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023
Extra Form Output
저자 김효선 

  

    

 

 

 

눈,

ㅡ 이라는 경전

 

 

        

 

 

 온다는 말.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다. 긴밀하든 느슨하든지 간에. 버림과 희망을 동시에 가진 기다림으로 우리는 왜, 때문에 같은 ‘접속사’들을 내려놓지 못한다. 멀리 서 있는 그녀는 아주 작게 웅크린 누에고치처럼 보였다. 기차는 아직 역에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면 이미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올 것만 같은 날씨였다. 기차를 놓치는 일에는 종종 다른 종류의 입김이 끼어든다. 약속을 놓치고 사람도 놓치고 나면 시절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만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온다는 말은 기다린다는 말이니까. 온다는 사람 대신 방금 막 태어난 작고 하얀 얼굴을 보았다. 목화솜처럼 입을 벌린 하얀 알맹이들이 그녀의 손바닥으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차가운 감촉에 뜨거운 기억들이 훅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이미 놓쳐버린 사람이 다시 온 것처럼. 어디선가 희미하게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석유 냄새였는지도 모르겠다. 한쪽 심장이 덜컹거린다. 어디선가 첫눈을 품었던 철로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땅이 흔들리고 구름의 이동이 시작됐다.

 그녀는 줄타기 곡예사였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줄타기를 하던 시절이 늘 그리웠다. 결국 줄타기를 하게 되지만 마지막이라도 예감하듯 그녀는 줄을 타다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어느 계곡으로 떨어져 실종된다. 남편 소세키는 그녀가 실종된 후에 너무 슬픈 나머지 눈이 멀고 만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뛰어난 그림 실력을 발휘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세키에게 시를 배우러 온 제자 유코를 통해 그녀가 혼슈 지역 어느 계곡 아래 잠들어 있는 걸 알게 된다. 결국 소세키는 아내를 찾아가 그 옆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 이야기는 시인 유코가 스승 소세키를 만나 진정한 시(詩)에 눈을 뜨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막상스 페르만, 『눈』)이다. 침묵이 어떻게 시가 될까. 하이쿠는 침묵을 듣고 침묵하는 시 같다. 마치 허공의 침묵을 읽어 침묵하는 ‘눈’처럼. 우리는 어떻게 ‘눈’을 읽어야 할까. 말을 참으면서 시를 어떻게 써야 할까. 늘 고민하지만 아직까지 침묵에 다가가는 시를 쓰지 못했다. 우리는 무슨 말(침묵)을 할 수 있을까. 하늘을 빌리면 고백은 시를 가질까. 그녀의 이름은 네에주(NEIGE) 프랑스어로 ‘눈’을 의미한다. 아찔한 공중에서 한없이 흔들리다 계곡 아래로 떨어져 얼음장 아래 잠드는 이름. 그녀가 줄타기 곡예를 좋아한 건 ‘균형’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삶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란 얼마나 오랜 인내와 책임을 볼모로 잡는가. 어쩌면 그녀는 균형의 피로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몸의 중심은 생각에 있다. 육체가 정신과 한 몸일 때 균형이 생긴다. 그녀가 가족을 뒤로하고 왜 다시 줄을 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삶에서도 시에서도 균형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는 말보다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은유와 상징이다. 한학적으로는 ‘중용’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끝나지 않을 이야기다. 차가움이 따뜻함을 만나 균형을 이룰 때 생겨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끊임없는 흔들리는 줄 위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어야 사랑(시)은 완성된다. 백색과 백지에서 다른 색이 번져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침묵이다. 하지만 삶에도 이유 없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기차도 가끔 선로를 벗어나 가던 길을 놓치는 것처럼. 침묵과 균형의 시를 찾아 우리는 늘 떠나있어야 한다.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는 너무나 관능적이어서 오히려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침묵의 본질마저 헤집어놓는다. 작가는 인간의 욕망을 오줌이라는 배설물을 통해 드러낸다. 우리가 가장 더럽다고 느끼는,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들키고 싶지 않은, 밑바닥의 세계다. 아마 어떤 이는 음란하고 저속하다며 이 책을 불길로 내던져버릴 것이다.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생에서 경험했던 일들과도 연관이 있을 테다. 2부 「일치들」에서 작가는 아버지의 병과 어머니의 우울증이 이 이야기에서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났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왜 오줌과 달걀과 눈알까지 등장했는지를. 그런데 여기서 왜 흰 ‘눈’이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로 나타나게 되었을까. 거기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었다. 다만, ‘흰’ 안에 감춰둔 은밀함이 ‘눈’이라는 카타르시스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감추고 싶은 ‘먼지’ 같은 내면의 욕망이 ‘눈’이라는 이미지로 세탁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다. 수전 손택은 그것을 포르노그래피라는 문학적 형식으로 접근한다. 예술의 형식에는 늘 어떤 파괴가 따라다닌다. 다수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어느 지점까지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흘러가기도 한다. 그렇게 문학의 힘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상력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후의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둘 뿐. 기차는 어느새 연민의 눈빛으로 가득한 눈의 터널로 진입한다.

 욕망이 바닥을 드러내고 나면 연민이 등장한다. 기다림, 그리움으로 버티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다. 일본 영화에는 유독 눈을 배경을 펼쳐지는 이야기가 많다. 이를테면 일 년의 반은 눈으로 뒤덮인 홋카이도 오타루 말이다. 모든 건물이 흰빛에 둘러싸여 마치 숨겨놓은 이야기라도 있는 듯. 오타루가 영화 <윤희에게>의 배경이 된 것도 그런 충분한 상징성에서 비롯됐을 터이다. 어느 날 ‘윤희’에게 “잘 지내니?”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윤희’가 좋아한 첫사랑은 동성의 일본인 ‘쥰’이었고 부모는 그런 윤희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가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시킨다. 쥰 역시 부모의 이혼으로 일본으로 돌아간다. 윤희는 그렇게 딸 ‘새봄’을 낳았다. 내내 추운 겨울에 묻혀 살았던 윤희와 쥰. 그 둘을 겨울 밖으로 꺼내주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도와준 인물이 새봄이다. 우리는 살면서 선택의 순간이 오고 둘 중 어느 것 하나를 골라도 후회가 따라오는 결정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걸 감당하는 몫으로 어른이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그러니 어떤 선택의 결말이든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에 의한 연결도 시간이 지나면 후회는 희미해지고 다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치는 기차였다고 느낀다.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의 빛깔이 있는 것이라고.

 눈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가장 순수했던 시절로 마음을 부려놓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 기억 한 귀퉁이에 살아있는 그 순수한 ‘빛’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늦은 밤 오줌 누러 나왔을 때 본 세상이다. 그때는 화장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노천 화장실이 마당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마당으로 나왔을 때 나는 그만 아찔해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미지의 세계. 마치 처음 지구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조심하며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섰다. 어떤 빛에 이끌린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아주 캄캄해서 오히려 환한 하늘과 온통 빛으로 가득한 지상의 그 이율배반적인 풍경이 나를 숨 막히게 압도했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세상이라니. 나 홀로 그 세계에 들어와 있다니.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주인공이 장롱 속에 나 있는 문을 열었을 때 만난 세상과 조우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대문 밖 올레길에 서 있었다. 보석보다 더 환한 빛이 쏟아지는 황홀감에 추위마저 잊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따뜻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을 겪은 건 그때가 처음이다. 그 후론 한 번도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일생의 단 한 순간이었던 그때. 그 황홀이 지금까지 눈에 대한 동경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눈[雪]에서 흘러나오던 순수한 눈[眼]빛들이 뿜어내던 더운 숨결 때문이었을까. 춥고 가난했던 마음에도 희망이 움트는 기운이 느껴졌다. 나를 절망에서 끌어올린 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 순백의 눈빛이었다. 차가운 눈 결정이 모여 어떻게 그토록 따뜻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차갑다고 느낀 그 마음에도 누군가는 기대고 싶은 간절함이 녹아있는 것은 아닐까.

 나카야 우키치로(『과학 이전의 마음』)는 눈을 연구한 일본의 과학자다. 1932년부터 눈 결정을 연구했고, 세계 최초로 인공눈 실험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어떤 온도에서 눈의 결정이 만들어지고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다. 이 책은 그의 연구 과정과 함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다른 에피소드들이 곁가지로 이어져 있어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책에서 본 눈의 얼굴, 눈 결정은 신비로움을 너머 새로운 세계였다. 꽃이나 별, 나뭇잎 모양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보다 더 정교하면서 독특한 문양이다. 비록 온도와 습도와 공기 중에 어떤 것들이 섞여 그런 문양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내 눈에는 다른 상상이 끼어들었다. 어떤 탄생이 만들어낸 숨은 이야기들이 눈의 결정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눈 내린 들판에 나가 한참 눈을 들여다본다. 까마귀와 고라니가 다녀간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동물의 족적이 또 한 번 나를 상상의 저편으로 데려간다. 사람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걸어간 흔적이다. 눈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세계. 겨울에 읽는 자연의 경전이다. 겨울이라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눈이 내리면 머리를 조이던 생각들이 빗장을 풀고 달아난다.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마술. 애틋하고 슬프고 아름답게 눈이 오신다. 있는데 없는 것 같은 마음처럼 없는데 끝없이 벅차오르는 마음처럼. 영영 쓰지 못하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시처럼. 그러나 끝내는 마음에 품은 한 사람으로. 그 한 사람을 읽기 위해 겨울마다 눈이라는 경전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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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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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