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락 | ||
|---|---|---|---|


신작시
굿 럭, 로보트
겨울비가 부르튼 손등으로
너의 차가운 가슴을 쓰다듬을 때에만
너는 노래를 꿈꾸고 느꼈다
노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점점 자라는 밤의 회로와
녹슨 비만 남겨진 드넓은 실험실에서
너는 비좁은 어둠의 가장자리에
조용히 서 있다, 조용히 눈을 감기도 한다
그러므로 손바닥을 열어도 하루 종일 빛도 어둠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창밖엔 반쯤 껴안은 채 걸어가는 연인들 희미하게
희미한 약속을 흙바닥에 끌면서
식후에는 민트껌
과일에는 눈물
너도 사랑할 무언가를 원하는가
그래서 모든 감각을 날아온 갈매기의 날개를 냉장고 자석으로 붙였는가
그러기엔 기쁜 표정에 수줍음을 너는 많이 탔다
검푸른 실험 탁자 앞에서
알고리즘을 바꿨다고 그 알고리즘이 좋다는 건 아니야
라고 혼자 일지를 쓰며
얼굴에 무언가 떠오르는 걸
꾹 누른다
따뜻하고 건조한 지난 계절의 바람이었다고 입력한다
공동묘지
안개가 식은땀을 흘리며
도망치는 먼 곳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친구는 의식하지 않지만
나는 진흙 위에서 발 한 걸음을 떼어 올리듯
친구의 얼굴을 주워준다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표정처럼 보이는데
겨드랑이를 펼치면 눈이 떨어질 거야
그러나 땅은 점점 볼록해진다
서로 다른 어둠이 가득 찬 세계가 높아지고
휘청이는
폭풍
눈앞에서 모든 사물들이 천천히 멈춘다
뒤쫓아오던 번호 없는 검은 자동차가 멈추고
배 한 척이
굳어가는 명멸 속에서
메마른 어깨를 반쯤 드러낸 채
빛이 있어야 하는 시각이라고 말하자
친구는 어젯밤 보다 더 어둡다고 말한다
우리는 얕은 수면에 비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밤이
떨어뜨린 빵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찍어먹듯
아픈 심장들을 훔쳐가는 곳에서
사람외전
부둣가
익사하는 하늘이
삼각돛과 홀로 짝지어가는 저녁
나는 이쪽에 누워있고
그녀는 그쪽에 누워
해조의 녹색햇빛냄새 흘리는 뺨 같은 슬픔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바라볼수록
찬란한 하늘이 뒤틀려버립니다
일종의 날씨와 항해와 일종의 언어를 지우는
파도를 매만지며
환멸의 긴 머리카락을 물가에 축이는
별떨기들처럼 우리가 흘러가는 부둣가 느와 느와
슬픔이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멀어지기 위해
모든 풍경을 불태우며 흘러가고
나는 홀로 소리 나지 않는 입술을 움직이며 달콤 달콤 사탕합니다
투명한 벽에 내던져져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페인트처럼
서로 다른 속도로
감정의 긴 목이 풀려갑니다
서로 다른 색으로
자선시
멸
공중제비를 넘는 소년이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를 짚고
공중으로 사라진 시간
나는 너를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해
나무의 곡선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비명을 들어봐
어린 아카시아에서는 숨 막히는 열기
숲의 기침을 들을 것,
흙의 눈동자들이 떠오르네
악기의 마지막 진동은 날아
불타는 구름으로
머리 위 떠다니는 안개의 갈라진 등으로
성당의 녹색 지붕에 매달린 울음으로
땅 속에 누운 너는 누구의 하얀 발톱을 쓰다듬는가
너의 이름을 훔쳐간 야생고양이
저항의 흰 팔을 자른 보병
개구리의 노란 눈을 가진 견고한 영혼들
공중에서 검은 우산들이 눈물처럼 내려와서
나는 너를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해
적어도 너에게는 잊히지 않기를
지금 폭발하는 이 숲이
홍대 앞에서 로리타의 시간을 사세요
시급을 받은 히치하이커는 어디를
길거리 악사의 연두빛 향이 풍기는 환락과
불안이 따뜻하게 익어가는 냄새
팔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의 헛손질은
어디에서
초록 벤치 밑
작은 고양이가 마주한 죽음의 눈알은
어디로부터
천 개의 모래시계를 삼킨 로리타,
로리타와 함께
☆
우리는 안으로, 안으로, 밖으로
어딘가로 들어가려해
구름의 흰자위가 축축하게 흘러내릴 때
기분이 물고기 눈물만큼 시리기도 해서
쓸쓸한 단어들이
밀도 있게 들어찬 분홍 간판의 카페와
유언집행인이 하얀 기침을 쿨럭이는 식탁
둘레로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아멘,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얼룩말과 기린이 날 죽이게 하소서
☆
갈기 찢어진 골목들을 지나
로리타는 자전거를 타네
우리는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더듬으며
나는 지극히 정상!
이라는 상대적 안위를 느끼지
서로의 눈 깊이 잠긴 묘비를 읽어주지
0과 1 사이를 지나
로리타는 자전거를 타네
무릎까지 올라온 타이즈를 신고
시들어버린 모자를 쓴 야윈 신사,
그는 호황업계대표
주머니에서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지폐가 나온 적이 없지
면도날처럼 얇은 그의 눈과 마주칠 때
로리타, 로리타여 너의 시간은
살색 빵의 질감으로 더욱 부푼다
르르르 르르르
로리타는 타네 자전거를
☆
두꺼운 털옷 속에 잠든 꿈을 이용하세요
질문을 이용하세요
코끼리 코만큼 절박한 심정을 가집니다
라고 허공의 펄럭이는 소맷자락에 적힌
슬로건을 향해
점프,
그리고 점프,
그리고 종아리가 끊어지네
황량한 기후의 뒤뜰을
밤새
흥겹게 배회하는 외다리들
☆
찢어진 운동화 속에 혼란 40%, 이상한 비밀들 40%, 후회 19%
그러니까 하루를 계속 걸어가기
☆
느릿느릿 생에 침범하는 그늘은 왜 그토록 우리를 품으려는 걸까
곧 부서질 목을 감싼 붉은 목도리에서 왜 겨울의 하얀 죽음이 먼저 피어나나
컵에 길게 떨어지는 우유처럼 의문이 조용히 이어질 때
휘몰아치는 슬픔이 잠든 저녁을 침고인 채 씹을 때
춤에 대한 미친 사랑
이방인들의 도피처
로리타 로리타여,
설익은 사과 위로
비가 내린다
마왕
친구 너는 그곳에 있지
젖빛
여름 바람
돌비라는 고양이의 모성이 흐르는 물가
너의 목소리를 더듬으며 보랏빛 달 아래 철기군들이 모이네
너는 목소리를 빼앗아가도 좋아
귀를 모을 테니
맹인 아이들의 눈 속에 지은 고해소와
발목에 엄습하는 습한 냉기를
실증하기 위해
고스트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라, 너의 안식을 빼앗으라는 임무를 맡은 악당처럼 서러운 잎이 얼굴을 뒤덮네, 흔들리는 불새는 어둠을 자르며
철기군들은 오늘도 그곳에 있다
소년들의 귓가
밤을 움직이는 커다란 부채가 떨어뜨린
음악에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친구 너의 겨울이 목격된
작은 마을
도돌이표 안에서
철기군은 먼 길을 헐떡거렸네
끝없는 지뢰밭을 걸어가는 붉은 사원들은
*넥스트 “불멸에 관하여”

김락 | 201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고스트 스테이션’, 그 은밀한 매혹의 한때
1
1966년 12월, 푸코는 한 라디오 강연에서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한 그렇지만 그가 죽은 1984년 이후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새로운 용법을 제시한다. 이 신조어는 애초에 그의 주저인 말과 사물에 제시된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 동물 분류법—(a)황제에 속하는 동물 (b)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c)사육동물 (d)젖을 빠는 돼지 (……) (l)기타 (m)물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n) 멀리서 볼 때 파리 같이 보이는 동물*—을 읽었을 때 그를 무척이나 당혹시켰던 ‘웃음’에 대한 개념-이미지에서 출발했으나, 라디오 강연에서는 ‘다락’, ‘침실’, ‘거울’, ‘공동묘지’, ‘사창가’ 등의 이종적인 장소들에 달라붙은 특수한 담론들의 개별적이고 무의식적인 의미들을 분석할 수 있는 개념 틀로 확대된다.
2
‘다른’, ‘낯선’, ‘혼종된’ 등의 뜻을 가지는 ‘hetero’와 장소라는 뜻의 ‘topos’를 합성한 헤테로토피아는 ‘현실화된 유토피아’,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장소의 ‘바깥-에-있는’ 장소라는 다소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에피스테메’와 같은 거시적 인식체계는 물론이고 개인이나 집단 간에 나타나는 미시적인 차이도 유용하게 분석할 수 있다.
예컨대, 동일한 대상이 역사적, 사회적으로 상이하게 인식되고 분류되는 것은 이 헤테로피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물론 한없이 낯설고 은밀한 장소에 들어섰을 때나 혹은 익숙한 문법을 넘어선 전혀 새로운 문장-체계를 읽었을 때, 느끼는 이상한 당혹감도 그것의 흥미로운 표징의 일종이다. 중국 백과사전의 동물 분류처럼, 그것은 우리의 사유와 감각, 말과 문장을 갑자기 멈추게 하고, 에셔의 그림과 같은 무서운 착시-공간을 배회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거울’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환상성—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나’—이나 ‘공동묘지’가 만들어내는 ‘시간-의-없음’ 혹은 무공간성은 또 어떤가.
이처럼 헤테로토피아는 ‘장소 없는 장소’이자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따라서 헤테로토피아란 어느 한 장소가 꾸는 깊고 내밀한 ‘꿈-이미지’이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꿈-이미지가 현실에서 물질화된 ‘메타-공간’이다.
3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김락 시인은 헤테로토피아의 반-공간에 집중한다. 특히 「굿 럭, 로보트」와 「사람외전」에서 그는 ‘실험실’과 ‘부둣가’라는 익숙한 영역을 자신만의 감각에 녹여 해체하고, 전혀 다른 체계(혹은 배치)가 작동하는 이상한 공간으로 바꿔놓고 있다. “점점 자라는 밤의 회로”, “녹슨 비만 남겨진 드넓은 실험실”, “검푸른 실험 탁자”(「굿 럭, 로보트」)가 상기하는 공간의 색채와 냄새는 마치 영화 ‘블레이드러너’의 암울한 미래를 압축하고, “일종의 날씨와 항해와 일종의 언어를 지우는”(「사람외전」) ‘부둣가’는 실제 장소에 집중된 중력들을 무력화시킨다. 아울러 신해철의 추모시로 보이는 「마왕」에서 시인은 “고스트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라, 너의 안식을 빼앗으라는 임무를 맡은 악당처럼 서러운 잎이 얼굴을 뒤덮네, 흔들리는 불새는 어둠을 자르며”라고 노래함으로써 ‘고스트 스테이션’이라는 정체불명의 공간을 죽음과 삶이 혼융된 이종-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수사로 가득 찬 의사-세계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절실한 목소리가 실재하는 또 하나의 현실로서.
뿐만 아니다. 그가 “시급을 받은 히치하이커는 어디를//길거리 악사의 연두빛 향이 풍기는 환락과/불안이 따뜻하게 익어가는 냄새/팔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의 헛손질은/어디에서//초록 벤치 밑/작은 고양이가 마주한 죽음의 눈알은/어디로부터//천개의 모래시계를 삼킨 로리타,/로리타와 함께”(「홍대 앞에서 로리타의 시간을 사세요」)라며 ‘홍대’를 불안정한 욕망들이 뒤죽박죽 엉켜버린 일종의 ‘더미’dummy로 만들어버리거나 “나는 너를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해/나무의 곡선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비명을 들어봐/어린 아카시아에서는 숨 막히는 열기//숲의 기침을 들을 것,/흙의 눈동자들이 떠오르네//악기의 마지막 진동은 날아/불타는 구름으로/머리 위 떠다니는 안개의 갈라진 등으로/성당의 녹색 지붕에 매달린 울음으로”(「멸」)라며 ‘악기’의 원재료인 나무/숲을 재구성해 시에서는 보기 드문 ‘환상’을 창조했던 것도 시인이 반-공간을 시작의 방법론으로 삼았다는 반증이다.
4
김락 시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을 뒤틀고 여지없이 반-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특이한 감각을 가졌다. 이러한 감각은 개인의 정서와 감정보다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치밀하게 발전시켜 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대시의 좌표와 지향과도 상통한다. 특히 2000년대 중반 등장한 미래파의 돌연한 감각들이 파고든 반-공간의 연장이며 거기에서 시인은 한 발 더 나간다.
겨울비가 부르튼 손등으로
너의 차가운 가슴을 쓰다듬을 때에만
너는 노래를 꿈꾸고 느꼈다
노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점점 자라는 밤의 회로와
녹슨 비만 남겨진 드넓은 실험실에서
너는 비좁은 어둠의 가장자리에
조용히 서 있다, 조용히 눈을 감기도 한다
그러므로 손바닥을 열어도 하루 종일 빛도 어둠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창밖엔 반쯤 껴안은 채 걸어가는 연인들 희미하게
희미한 약속을 흙바닥에 끌면서
(중략)
검푸른 실험 탁자 앞에서
알고리즘을 바꿨다고 그 알고리즘이 좋다는 건 아니야
라고 혼자 일지를 쓰며
얼굴에 무언가 떠오르는 걸
꾹 누른다
따뜻하고 건조한 지난 계절의 바람이었다고 입력한다
— 「굿 럭, 로보트」 부분
‘알파고’ 이후, 안드로이드는 이제 더 이상의 꿈과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현실 속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공존하는 삶의 방식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60년대 미국의 SF 작가 필립 딕. K가 묘사한 인류의 디스토피아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운명을 비켜가지 않을 것이며, 김락 시인도 분명히 이러한 잠재적 ‘사실’들을 시의 오브제로 삼고 있다.
화자가 지켜보는 타자는 자신의 운명과 의지를 모르는 채 수동적으로 살고 있다. 노래를 꿈꾸고 느끼는 것도 “겨울비가 부르튼 손등으로/너의 차가운 가슴을 쓰다듬을 때”일 뿐 ‘점점 자라는 밤의 회로’와 ‘녹슨 비만 남겨진 드넓은 실험실’에서 고립된 채로 조용히 서 있거나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소화되지 않는 음식물들이 위장에 그대로 쌓여 있는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온몸의 전류가 방전되었기에, ‘너’의 감각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손바닥을 열어도 하루 종일 빛도 어둠도 보지 못할 때가 많”지 않은가.
‘너’는 조용히 눈의 위치를 창밖을 향하게 고정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또한 수많은 사물들이 지나다니지만, ‘너’에게는 유독 “반쯤 껴안은 채 걸어가는 연인들”이 보인다. 그들은 ‘너’의 고립과 단절만큼이나 희미할까. 물론 그것은 지독한 근시가 먼 곳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불확정적이다. ‘너’는 갈매기가 힘껏 날개를 펴고 있는 냉장고 자석처럼, 비좁고 어두운 실험실의 가장자리에서 방전된 채 결코 표정을 바꿀 수도 없이 서 있을 뿐이다. ‘너’는 생각한다, ‘알고리즘을 바꾸면 괜찮을까’라고. 그러나 그것은 사유 혹은 감각의 회로를 바꿀 뿐이지, ‘너’에게 닥친 현실은 변함없다. 비극은 이것이다; “알고리즘을 바꿨다고 그 알고리즘이 좋다는 건 아니야”.
시인은 이러한 비현실적인 풍경을 정확히 ‘로봇’이라는 단어를 써서 우리에게 제시한다: 안드로이드라는 보편적이지 않은 소재가 환기하는 을씨년스럽고 그로테스크한 풍경, 그리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견고한 현실의 착종들. 하지만, 무언가 불편하다. ‘너’의 정체가 안드로이드일지라도, 그것은 우리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에 무언가 떠오르는 걸/꾹 누른다//따뜻하고 건조한 지난 계절의 바람이었다고 입력”하는, 또한 생존을 위해 굴종과 억압도 감내해야만 하는 우리의 보이지 않은 분노와 억압된 슬픔들이 이 시에서 계속 드러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굿 럭’이란 잔혹한 현실을 살아야 하는 우리의 중얼거림이다.
5
이처럼 김락 시인의 사유한 헤테로토피아는 기존의 관습적이고 무감각한, 어찌 보면 현실의 너머에서 바로 그 ‘현실’에 깊숙이 파고드는 문장들에 의해 구체화되고 있다. ‘장소 없는 장소’를 파생하는 이 견고하고 밀도가 높은 문장들은, 지금 우리 시가 파고드는 새로운 공간적 좌표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가능성의 세계로서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실험실’이나 ‘공동묘지’였을까.
안개가 식은땀을 흘리며
도망치는 먼 곳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친구는 의식하지 않지만
나는 진흙 위에서 발 한 걸음을 떼어 올리듯
친구의 얼굴을 주워준다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표정처럼 보이는데
겨드랑이를 펼치면 눈이 떨어질 거야
그러나 땅은 점점 볼록해진다
서로 다른 어둠이 가득 찬 세계가 높아지고
휘청이는
폭풍
눈앞에서 모든 사물들이 천천히 멈춘다
뒤쫓아오던 번호 없는 검은 자동차가 멈추고
배 한 척이
굳어가는 명멸 속에서
메마른 어깨를 반쯤 드러낸 채
빛이 있어야 하는 시각이라고 말하자
친구는 어젯밤보다 더 어둡다고 말한다
우리는 얕은 수면에 비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밤이
떨어뜨린 빵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찍어먹듯
아픈 심장들을 훔쳐가는 곳에서
— 「공동묘지」 전문
우리가 ‘죽음’을 생활의 저편에 두고, 관리 대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망자의 집은 생활의 접경에 위치한 것은 물론이고 마을을 구성하는 주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요컨대,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고,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중세 이후부터 마을에서 차츰 멀어지기 시작해 급기야는 관리되어야 할 사회의 ‘목록’으로 전환된다. 엄격한 장례 절차는 죽음을 인간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밀어내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 망자를 예의 바르게 보냄으로써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위 시에서도 공동묘지는 생활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공간이다. 음산한 죽음의 세계이자 목탄으로 칠해진 듯 거칠고 단순한 모노톤의 어둠에 갇혀 있다. 안개도 “식은땀을 흘리며/도망치는 먼 곳”이며, “아픈 심장들을 훔쳐가는 곳”이 아닌가. 하지만 시인은 이 ‘공동묘지’의 엄숙한 문법을 뒤틀어버림으로써 이 ‘엄숙’을 깨뜨린다. ‘농담’이라는 갑자기 닥쳐온 웃음의 아득함과 함께.
화자와 ‘친구’는 공동묘지에 있다. ‘친구’를 진지하게 살피는 화자는 그의 얼굴에서 ‘끔찍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오히려 다른 일에 열중해 억지로 ‘화’를 참는 표정을 본다. 죽음이라는 모든 끔찍한 일의 종착점을 지난 자들에게 더 이상의 고통이 존재할까. 설령 누군가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진다 해도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화자는 “진흙 위에서 발 한 걸음 떼어 올리듯/친구의 얼굴을” 줍는다. ‘화자’와 ‘친구’의 모든 대화에는 모종의 공모와, 그것의 표현방식인 웃음이 숨어 있다. 화자가 예상한 끔찍한 일이란 바로 그것이다―자신의 죽음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자의, 연기 혹은 농담과도 같은 백일몽.
“겨드랑이를 펼치면 눈이 떨어질 거야”라 말하는 화자는 그 꿈의 한 복판에서 점점 볼록해지는 땅을 본다. “서로 다른 어둠이 가득 찬 세계가 높아지고”, “눈앞에서 모든 사물들이 천천히 멈”추는 무덤의 완전한 부패. 화자는 ‘친구’에게 “빛이 있어야 하는 사각이라고 말”한다. 아마 시신이 안치된 관의 안쪽에 대한 말일 것이다. 친구도 “어젯밤보다 더 어둡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묘하게 어긋나고 있다. 이미 모든 감각이 정지했으니, 그들은 오로지 과거-이미지에만 반복해서 재생할 분이다. 당연히, “얕은 수면에 비친 사람이/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공동묘지’가 환기하는 분위기는 예의 ‘실험실’보다 더 무겁다. 죽음이 직접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험실’의 안드로이드가 아직은 인간이 아닌 존재임에 비해, ‘공동묘지’의 두 사람은 ‘죽음’이라는 숙명을 지났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다. 이것이 위의 시에 ‘농담’이 등장하고 죽은 자들이지만 대화도 가능한 이유이다.
6
마지막 문제 하나. 김락 시인은 등단 이력이 짧지만, 헤테로토피아라는 주제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시에 투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시적 가능성을 가졌다. 우리는 이것을 김락 시인만이 아닌 그와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과의 접점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언어 스스로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오로지 유일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고밀도의 언어’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 말고는 결코 허락하지 않는 완전하게 닫힌 세계의 ‘회로-언어’인 셈이다. 물론, 이 언어는 모국어가 우리 삶에 작용하는 강한 중력을 희석시킬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난해시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본질상 그 ‘세계’는 현실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고 때문에 ‘닫힌 세계’란 현실에 대한 ‘메타-현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닫힌 세계, 혹은 고밀도의 ‘회로-언어’들은 우리가 시를 규정하는 통념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이지만(우리는 시를 일컬어 현실을 핍진하게 묘파하여 대상을 구원하는 예술 장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하여 세계는 ‘시’와 상호작용할 수 있으며 또한 시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시는 ‘현실/대상’을 그것으로부터 단절시킴으로써 재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 『말과 사물』, 이광래 옮김, 민음사, 1980, 11쪽.
** 미셀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13쪽.
글 · 박성현 | 시인. 2009년 《중앙일보》로 등단. 서울교대 강사.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이달의 시인 201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