계관이 그것에 어울리는 언어 표현의 외연과 훌륭히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해는 시인의 등단 65주년이 되는 해다. 65년이라는 시간의 양보다 조금도 시들지 않는 시인의 감성과 사유가 경탄스럽다. 그와 더불어 문학동네에 “사는 기쁨”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함께 누리고 싶다.

이숭원(李崇源) l
1986년 《한국문학》 등단. 저서 『작품으로 읽는 한국 현대시사』 『매혹의 아이콘』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김환태평론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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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