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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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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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숟가락

―心亂

 

 

 

저승에서 이승으로

내게 울음을 버리러 온 듯

 

누군가 저 멀리 내다 버린

바구니 안의 아기 같은

당신 너머

 

한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세상의 오랜

기도를 닮아서,

 

두 발이

고드름처럼 녹아내리는

저녁

 

단 하나의 이 심장을

나더러 어떻게 내가

나를 어떻게

 

늦은 밥상이라도 차리는 듯

자꾸 당신을 데려오는 저 달은

또 어떻게

 

몸 없이 우는 법만 배워

입안 가득 神을 넣어보라는 듯

 

숟가락을 집어든

오른손이 왼손에게 죽음을

구해오라는 듯

 

오로지 그렇게

믿었던 내 심장이

삽이었다니,

 

 

 

 

 

 

 

 

 

 

울음을 부를 때는

 

 

 

피멍 든 얼굴에 달걀을 굴리듯 그렇게

 

어느덧 쉰, 그녀는 아직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냉장고 속 열 개의 달걀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늦은 아침 식탁 위에 올라가서는 무덤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개의 달걀이 닭을 부를 때도

 

그렇게 부릅니다. 쥐뿔도 없는 세상의 불알들이

 

저를 흔들거나 울렸다는 시(詩) 한 줄 거미줄처럼 뽑아

 

허공에 피를 묻힐 때도 그녀는 그렇게

 

달걀도 그렇게, 그냥 동그랗게

 

꿈속의 그녀가 꿈밖의 저를 부르듯 그렇게 부릅니다.

 

바람에 찢기거나 기름에 지글거리거나

 

제 울음을 부를 때는 그냥

 

엄마, 하고 부릅니다.

 

 

 

 

 

 

 

 

 

 

관음죽(觀音竹)

 

 

 

함께 살지 않고도 살을 섞을 수 있게 된다

 

이불 홑청처럼 그림자를 뜯어내면, 그러니까

내게 온 모든 그녀는 반 토막

주로 관상용이다

 

베란다에는 팔손이, 침실에는 형형색색의 호접난

 

그녀와 나는 도마 위의 생선처럼 서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손만 잡고

죽음을 꺼내볼 수 있게 된다

 

화분에 불을 주듯 그렇게 서로의 그림자로

피를 닦아주며 울 수 있게 된다

 

神과 싸우던 단 한 명의 인간이*

두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윤이형, 단편소설 「쿤의 여행」 중에서.

 

 

 

 

 

 

 


자선시


 

 

 

달의 귀

 

 

 

가끔씩 귀를 자르고 싶어, 내 몸을 돌던 피가

네모반듯하게 누울 수 있도록

 

그러면 우리 집 고양이는 온통 벽을 긁어놓겠지만 혀를 붓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나는 누군가의 뱃속에서 지워진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고 가만히 첫눈이 온다고 속삭이는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심장을 꺼내 뭇 남자의 무릎을 베기도 한다더군요

 

그러니까 나는 장난감 접시 같은 어머니 배꼽 위에 놓인

신발 한 짝이었음을 기억해냅니다

 

달의 귀를 잘라 마르지 않는 그녀의 우물은 누군가의 손목을 베개로 삼아야 들을 수 있는 노래, 아무리 울어도 나무가 될 수 없는 나는 축축한 밤의 옆구리에 의자를 갖다놓는 민달팽이

 

신발을 주우러 다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어쩌죠? 귀를 잘라버린 무덤은 허공에 입을 그려넣고

그녀는 밤새 눈사람을 만들지만 더 이상

무릎은 벨 수 없다더군요

 

어머니, 나뭇잎 좀 그만 떨어뜨리세요

 

뱃속에서 우는 아이의 심장을 가만히 꺼내

늙은 고양이를 만드는 그녀를 위해

밤은 가끔씩 종이가 됩니다

 

 

 

 

 

 

 

 

 

 

숨

 

 

 

내 안에 들어와 살 수 없는 당신은 자꾸

이상한 음악을 만들어오고

 

흑단나무도 바이올린도 될 수 없소 나는

당신의 선율이 아니라 전율

 

당신의 음악은 내 죽음 속까지 쳐들어와

밥 지어 먹고 잠을 자는 것인데

 

언제쯤일까? 죽기도 전에 썩은 내 몸을

내 발로 걸어나갈 수 있는 그날은,

 

꼭 아팠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당신이 만들어온 이상한

음악이나 들으며

 

 

 

 

 

 

 

 

 

 

 

사마귀

 

 

 

내 입술을 버리고 당신 입술을 가졌다

 

공중에 걸려 있던 모든 길을 먹어치웠다 교미 후 수컷의 머리를 씹는 암컷 사마귀처럼 그렇게 나는 당신에게 못다 한 사랑을 전해드리고자 했지만, 당신의 입술이 내 몸을 꿰매기 시작했다

 

태어나 좋은 꿈 한번 꾸지 못하고 간다 그러니까 나는 저만치 내 무덤 속에서 팔다리를 꺼내는 데 한평생이 걸렸다고, 당신의 부서진 어깨 위에 머리 하나 기우뚱 달처럼 얹어놓고 간다

 

혀를 뽑아낸 자리에 애기똥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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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등단.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 『별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의 법칙』이 있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 〈지리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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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자 시인, 김륭

 

 

 

그는 2007년 《문화일보》와 《강원일보》에 시와 동시가 동시에 당선이 되면서 늦깎이로 문단에 나왔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80년대 후반 지방의 한 문예지를 통해 이미 문단에 나온 중견 시인이었다. 소도시 김해에서 거주하며 밥벌이로 지방 신문사의 기자 생활을 오래한 그는 어떤 구체적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사직을 하고 어느 날부터 시 쓰는 일에 매진을 했다고 했다. 오래전에 등단은 했지만 청탁도 없고 찾아주는 이도 없는 가운데 자신의 글에 대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것이 신춘문예였고 그는 2007년 한 해에 시와 동시가 동시에 당선되면서 본의 아니게 중고 신인으로 다시금 세상 밖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그즈음, 어떤 누구의 연락으로 모이게 되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그해의 신춘문예 당선자 몇과 문예지로 등단한 나를 비롯한 몇이 신촌 언저리의 주점에서 자주 뭉치곤 했다. 필자도 서른둘이란 나이에 등단해서 데뷔가 빠른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중년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에게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무척 난감했다. 선생님, 선배님, 형님 등 몇 가지가 떠올랐지만 선뜻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나에게 그는 ‘형’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늙은 것도 서러운데 선생님은 꼰대 같아서 싫다며 호탕하게 웃던 그의 너스레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는 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가끔 툭툭 내뱉는 경상도 사투리는 묵직하면서 강단이 있었고 겸손했지만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자주 어울리며 작금의 시문단의 전망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가십적인 신변에 대한 토로를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어떤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그 상황에 대해 위트와 재치로써 우리를 다독거리곤 했다. 자의식 강한 풋내 나는 젊은 신인들에게 그의 무겁지 않은 다감함은 먼저 살아온 사람으로써의 여유가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두 해 정도 우리는 불규칙적이지만 회합을 가졌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각자의 동굴 속으로 다시금 자연스럽게 동면하게 되었다.

 

그는 그 시절, 젊은 우리들의 좌장이었다. 동인도 아니었고 모임의 흔한 이름도 없었지만 그는 모자를 쓰고 자주 출몰했고 진중하지만 무겁지 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그때의 친구들 소식을 문예지나 풍문으로 접하는 처지이지만 문단에 갓 나와서 세상물정 모르고 호기를 부렸던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모자를 생각한다. 트레이드마크처럼 늘 그의 몸과 함께 한 낡은 모자가 탈모를 감추기 위함인지, 머리통을 둘러싼 잡념을 표출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기표’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시인 김륭을 생각하면 그의 모자가 떠오른다. 술에 취해 함께 들어간 허름한 여관방에서도 그의 온전한 머리를 보지 못했기에 그에게 모자는 우주와 지상의 경계를 스스로 구분 지은 하나의 상처이자 뚜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김륭. 그의 모자는 일종의 구름. 그는 구름을 절대 벗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우리는 몇 가지 추측을 내놓았다. 하나) 구름을 벗으면 더 이상 우리는 구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둘) 구름을 벗겨야 구름의 실체를 정확히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셋) 아니다, 저것은 구름을 가장한 그냥 모자일지 모른다. 넷) 구름이든 모자이든 뭐가 중요한가? 어쨌든 떠 있는 것 아닌가?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궁륭 모양의 구름을 뒤집어쓰고 씨익, 웃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다.

―「연인들2―외자 가라사대」(《현대시》 2008. 9월호) 중에서

 

 

이 작품은 필자가 일곱 명의 외자 시인을 오마주 형식으로 발표한 작품 중에서 김륭 시인을 특화한 부분이다. 이 짧은 글에서는 그를 관조하는 우리(독자)가 있지만 이 안에는 또 다른 그의 세계관과 정체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네 가지의 가정 내지 유추는 어쩌면 그의 생각과는 달리 모두 빗나간 추측일지도 모른다. 그가 왜 늘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인지, 그 모자를 왜 절대 벗지 않는 것인지, 그 이유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가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자가 그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에서 그의 시는 출발할 뿐이다. 행위의 주체가 고정적이지 않으면서 언제든 대타자로서 온전하게 자리바꿈을 할 수 있는 그 여유로움과 낭만이 그의 세계관과 맞물리는 지점에서 김륭의 시는 융기하고 폭발한다. 그것이 표면적인 강한 자기장을 형성하지는 않지만, 잔잔하지만 끌림을 주고 있는, 그리하여 그가 ‘삶(죽음)’이라고 부르는 그 한쪽의 에너지 앞에서 우리는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륭 시가 지향하는 궁극은 발을 내딛어서 동적인 자세를 취할 때가 아닌 어떤 서사적 배경 안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우리를 보게 되는 순간 희미하고 고요하게 끄덕이게 한다. 이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그가 생성한 문학 안에서는 어떤 분명한 틀을 원하지 않는다. 그때, 생각한 것이 옳은 것이고 옳다고 생각한 것은 행동 이전의 머뭇거림 속에서 완벽하게 발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들어와 살 수 없는 당신은 자꾸

이상한 음악을 만들어오고

 

흑단나무도 바이올린도 될 수 없소 나는

당신의 선율이 아니라 전율

 

당신의 음악은 내 죽음 속까지 쳐들어와

밥 지어 먹고 잠을 자는 것인데

 

언제쯤일까? 죽기도 전에 썩은 내 몸을

내 발로 걸어나갈 수 있는 그날은,

 

꼭 아팠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당신이 만들어온 이상한

음악이나 들으며

-김륭,「숨」전문

 

 

시인 김륭은 이 작품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없는 하나’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분리와 소외를 통해 거부하지만 그것들로 발생한 모든 것들은 “이상한 음악”이라는 기표 아래서 스스로를 철저하게 방치함과 동시에 특별한 당위성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당신은 “내 안에 들어와 살 수 없”다. 이 정언의 내부에는 강력한 주체성이 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명의 시인으로서, 아버지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 모든 것들의 부조리하고 모순된 지점을 향한 확실한 주체적 외침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로소 정체 모를 음악은 “선율”에서 “전율”로 치환되고 전이된다. 즉, 사회 규범적이고 일반화된 패턴의 그 무엇에서 스스로에게 와 닿는 감각의 소통구로서 온전하게 받아들여지길 희망한다. 고로, 청각적인 감각의 지점에서 “선율”을 인식하고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시각·촉각·후각·미각을 통해 공감각적 추상체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더욱 크고 두텁게 진행된 구체적 감각의 기관들은 추상적인 육감의 감각을 통해 “죽음 속까지 쳐들어 오”게 된다. 그리하여 “꼭 아팠으면 좋겠다 오래오래”라는 구절을 통해 엄살이 아닌 타자를 통한 무한한 애정이 신실하게 육화되길 바란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시인은 “당신이 만들어온 이상한 / 음악이나 들으며”당신(타자)에 대한 기억을 애도하며 끊임없이 호명하기에 이른다. 당신은 내가 아님을, 당신은 결코 내가 될 수 없음을, 계속해서 피력하고 저항하지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숨”인 것이다. 어떤 구체적 정황이나 진술이 없음에도 이 작품은 “이상한 음악”을 통해 관계와 관계 간의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은 그 “이상한 음악”은 자연스럽게 들린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도식적인 제도의 틀을 거부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끝내 “흑단나무(재료)”도 “바이올린(완전체)”도 될 수 없다고 정언하고 있다. 구체적 진술 없이 짧은 행 속에서 주체적 신념을 가진 “당신”이 만져진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작품 속의 당신은 2인칭을 벗어난 화자 자신이며 우리의 다른 이름으로 오롯하게 발하고 있다. “이상한 음악”이 아닌 이상한 서재, 이상한 음식, 이상한 얼굴, 이상한 몸짓 등 그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대입해도 즐거운 읽기가 가능할 것이다.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와 당신의 우리의 “숨”에 대한 성찰이 아닐 수 없다.

 

 

 

피멍 든 얼굴에 달걀을 굴리듯 그렇게

 

어느덧 쉰, 그녀는 아직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냉장고 속 열 개의 달걀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늦은 아침 식탁 위에 올라가서는 무덤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개의 달걀이 닭을 부를 때도

 

그렇게 부릅니다. 쥐뿔도 없는 세상의 불알들이

 

저를 흔들거나 울렸다는 시(詩) 한 줄 거미줄처럼 뽑아

 

허공에 피를 묻힐 때도 그녀는 그렇게

 

달걀도 그렇게, 그냥 동그랗게

 

꿈속의 그녀가 꿈밖의 저를 부르듯 그렇게 부릅니다.

 

바람에 찢기거나 기름에 지글거리거나

 

제 울음을 부를 때는 그냥

 

엄마, 하고 부릅니다.

-김륭, 「울음이 부를 때는」전문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명쾌하게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성체와 알 사이의 관계가 신화적이든 과학적이든 이러한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이에는 연유할 수 없는 어떤 맹목적인 “울음”이 있을 뿐이다. 여기, 어떤 “엄마”라는 대상이 존재한다. 이 작품의 “엄마” 앞에는 그 어떤 수식도 들어가지 않고 있다. 잘 웃지 않는 엄마, 회초리를 든 엄마,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는 엄마, 수면제를 늘 먹는 엄마, 콩나물무침만 해주는 엄마, 거북손처럼 손마디가 갈라진 엄마, 운동회 때도 일만 하는 엄마 등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앞에는 그 어떤 수식도 불허한다. “엄마”는 그저 “엄마”로서 존재한다.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처럼 엄마는 엄마를 낳고 이 세상의 엄마는 그늘처럼 엄마를 거느릴 뿐이다. 그 사이에서 울음은 “바람에 찢기거나 기름에 지글거리거나” 할 뿐이다. 울음은 늘 달걀처럼 어떤 연약한 표피에 둥글게 갇혀 있다. 인위적으로 그 울음의 근원을 파헤칠 수도 있지만 그 “동그랗게” 갇혀 있는 맹목적 관계 앞에서 우리의 이성적 사고는 더 이상 앞서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엄마”는 “울음”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엄마”와 “울음”의 관계는 누가 먼저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엄마를 생각하면 울음이 나기도 하고 어떤 감당키 어려운 일로 울음이 나기에 엄마가 생각날 수도 있다. 엄마와 울음은 서로를 포용하고 포옹한다. 그것은 마치 태초에 하나의 몸이었던 것처럼 시공을 초월해 각각의 어떤 주머니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몇 해 전, 김륭 시인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부산에서 상을 치른다는 짧은 문자를 받고 반나절을 멍하니 창밖을 본 적이 있다. 밥벌이가 끊긴 상태여서 수중에 약간의 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대충 셈을 해보니 오갈 차비는 얼추 되었지만 조의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했다.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나는 고속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예상 못했다는 듯이 나를 매우 반갑게 맞았다. 상주인 그와 맞절을 하는데 나는 순간 몹시 놀랐다. 야구모자 대신 상주 두건을 둘러쓰고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륭처럼 높게 솟아오른 두건 안에는 울음이 차곡차곡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를 잃으면 “울음”도 사라지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언제라도 “엄마” 하고 부르면 “울음”의 곳간이 훤히 열리고 언제든 이 세상의 “엄마”는 동그랗게 우리를 안아줄 것이다.

 

김륭 시인은 근간에 동시 문단에서 더욱 활발하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기존의 감상 위주에서 철학적 고찰을 요하는 감각적인 동시를 많이 발표하고 있다. 즉, 그는 ‘착한 동시’가 아닌 ‘나쁜 동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시인으로서 그 “울음”의 근원을 찾고자 천착하고 있다. 좋은(?) 시가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읽히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봤을 때, 그는 동시인이 아니라 그냥 이 땅의 ‘시인’일 뿐이다. 모자 안에 감춰진 그의 도저한 상상력 그리고 그것을 담보할 수 있는 무한한 ‘울음보따리’는 아직도 흥건하게 흐르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말갛게 세수를 하고 싶어지면 그의 모자 속에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생각한다.

 

마무리하며, 그의 동시 중에 상상력이 무한 확장하면서 발랄함을 주는, 무겁고 딱딱한 것을 말랑말랑하게 희석시키면서 생기를 주는 한 편을 소개하면서 끝맺고자 한다.

 

 

 

아파트 단지로 쳐들어온 트럭에서 군인들이 통통 뛰어내렸어요.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경비 아저씨 허겁지겁 뒤를 쫓지만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용감한 군인들의 포로가 되었어요. 번쩍,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어요. 화단에 핀 해바라기와 나팔꽃도 파르르 겁에 질렸어요. 눈 깜빡할 새 아파트를 점령한 군인들이 807동 504호 우리 집까지 쳐들어왔어요. 투항하라, 투항하라, 너희들은 독 안에 든 쥐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던 엄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어요. 피─웅 피─웅 하늘에서 불화살 쏘아 대던 태양마저 백기를 들었어요. 수박이 왔어요! 달고 시원한 수박이 왔어요!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 생쥐처럼 숨어 있던 여름이 몽땅, 잡혀가요.

-「수박」 전문

 

글 · 김산(시인)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