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상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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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피아니스트 ― Duet 4hands
자주 귀를 만진다
음악이 흘러넘쳐
차고 높은 음들이 역광으로 날아갈 때
벼른 꽃다발처럼
불쑥 내미는
잘 잊은 슬픔이
잘 익은 손끝으로 다시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는 느낌으로
음정이 음정에 포개어질 때
페달은 엎질러진 화음을 오래 움켜쥐고
검은 벽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 있는데
무엇일까 정적도 적막도 아닌 그것은
흉가의 먼지처럼 여유로운 생활로
흉기 위의 먼지처럼 평화로운 태도로
누군가를 대신 살아서 누군가가 연주하는 시점이야
창밖엔 새빨간 눈발이야 손을 데리러 온 손들이야
건반이 붉어지는 믿음을 갖게 되었어
손가락을 떼도 끝없는 소리 하나를
모서리 기별
기대 없이 기댄다
가누는 몸 기우는 의자
저질러진 숨 나의 공기
의자는 견디는 의지로 틈이 벌어진다
삐걱이는 사이에 와 들뜬 작은 봄 공기들
삐걱이는 헌 책을 다시 읽는다
알 것 같은 일들이 책장을 넘긴다
덜 마른 꽃이 떨어진다
저것은 꽃이 아니구나 잘못이구나
알 것 같은 일들이 내일을 치웠다
떠나지 않고 떠난 사람들을 생각한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는 밤은 무섭고
기억 없이 아픈 일이 가장 생각나는 기후여서
의자를 기울여 모서리를 세우면
두견새처럼 기별하는 소리
네가 나에게 갚아 준 말이 그러하고
내가 가장 깊게 잊어버린 말 또한 그러하다
마침표를 앞에 찍는 말들
성조의 발끝을 세우는 말들
발을 까딱이면 우는 그 소리처럼
기별은 굳이
소리를 센다
소리를 세운다
다른 나라에서
양곤의 북한 식당 청류관에서 냉면을 먹습니다 어깨 너머 흰 손길 육수 속 면을 가뿐히 들고 식초를 적시고 나는 젖어듭니다 끊지 않고 마십니다 들킬까봐 나는 면을 들이켜고 당신은 부러 멀찍이 안 보이듯 바라봅니다 나는 수많은 마지막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마지막입니다 국적을 묻지 않는 유일한 우리가 같은 말을 하는 당신이 다른 나라에서 가슴 얼얼하도록 찬 육수 부어주고 나는 미량의 독처럼 알고 마십니다
냉면과 랭면은 다른 음식일지 모른다고 다른 나라에서 목메도록 랭면을 먹습니다 두 그릇 먹습니다 흰 손 더욱 보고 싶어 국수는 입술에서 툭툭 끊어지고 들키는 당신 들키지 않도록 면을 들이켜다 통일을 알았습니다 두 시간 지나 두 개의 시간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수없이 사라질 일입니다 어디든 잘 지내요 나는 말하고 그녀는 흰 손, 배웅하는 눈빛 유리창에 막혀 먹물의 밝은 부위처럼 어룽 빛나고 갇힌 그 빛을 사랑해서 나는 곧 잊게 될 당신을 잊지 않기 위해 환등기처럼 눈을 켜고 양곤 저녁 거리마다 비추어 두었습니다
자선시
모른 체
나를 데려가는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대문 앞에서 망설이는
그림자를 움직여 바다 앞에 세우는 사람
세간이 적어 작은 기척에도 쩡
벽이 우는 집 헛기침 잦아질 때
부엌으로 나를 데려가 더운 물을 먹이는,
나를 데리고 가는 자가
나를 데리고 사는지도
모른다
물을 씹어 넘기며 어둠 속에서 건미역이 붇는 것을 바라보는 할머니 누가 파래지는 검정을 지켜보게 했는지 모른다 그 앞에 나를 데려간 자를 모른다 주무세요 늦었어요 갈라지는 소리로 모르고 싶어 아는 체 한 나를 더욱 알게 한 자가 누구인지
밥 냄새의 반대편으로 가는 밤기차에 오르는 사람 차창에 이력서를 대고 흔들리는 글씨를 적는 사람 목구멍에 들붙은 삭은 밥풀 때문에 괴롭다를 외롭다로 잘못 발음하는 사람 그걸 제 귀에 모른다로 잘못 듣는 사람
새는 모른다 새소리만 들판을 가로지른다
철로는 상장(喪章)처럼 검은 사다리꼴
얼굴은 영정처럼 차창 밖에 떠 있다
그는 모르는 집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가보자 한다
오하이오 오키나와
추운 비행기를 타고 나는
봄에 미리 와서
흰 옷을 입고 나이를 세다
손톱을 주웠네 반짝이는 바닷가 끝에서 끝으로
비행기가 날고 오 분에 한번쯤 귀를 만졌네
서울은 눈이 많고 추위와 더위가 길고
기후가 나를 출발하게 하는데
아무도 모르고 벚꽃까진
멀다 하는데 나는 무수히
무수히 눈을 뜨고 여기는
봄으로 건너뛰는 길인데
기후가 나를 발견하는데
우는 사람을 보았네
우는 사람이란 무엇일까 여행지에선
길 잃은 골목이 반갑고 술집이 있네
얼음은 울음처럼 덜컥 내려앉네 잔 속에
술을 녹여 먹었네 아와모리는 차고
서울은 무섭고 서울은 추운데
휘파람을 불었네 겨울에 부르튼 입술로
이주해 온 봄에서
나는 꿈인가보다 아와모리는 뜨겁고 꿈은 정확하고
실패한 고향이었으면, 잠이 흐르지 않는
남은 어둠 속에서 아와모리를 마셨네
손바닥과 목구멍만 남네 뜨겁게
창밖이 보일 때까지 깨어서
잠들었네 봄의 아침에
골목처럼 지나가는 나는 12월의 공기고 아직 태어날 순 없고
우는 사람이 우는 사람을 달래고 있었네
떨림이 떨림을 포개어
제자리로 힘을 돌려놓을 때
목소리를 잠그고
비행기를 돌려보내고 매일
비행기를 기다리다
아와모리는 식고
봄은 무엇일까
봄에만 있는 것이 있었네
서울에만 있는 것은 봄에도 있어서
나는 양팔로 맞바람을 끌어안고
‘오하이오 공기 인형’ 저절로 말했네
너머
제자리로 돌아온 새는
어제의 새가 아니었다
돌아와 마주한 가족들은
처음 보는 다정한 사람들이 되었다
물웅덩이는 나를 비춘다
내가 없던 시간에도
너머의 나는 잘 있는지
그의 등에서
곤란한 진심이 그림자처럼 빠져나온다
등은 그를 더욱 그답게 마무리한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런 말투로써 나는
온전히 사랑의 눈동자를 지니게 된다
너머의 내가 철봉을 넘을 때
말아 쥔 손바닥에서 이편의 나는 피 냄새를 맡는다
나를 덮어쓴 채
신발 끝으로 그림자를 문지르기 시작한다

이상협 | 2012년 『현대문학』 등단.

절대적 방랑자
여기 목적 없이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오래된 순례자의 유전자를 지닌 사람. 그의 여정에는 특정한 대상이 놓여 있지 않다. 그는 무엇을 먹겠다거나 어떤 장소를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단순히 일상으로부터 긴장을 이완하고 휴식을 취하며 즐거움을 취하는 느슨한 관광객과 똑같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 것들조차도 그에게는 하나의 목적이라 여겨질 것 같다.
“나를 데려가는 자가 누구인지/모른다”는 고백처럼 그는 그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이끌릴 뿐이다. 그는 마치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있는 듯한 느낌에 시달린다. 분리된 ‘나’는 이처럼 “대문 앞에서 망설이는/그림자를 움직여 바다 앞에 세”운다. 또 어느새 “그는 모르는 집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가보자 한다.”(「모른 체」)
이런 사람들의 행보는 대상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의 움직임은 미학이 예술을 대체하고, 예술 경험이 작품보다 우위에 서며, 절차와 입장이 특성을 대신하고, 타협과 관계가 본질을 구성하는 오늘의 예술 체제와도 유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탈속한 사람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는 구도자와는 다르다. 오히려 그가 이렇게 계속 방랑하는 이유는 그가 세계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상의 세계에 정착하지도 못하지만 또 완전히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바꿔 말하자면 그는 지금 그를 계속 바깥으로 추동하는 내부의 또 다른 ‘나’에 의해 계속 이끌리는 중이다.
무엇이 그를 떠나게 만드는가. 목적 없는 떠남의 종착지를 함부로 채워 넣을 수는 없지만 원인과 과정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기대 없이 기댄다
가누는 몸 기우는 의자
저질러진 숨 나의 공기
의자는 견디는 의지로 틈이 벌어진다
삐걱이는 사이에 와 들뜬 작은 봄 공기들
― 「모서리 기별」 부분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기댄다”는 말에서 “기대”가 빠진 것처럼 의자는 계속 삐걱댄다. 복잡한 말은 사라지고 오직 위태롭게 견디는 의지만 남아 있다. 가까스로 의자에 기대어 겨우 몸을 가누는 사람과 기우는 의자의 모습은 이처럼 타성에 젖은 관계와 점점 틈이 벌어지는 과정을 단번에 형상화한다. 기대는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시행은 작은 차이들은 반복되며 점점 틈을 벌이는 변화의 과정을 우리가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삐걱거리는 소리의 감각은 「피아니스트」에서 더 섬세하게 살아난다.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는 느낌으로
음정이 음정에 포개어질 때
페달은 엎질러진 화음을 오래 움켜쥐고
검은 벽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 있는데
무엇일까 정적도 적막도 아닌 그것은
흉가의 먼지처럼 여유로운 생활로
흉기 위의 먼지처럼 평화로운 태도로
― 「피아니스트」 부분
함께 섞이고 포개지던 선율이 엎질러진 화음으로 바뀌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보다 페달로 그것을 지연시키는 상황이 더 위태롭다. 차마 페달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모습은 견디는 의지만 남은 상태와 유사하면서도 더 처절하다. 고요하게 움직임이 없어서 먼지가 쌓인 채로 드러나지 않지만 여유로운 생활과 평화로운 태도의 이면에는 이처럼 섬뜩한 것들이 담겨 있다.
우는 사람을 보았네
우는 사람이란 무엇일까 여행지에선
길 잃은 골목이 반갑고 술집이 있네
얼음은 울음처럼 덜컥 내려앉네 잔 속에
술을 녹여 먹었네 아와모리는 차고
서울은 무섭고 서울은 추운데
휘파람을 불었네 겨울에 부르튼 입술로
이주해 온 봄에서
나는 꿈인가보다 아와모리는 뜨겁고 꿈은 정확하고
실패한 고향이었으면, 잠이 흐르지 않는
남은 어둠 속에서 아와모리를 마셨네
손바닥과 목구멍만 남네 뜨겁게
창밖이 보일 때까지 깨어서
잠들었네 봄의 아침에
골목처럼 지나가는 나는 12월의 공기고 아직 태어날 순 없고
우는 사람이 우는 사람을 달래고 있었네
떨림이 떨림을 포개어
제자리로 힘을 돌려놓을 때
― 「오하이오 오키나와」 부분
이 시는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자의 심정을 우리가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끝까지 페달을 놓지 않고 견디던 ‘나’는 낯선 곳에서 ‘우는 사람’을 발견한다. 고요하고 굳건하게 견디는 사람은 우는 사람과 맞닥뜨리며 비로소 자기 내부의 떨림을 발견한다. 얼음처럼 딱딱했던 울음과 차가운 바람에 부르튼 입술은 아와모리의 뜨거움을 따라 서서히 녹는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봄의 기운이 들어서는 것처럼 맺혔던 것은 풀리면서 조금씩 진동하며 자신의 리듬을 되찾기 시작한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개 새로운 곳에서 다른 경험을 기대한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풍경과 낯선 대상이 환기하는 감각 경험은 우리의 인식을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 더불어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도 사람들을 들뜨게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때로 이런 목적은 오히려 우리에게 강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특정한 목적에 사로잡히면 다른 ‘나’를 체현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제자리로 돌아온 새는
어제의 새가 아니었다
돌아와 마주한 가족들은
처음 보는 다정한 사람들이 되었다
물웅덩이는 나를 비춘다
내가 없던 시간에도
너머의 나는 잘 있는지
그의 등에서
곤란한 진심이 그림자처럼 빠져나온다
등은 그를 더욱 그답게 마무리한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런 말투로써 나는
온전히 사랑의 눈동자를 지니게 된다
너머의 내가 철봉을 넘을 때
말아 쥔 손바닥에서 이편의 나는 피 냄새를 맡는다
나를 덮어쓴 채
신발 끝으로 그림자를 문지르기 시작한다
― 「너머」 전문
시인의 방랑에는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 떠남은 다른 ‘나’의 리듬을 발굴하는 일이다. 충분히 통제하고 조절하던 일상의 지평 ‘너머’의 새로운 ‘나’와 조우하는 일과도 같다. 따라서 “제자리로 돌아온 새”는 더 이상 “어제의 새”가 아닐 수밖에 없다.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물웅덩이 속에서 시인은 “곤란한 진심”을 발견한다. 떠나려는 ‘나’와 돌아오려는 ‘나’ 사이에는 이런 난처함이 있다. 꼭 여행자가 아니더라도 돌아오려는 마음의 다른 한편에 나가려는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은 사람의 보편적인 고민과 닿아 있다. 우리 모두는 이런 곤란함을 탐색하는 여정에 동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지금 우리를 대신하여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지금 반드시 비행기나 밤 기차를 타고 물리적으로 먼 곳을 향하는 것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탐색하는 여정의 곤란함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하는 것 아닌가. 가장 먼 곳을 향하여 끝없이 자신을 확장하려는 자세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면서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시인의 정착 없는 방황과 목적 없는 여행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일상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관점을 열어준다.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강박을 벗어나 관계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글 ․ 장은석 | 문학평론가. 서울 출생. 2009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평론)으로 등단.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이달의 시인 201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