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정철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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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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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은 개별적이군
장대비 오시는 날 우산 받쳐 들고
산장 막걸리집으로 행차
어라, 장대비는 즉흥광시곡이군
흔히 비가 미친 듯 쏟아진다고들 말하지만
비는 미친 게 아니지
비는 먹구름이 내려오는 사다리
빗방울 하나하나가 이렇게도 개별적이군
빗소리가 육자배기로군
그런데 주인장은 왜 두부를 누르다 말고
다른 천막으로 건너간다지
빗줄기에 휴대전화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
주인장의 입 모양을 보니 틀림없이 즐겁군
숨겨둔 애인과 통화라도 하는지
아내는 아는지 모르는지 배추를 다듬는군
휴대전화와 배추는 부부라는 이름에 새겨진 불가피한 상처
이게 다 각본 없는 즉흥극
살아 있는 것들의 살아 있음
연출자는 장대비 혹은
이해되기 전에 존재하는 것들
이럴 때 구름이 전수한 것은 하강의 기술
아궁이 가마솥은 훈김을 뿜으며
구름의 음악을 만들고
하나의 구름에서 이 많은 개별적 빗방울이라니
장대비는 오늘의 상투성을 전복하는 구원투수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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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54년 말띠 사내의 얼굴 살이 내리고 있다
며칠 안 본 사이 눈은 퀭하고 피부는 축 쳐져 있다
IMF 위기 때 환율 폭탄을 맞아 사업은 망하고
아파트를 급매로 내놓은 지 십여 년
요즘 강남에선 강북을 북한이라고 부른다고 분통을 터트리는 사내
재정부장관의 사진을 칼로 그어버리고 싶다는 사내
국가의 그늘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빤히 바라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제1열에서 죽을 둥 살 둥 앞만 보고 달려온 사내
윤기 자르르한 경주마에서 하루아침에 수레도 끌지 못하는 비루먹은 신세
밤마다 치가 떨려 아침이면 아구가 뻐근하다는 사내
가을은 가을이어서 막걸리집 앞 노랑은행잎이 아름답지 않냐고 했더니
썩은 오줌 냄새만 나는 헛것이라고 독기를 뿜어대는 사내
지난 대선 때 찍은 투표용지를 돈이라도 주고 되찾아오고 싶다며 울분을 삭히느라 살이 내리고 있다
뼈가 녹고 형체 없는 마음도 녹아내린다는 사내의 말에 티끌만큼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았다
며칠 전 찾아간 직업소개소에서 완도 어디쯤 가두리 양식장 잡부밖에 써줄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키가 한 뼘이나 줄어든 사내
은행나무 위로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지루하게 흘러가는 4분의 4박자 애국가를 바꿔서라도 이 슬픈 사내를 춤추게 할 곡조는 없는가
걸을 때마다 말굽 모양의 증오를 찍어대는 사내의 울분을 삭힐 노래는 없는가
이용악의 하늘은 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렀다는데
애초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어쩌고 하는 애국가의 첫 소절에서부터 무슨 전조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시비를 걸어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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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통화(通化)
통화에서 비를 맞는다
한 달 가뭄이라는 중국 동북 지방
버스 운전수는 단비에 젖는 차창 안 운전석에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전자게임
나는 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전쟁게임이고
내가 보고 있는 건 한국전쟁이라는 것을
북으로 간 큰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
피난 간 곳이 중국 땅 통화였다
평양에서 통화까지
절반은 소달구지를 타고 절반은 걸어서
큰아이는 이불 봇짐을 짊어졌을 것이다
나는 어깨에 떨어지는 빗줄기에게 묻는다
북한피난민수용소가 어디쯤 있었냐고
빗물은 떨어져 통강으로 흘러가건만
내 질문은 처마 아래에 구멍을 만들며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호텔 귀가 시간이 늦었다며
중국인 운전수가 눌러대는 경적 소리가 대포 소리 같다
포장도로는 까맣게 젖어들고
헤드라이트는 밤길을 밝히는데
나는 질문을 남겨두고 떠나온다
중국인 운전수의 죽은 아버지가
북한피난민수용소에서 경비를 섰을 것만 같다
통화 건너 북한 땅 고산진에도 가보았을 것이다
묻지 않으리라
귀신에게 물어 무슨 대답을 들으리
방금 어깨를 적신 빗줄기를 그 대답이라고 믿으며
나는 통강을 건넌다
통화와 고산진이 한눈에 들어오고
내 안의 어떤 전령을 과거로도 미래로도 보낼 수 있으나
그 전령을 회수해 그가 본 것을 전해들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감회에 젖어 공연히 부산을 떨 뿐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래도 바꾸고 싶다
그때만 해도 아직 남북 어디에 경계선이 그어질지
앞으로 생겨날 시체들이 어디에 묻힐지 아무도 몰랐다
퉁화의 소나기에선 죽음의 냄새가 난다
큰어머니와 그 식솔들의 퇴적물에서 기화한
먹구름이 통화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한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오늘은 나도 그림자가 없다
통화는 내 고토
숙소에 돌아와 뜬눈으로 밤을 샌 것은
어찌할 수 없이 어찌할 수 없이
내 백골이 비 오는 거리로 빠져나가 헤매고 다닌 까닭이다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백골엔 새살이 돋지 않고
무의식의 글자들만 발효되고 있었다
내 죄가 아니지만 내 죄인 것 같은 통화
어머니가 남녘에서 나를 해산하기 직전
삼신할미는 내 손에 압록강 너머 통화의 흙을 쥐게 했던 거다
탄생 직전의 손은 고무와 같아서 전생이라고 부르는 과거의 어느 시점까지 늘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이마를 짚으러 태어난 아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배가 고팠던 귀신들
와서 얼마든지 뜯어먹어라
이건 나의 말이고 삼신할미의 말이다
난 뼈도 약하고 살점도 없었다
귀신에게 나는 먹을 게 없는 아기였다
혹은 귀신이 깨물다 남은 상처투성이
나의 내력은 이러한 것이다
-자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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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리 농장을 견학하는 눈을 뜨고
지하철 문이 열리고 까만 파카를 입은 사내들이
희희낙락 쏟아져 들어올 때
하얀 오리털 하나가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천천히 떨어진다
내 영혼이 보이는 것처럼
개에게 쫓기던 오리 떼에게서 날아온 것처럼
어느 오리 농장에서 왔는지 태생조차 모르는
하얗게 희번덕거리다가 그만 맥을 놓아버리는 이 장면을
오래전 광주에서 본 적이 있다
무장 군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시민들을 마구 패던 그날도
오리털이 날렸다
지금은 예멘과 리비아와 북아프리카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TV 화면에서도
오리털은 날린다
세상은 거대한 오리 농장
몸집 불린 군인들은 활개를 치는데
나는 흔들리며 가면서 오리 농장을 견학하는 눈을 뜨고
세상 같은 건 안중에 없다는 듯
오리털 몇 개가 다시 날아오른다
오리털은 나의 영혼
위로받지 못하는 것들은 스스로 이렇게 날아오른다
내가 나를 멀리 날려 보낸다는 것
날아가면서 이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피를 묻힌다는 것
영혼이란 게 있다면
영혼은 사람의 눈에 띄는 걸 아주 싫어한다 해도
내 눈에는 오리털이 폭설처럼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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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카페에서 쓰는 편지
얼굴도 이름도 잊은 줄 알았는데
3천 걸음을 가서 떠오르네
그다음 걸음에서 잊힌다 해도
다시 3천 걸음을 가서 떠오르네
여기는 빨랫줄에 팬티 세 장이 내걸린 모퉁이집
까망 빨강은 한눈에도 젊은 내외 것
그 옆에 누렇게 변색된 것은 그 집 노파 것
빨랫줄을 보는 순간 당신도 거기 함께 걸려 있네
기억들이 얼다가 녹고 녹다가 어는
겨울의 땅이 내 안에 있는 게 분명하네
빨랫줄은 영원한 신파며 영원한 뽕짝
오래전 실종된 것들이 눈에 보이니
이 침침한 봄날이야말로 신기루인 것이지
당신 눈동자 속에서 나는 사막의 실종자
육탈된 갈비뼈와 해골 일부가 간신히 모래 위에 드러나 있을 때
당신이 나를 알아보는 기적이 3천 걸음이라네
언젠가 당신이 내걸 부고의 깃발을
어느 길모퉁이에서 먼저 만난 것이지
빨랫줄에 걸린 그것이 당신이라고 믿으며
혼절하지 않으려고 약국에 가서 강장제를 사 먹네
거스름돈을 받아 쥐며 죽은 왕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듯
내가 본 옷가지는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
소문이 내걸린 것이지
빨랫줄은 침묵의 다른 이름
침묵과 소문 사이에서 우리가 소멸을 믿듯
저 빨랫줄을 믿어야 하네
여기는 다시 3천 걸음 떨어진 국경 너머 제국카페
인조 안구를 박은 애꾸 사내가 취객들을 바라보며 모멸을 견디고 있는 곳
한때 청춘의 구두 끝에서 반짝이던 멜랑콜리는
이제 휘어지고 으깨어진 발가락 사이에 끼어 있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부치지 못할 편지를 품에 넣고
다시 3천 걸음의 첫발을 내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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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으로 가는 물통씨
단둥으로 간다
장춘에서 심양을 거쳐
사람을 찾아서, 백석이라는 시인
9월 햇살에 들판은 깜박 졸고 나는
침대기차 선반 위 물통에게 말을 건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물통
입이 살짝 튀어나왔지만 과묵하게 생긴 물통
외로울 때마다 물 따르던 기억을 떠올릴 것만 같은 물통
네가 차라리 백석이다
기차가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차창 밖 풍경만 바뀌고 있다
흔들리는 자작나무, 자전거 행렬이 멈춰 선 건널목, 시간을 삼켜버린 터널, 아직 털이 길지 않은 양 떼들, 침묵 속의 무연탄 더미, 그리고 공사 중인 교각……
아직 무엇인가를 잇지 못한 교각처럼
기차에 실려 가는 내가 차마 닿지 못할 바깥 풍경이 없다면
기차도 맥박이 뛰지 않을 것이다
풍경에는 언제나 음악의 잔향이 있다
고난에 순응하리라는 음악 같은
너 자신을 용서하라는 대지의 전언 같은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닿을 수 없음으로 인해
나는 여전히 물통씨를 찾아가는지도 모른다
물통씨는 어떤 비유의 흔적도 남겨놓지 않았기에
단둥에 접근할수록 내 가슴은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고
언제나 배가 고프다
물통씨가 열거한 그 많은 먹거리 덕분에
번역될 수 없는 우리말 고유명사 덕분에
나는 대양푼에 그 많은 음식들을 싸잡아넣고 쓱쓱 비비고 싶다
그 음식들은 영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둥으로 간다
압록강변의 조약돌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러
국경에 서면 끊어진 철교가 있을 테지만
그것은 차라리 끊어진 언어
언어가 반으로 잘린 혀처럼 피를 쏟고 있다
지금 내 곁에는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는 수많은 물통들이 있다
국가라는 수수께끼와 숨바꼭질하는 사람들
여권을 지니고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는 나도 그중 한 사람
단둥에 가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기에
단둥은 어디에나 있다
차장이 침대보를 갈아주러 왔을 때
오래된 먼지들이 들썩거리자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물통씨는
까만 머리카락 속에 숨겨진 러시아어 철자를 떨구며 말한다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기차가 동북삼성(東北三省)을 한 백 년 돌아다니는 동안
잠만 잤노라고
잠 속에서도 기적은 울어
가끔 실눈을 뜨고 흘러간 세기를 바라보았노라고
단둥으로 가는 물통씨,
너는 선반 위에 붙박인 채 외롭거나 말거나
낙엽이 쌓이거나 말거나 기차가 미끄러지거나 말거나
문자의 왕국이 스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정철훈 | 199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개 같은 신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장편소설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모든 복은 소년에게』,
산문집 『소련은 살아 있다』 『김알렉산드라 평전』 『옐찐과 21세기 러시아』 등이 있음.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장자(長子)
시간이 앞으로만 진행하는 한, 우리는 모두 지나갈 뿐입니다.
단 한 번 살기에 세상이, 혹은 시간이 볼 수 있게 피를 묻히는 것이겠죠.
나는 이것을 언어의 피, 시의 피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뭔가 들이닥친 걸까요.
지나간다, 는 말에 문제 있습니까.
-「시인의 말」(『빛나는 단도』, 문학동네, 2014.) 중에서
이산, 유산, 유랑
요사이 ‘금 수저 흙 수저’ 논란이 뜨겁다. ‘금 수저’는 부자 아버지 얘기이고 ‘흙 수저’는 가난한 아버지 얘기이다. 그러나 조금만 거슬러 오르면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흙 수저’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후대의 욕망과 좌절에 관여하는 집단 명사로 쉽게 상징화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글머리에 인용한 「시인의 말」에 답하려면 그의 가족사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철훈은 이산가족 2세대이다. 얼마 전에 작고한 그의 아버지 정근 선생은 「둥글게 둥글게」, 「구름」,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등 우리에게 친근한 동요를 작곡한 아동 문학가이다. 선생은 4남 1녀의 형제들 중 막내인데, 위로 세 명의 형들이 해방 후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모두 월북(입북)했다. 그들은 각각 영화인, 작곡가, 언어학자로서 지식인층이었다. 셋째 형은 육이오 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한다. 둘째 형은 북에서 다시 소련으로 망명했고, 2013년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생을 마친다. 정철훈의 시와 소설에 등장하는 ‘큰아버지’는 주로 이 분을 모델로 삼은 듯하다. 북한에서 최초의 천연색 영화 「사도성의 이야기」를 감독한 맏형은 1970년대 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이오 동란을 거치면서 ‘빨갱이 집안’이라는 낙인과 함께 연좌제로 인해 정철훈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모진 고초를 겪었다.
“아버지, 더욱 험상궂게 미간을 찌푸리세요/ 양 미간에 움푹 파인 골짜기에는 무엇이 있나요/ 월북한 형제가 있나요/ 죽은 어머니가 있나요/ 연좌제와 국가보안법과 억울한 옥살이가 있나요/ 아버지, 지금도 고춧가루 물고문 받던 감옥이 보이나요”
-「눈 내리는 아침」 부분 (『살고 싶은 아침』, 창비, 2000.)
가족사의 비극을 인지한 정철훈의 내면에는 ‘큰아버지’로 대변되는 이산혈연에 대한 애증이 수없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가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 이유도 이런 곡절과 결코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의 ‘큰아버지 찾기(혹은 지우기)’는 문학적 출발점이면서 그가 그토록 북방을 떠돌았던 정신적 동인이 된다. 그는 이산의 관망자가 아닌 능동적 계승자의 입장에서 이산을 온몸으로 육화하는 데 문학적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는 시와 소설을 통해 ‘큰아버지’라는 빅 모티브를 초자아적으로 동일시하고 변주하면서 마침내 대륙으로 흩어진 ‘우리 모두의 큰아버지’로 올려놓는다. 그의 이러한 매진은 부지불식간에 북방 향수를 불러오는데 홍용희 평론가는 그의 유랑적 기질을 “내국 디아스포라”로 명명하면서 “정철훈의 시세계에서 북방의식이 재생되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의 지층에 묻힌 대륙적 공간을 소생시키는 의미를 지닌다.”(『페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해설 중에서)고 짚고 있다. 우리가 ‘남행열차’에만 매달리는 사이 그는 ‘북행열차’에 몸을 싣고 정처 없는 유랑에 들곤 했던 것이다. 시에서 그의 내적 자아는 늘 흐느끼고 있다.
내 흐느낌을 내가 빤히 지켜본다는 거
간밤에 내 안에 내가 흐느끼고 있었다
흐느낌의 가치는 정화라고 배웠다
책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그러니까 나 자신의 하루하루가 착착 펼쳐지는 흐느낌의 책 그 자체였다
―「흐느낌의 은어(隱語)」 부분(『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창비, 2010.)
“흐느낌”은 내면의 슬픔이 유동하는 소리이며 정철훈 시의 밑바닥을 흐르는 기저음(基底音)과도 같다. 그 흐느낌의 무의식 속에 분단과 이산과 광주와 모스크바와 실패한 혁명과 현실의 비감이 혼재한다. 그의 시는 수사적 미학을 추구하는 일반 시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데 이는 역사적 통시성에 입각한 자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무겁고 깊은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그의 이번 시편들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된다. 유랑자의 피로와 환멸, 자괴감 등이 내재되어 있으면서 방외자의 비감 어린 시선으로 모든 것이 무화되는 지점을 관조하고 있다. 어쩌면 ‘후일시(後日詩)’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그의 시는 두 개의 시각이 공존한다. 그 하나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에서 밖을 응시하는 것이다. 밖은 역사적 자아가 유랑하는 북방대륙이고 안은 현실적 자아가 거처하는 분단조국이다. 정철훈은 이 두 공간을 번갈아 가면서 마치 바느질의 박음질처럼 앞과 뒤를 한 땀 한 땀 되짚어 꿰매가는 시적 전략을 견지하고 있다. 병마와도 같은 역사적 자의식이 그를 에워싸고 있어서 안에서나 밖에서나 일인칭 서술자의 입장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빗방울은 개별적이군」, 「모독」, 「나는 오리 농장을 견학하는 눈을 뜨고」 등은 전자에 해당하는 시들이고 「비내리는 통화(通化)」, 「제국카페에서 쓰는 편지」, 「단둥으로 가는 물통 씨」 등은 후자에 해당하는 시들이다.
빗방울, 모독, 오리털
장대비 오시는 날 우산 받쳐 들고
산장 막걸리집으로 행차
어라, 장대비는 즉흥광시곡이군
흔히 비가 미친 듯 쏟아진다고들 말하지만
비는 미친 게 아니지
비는 먹구름이 내려오는 사다리
빗방울 하나하나가 이렇게도 개별적이군
빗소리가 육자배기로군
그런데 주인장은 왜 두부를 누르다 말고
다른 천막으로 건너간다지
빗줄기에 휴대전화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
주인장의 입 모양을 보니 틀림없이 즐겁군
숨겨둔 애인과 통화라도 하는지
아내는 아는지 모르는지 배추를 다듬는군
휴대전화와 배추는 부부라는 이름에 새겨진 불가피한 상처
이게 다 각본 없는 즉흥극
살아 있는 것들의 살아 있음
연출자는 장대비 혹은
이해되기 전에 존재하는 것들
이럴 때 구름이 전수한 것은 하강의 기술
아궁이 가마솥은 훈김을 뿜으며
구름의 음악을 만들고
하나의 구름에서 이 많은 개별적 빗방울이라니
장대비는 오늘의 상투성을 전복하는 구원투수로군
―「빗방울은 개별적이군」 전문
다소 자조적인 화법으로 쓰인 이 시는 정철훈이 도달한 현재의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장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장대비를 골똘히 지켜보던 시인은 문득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이 “각본 없는 즉흥극”이라는 깨달음에 닿는다. 시인은 억눌린 자아를 방기하면서 탈 역사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시인의 머릿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필연의 역사가 자연의 장대비(소리)에 씻기면서 찬탄의 순간을 맞는다. 자연은 우연과 필연을 함께 품은 절대경지(境地)로서 “이해되기 전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의 어머니이다. “개별적 빗방울”은 자연의 어머니로부터 우연과 필연을 내려 받아 각각의 모습을 띠고 탄생한다. 이 시에 나오는 “주인장”과 “아내”도 “개별적 빗방울”과 다르지 않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역사(필연)라는 무거운 옷을 벗어던진 순수한 알몸이다. 시인은 이 무심한 알몸(우연)들이 만들어내는 ‘대동(大同)의 장대비’를 영접한다. “빗방울”과 “장대비”는 그저 무심한 자연(우연)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어떤 주체가 그것을 의식하고 느낄 때(선택과 생각이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필연적인 양상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러면서 ‘개별적인 빗방울이 모여서 장대비를 이룬다’는 식의 주관적이고 상투적인 알레고리를 형성하게 되는데 시인은 그러한 자신의 습관적인 암시에 넌지시 환멸을 보내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와 같은 무심을 촉구한다. 자연은 계획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을 자신에게 깨우쳐 준다. 시인의 생각에서 놓여난 자유롭고 천진한 빗방울들이 만들어 내는 “장대비”는 “즉흥광시곡”처럼 장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어쩌면 “장대비”는 통과제의 같은 통곡일 수도 있겠다. 시인은 무심으로 재탄생한 “장대비”에 무한한 지지를 보내며 부진한 세상을 향해 강속구를 뿌리는 “구원투수”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풍경은 시인의 내면에 각인된 무겁고 어두운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정철훈은 이 시를 통해 앞서 말한 음울한 역사의 ‘흐느낌(기저음)’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내심을 보인다.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역사의 마운드에서 그만 내려오고 싶은 것이다. 시인은 이제 자신을 청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이고 여전히 그의 정신은 역사의 계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접하는 현실은 역사가 밀어올린 결과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54년 말띠 사내의 얼굴 살이 내리고 있다
며칠 안 보는 사이 눈은 퀭하고 피부는 축 쳐져 있다.
IMF 위기 때 환율 폭탄을 맞아 사업은 망하고
아파트를 급매로 내 놓은 지 십년
요즘 강남에선 강북을 북한이라고 부른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내
재정부 장관의 사진을 칼로 그어버리고 싶다는 사내
국가의 그늘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빤히 바라보고 있다
(중략)
지루하게 흘러가는 4분의 4박자 애국가를 바꿔서라도 이 슬픈 사내를 춤추게 할 곡조는 없는가 걸을 때마다 말굽 모양의 증오를 찍어대는 사내의 울분을 삭힐 노래는 없는가
이용악의 하늘은 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렀다는데
애초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어쩌고 하는 애국가의 첫 소절에서부터 무슨 전조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시비를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모독」 부분
이 위기의 사내를 어찌할 것인가. 시 속의 “사내”는 여러모로 실패한 우리 시대의 가장이며, 척박한 아버지의 역사를 물려받은 이 땅의 모든 형들이라고 할만하다. “베이붐 세대의 제1열에서 죽을 둥 살 둥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기력을 소진하여 “하루아침에 수레도 끌지 못하는” 처지가 된 “사내”는 효용과 효율만을 섬기는 자본주의시장판(국가)에서 곧 용도 폐기될 운명에 처해 있다. 시인은 괴롭게 사내의 이력을 나열하면서 결과적으로 사내를 그렇게 만든 현실역사에 대한 적대감을 매우 직정(直情)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사내”는 범 세대적인 전형성을 띠는데 시인 자신과 자연스럽게 동일시된다. 시인은 사내에게서 “국가의 그늘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애국가를 바꿔서라도 이 슬픈 사내를 춤추게 할 곡조는 없는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안타까운 심경에 휩싸인다. 너무 빤한 애국가 가사를 반복하여 오늘의 환멸을 반어적으로 증폭시킨다. 사내를 통해 얻어진 분노는 현실부정을 넘어 국가부정의 정신으로 나아간다. 분단과 진영이 없는 대륙 공간, 거기에는 여전히 시인 이용악이 추구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그곳은 따뜻한 인정이 살아 숨 쉬는 이상향이자 소년 정철훈이 뛰어노는 원형공간이다. 그의 시가 북방대륙을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까만 파카를 입은 사내들이
희희낙락 쏟아져 들어올 때
하얀 오리털 하나가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천천히 떨어진다
내 영혼이 보이는 것처럼
개에게서 쫓기던 오리 떼에게서 날아온 것처럼
어느 오리 농장에서 왔는지 태생조차 모르는
하얗게 희번덕거리다가 그만 맥을 놓아버리는 이 장면을
오래 전 광주에서 본 적이 있다
무장 군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시민들을 마구 패던 그날도
오리털이 날렸다
지금은 예멘과 리비아와 북아프리카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TV 화면에서도
오리털은 날린다
세상은 거대하 오리 농장
몸집 불린 군인들은 활개를 치는데
나는 흔들리면서 가면서 오리 공장을 견학하는 눈을 뜨고
세상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리털 몇 개가 다시 날아오른다
오리털은 나의 영혼
위로받지 못하는 것들은 스스로 이렇게 날아오른다
내가 나를 멀리 날려 보낸다는 것
날아가면서 이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피를 묻힌다는 것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영혼은 사람의 눈에 띄는 걸 아주 싫어한다 해도
내 눈에는 오리털이 폭설처럼 날리고 있다
―「나는 오리 고장을 견학하는 눈을 뜨고」 전문
“오리털”을 매개로 ‘80년 광주’를 조심스럽게 호명하고 있는 이 시는 우연하고 사소한 방식의 연상을 통해 ‘오리털 -> 오리 떼 -> 오리농장 -> 다시 오리털’로 이어지는 관조적 정서를 담담하게 개진하고 있다. 그에게 광주나 제 3세계의 비참은 여전히 청산된 과거가 아니다. 제목에서처럼 이 시의 키워드는 “오리 농장을 견학하는 눈”일 것이다. 눈은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로서 바깥의 대상을 규명하고 안쪽의 자아를 타자화 시킨다. 이른바 ‘지식인의 눈’을 가진다는 말인데, 탈 경험적이며 해석적인 ‘지식인의 눈’은 다양한 운명을 가진 개별자들을 하나의 집단 속에 넣고 이해하거나 편년사적 범주 안에 가두어버린다. 이때 개인의 아픔이나 상처 등은 쉽게 무시되고 잊힌다. 정철훈은 바로 이런 자신의 ‘눈’에 대해 슬쩍 일침을 가하고 있는 듯하다. 현장에 가서 보고 배운다는 의미의 “견학”이라는 단어 역시 반어적인 비애를 돋우고 있다. 이 시에서 ‘눈’을 뜨는 순간은 미몽의 졸음 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말하는 듯하다. 시인은 비몽사몽간에 오리 농장과 활개 치는 군인들의 모습을 오버랩하면서 ‘전철 속 = 오리 농장 = 세상’이라는 비유적인 관념을 전개하다가 잠에서 깬다. 현실로 돌아온 시인의 개별 자아는 여전히 그때의 상처에 시달린다. 시인의 내면에 분단과 광주는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오리 농장을 견학하는 눈”을 거두고 다시 “오리털”에 ‘눈’을 집중한다. “오리털”은 시인의 “영혼”인 동시에 “위로 받지 못하고” 떠도는 희생자들의 원혼이다. 시인 자신도 그들의 한 사람으로서 “오리털”이 되어 기꺼이 떠돌기를 자처한다. “오리털이 폭설처럼 날리는” 환상은 그의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정철훈은 이 시를 통해 역사의 당사자와 관조자의 입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보여준다. 사소함을 이루는 개별 영혼들을 향한 무한한 연민은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통화(通化), 제국카페, 단둥
앞서 짚은 바대로, 내국 디아스포라와 함께 그는 북방대륙을 유랑하는 역사적 자아를 통해 시적 정서의 또 다른 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가 누비고 다니는 대륙은 이산의 본토이고 그들의 힘겨운 삶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이다. 그는 통화로, 단둥으로, 제국카페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이동하면서 역사적 서사를 현재화한다. 그는 과거가 소멸되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히스테리를 보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순적 태도를 취한다. ‘나’의 역사이므로 지워도 ‘내’가 지워야 속이 풀리는 매력적인 고집쟁이의 모습이다.
큰어머니와 그 식솔들의 퇴적물에서 기화한
먹구름이 통화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한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오늘은 나도 그림자가 없다
통화는 내 고토
숙소에 돌아와 뜬눈으로 밤을 샌 것은
어찌할 수 없이 어찌할 수 없이
내 백골이 비 오는 거리로 빠져나가 헤매고 다닌 까닭이다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백골엔 새살이 돋지 않고
무의식의 글자들만 발효되고 있었다
내 죄가 아니지만 내 죄인 것 같은 통화
어머니가 남녘에서 나를 해산하기 직전
삼신할미는 내 손에 압록강 너머 통화의 흙을 쥐게 했던 거다
탄생 직전의 손은 고무와 같아서 전생이라고 부르는 과거의 어느 시점까지 늘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이마를 짚으러 태어난 아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배가 고팠던 귀신들
와서 얼마든지 뜯어먹어라
이건 나의 말이고 삼신할미의 말이다
난 뼈도 약하고 살점도 없었다
귀신에게 나는 먹을 게 없는 아기였다
혹은 귀신이 깨물다 남은 상처투성이
나의 내력은 이러한 것이다
―「비내리는 통화(通化)」 부분
“통화(通化)”는 지명인데 한자의 뜻이 품고 있는 의미 때문에 ‘이산’과 ‘불통(不通)’을 강화하는 역설적인 중의(重意)로 읽힌다. 통화는 시인의 이산가족(“큰어머니”)이 살았던 곳인 듯하다. “먹구름이 통화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한/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오늘은 나도 그림자가 없다”는 구절은 김수영의 시 「하… 그림자가 없다」를 떠올리게 한다. 김수영이 시에서 말한 ‘민주주의의 전선’처럼 어쩌면 역사라는 ‘전선’도 ‘지도 책 속에는 없는’ 허상일지 모른다. 시인은 그림자 없는 허상에 매달리는 자신의 처지를 냉소적으로 비관하고 있다. 또한 “내 백골이 비오는 거리로 빠져나가 헤매고 다닌 까닭이다”는 구절을 읽으면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시 「또 다른 고향」에 나오는 그 “백골”이 느껴진다. 시인은 자신을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이마를 짚으러 태어난 아이”로 규정하고 “얼마든지 뜯어먹어라”는 유아피학의 심리상태를 보인다. 지금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든 혈연들에게 보내는 원망이기도 하다. 그의 이산혈연에 대한 집착은 점점 숙명성을 띠면서 역사적 짐 지기를 자처한 자의 고뇌로 드러난다. “귀신이 깨물다 남은 상처투성이”의 “내력”을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시인의 절망감이 지독한 자기혐오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리 떠돌아도 ‘장대비’ 같은 신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제국카페”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만 끝내 부치지 못한다.
얼굴도 이름도 잊은 줄 알았는데
3천 걸음을 가서 떠오르네
그다음 걸음에서 잊힌다 해도
다시 3천 걸음을 가서 떠오르네
여기는 빨랫줄에 팬티 세 장이 내걸린 모퉁이집
까망 빨강은 한눈에도 젊은 내외 것
그 옆에 누렇게 변색된 것은 그 집 노파 것
빨랫줄을 보는 순간 당신도 거기 함께 걸려 있네
기억들이 얼다가 녹고 녹다가 어는
겨울의 땅이 내 안에 있는 게 분명하네
빨랫줄은 영원한 신파며 영원한 뽕짝
오래전 실종된 것들이 눈에 보이니
이 침침한 봄날이야말로 신기루인 것이지
당신 눈동자 속에서 나는 사막의 실종자
육탈된 갈비뼈와 해골 일부가 간신히 모래 위에 드러나 있을 때
당신이 나를 알아보는 기적이 3천 걸음이라네
언젠가 당신이 내걸 부고의 깃발을
어느 길모퉁이에서 먼저 만난 것이지
빨랫줄에 걸린 그것이 당신이라고 믿으며
혼절하지 않으려고 약국에 가서 강장제를 사 먹네
거스름돈을 받아 쥐며 죽은 왕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듯
내가 본 옷가지는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
소문이 내걸린 것이지
빨랫줄은 침묵의 다른 이름
침묵과 소문 사이에서 우리가 소멸을 믿듯
저 빨랫줄을 믿어야 하네
여기는 다시 3천 걸음 떨어진 국경 너머 제국카페
인조 안구를 박은 애꾸 사내가 취객들을 바라보며 모멸을 견디고 있는 곳
한때 청춘의 구두 끝에서 반짝이던 멜랑콜리는
이제 휘어지고 으깨어진 발가락 사이에 끼어 있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부치지 못할 편지를 품에 넣고
다시 3천 걸음의 첫발을 내딛네
―「제국카페에서 쓰는 편지」 전문
이 시는 회한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회한은 끝내 회포를 풀지 못한 미망의 마음상태이다. 반복되는 “3천 걸음”은 만날 수 없는 먼 거리, 갈 수 없는 먼 곳일 테다. “당신”은 “겨울의 땅”에서 이산을 주재하는 대(大) 인칭이다. 마치 상호텍스트처럼, 시인은 “당신”과 “나”를 “3천 걸음”의 아득한 보폭으로 번갈아 부르며 이산의 그리움을 호소한다. “당신”은 시인의 머릿속에 너무도 깊이 각인되어 “신기루”처럼 언제 어느 곳이든 불쑥불쑥 떠오르며 맴돌기를 멈추지 않는다. 시인의 자아는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미망의 형벌에 시달린다. “빨래줄에 팬티 세 장이 내걸린 모퉁이집”에서 출발한 시인의 상념은 “혼절하지 않으려고 약국에 가서 강장제를 사 먹”을 정도로 심각한 병마의 상태에 빠져든다. 마음으로 수없이 “3천 걸음”을 걸었지만 현실적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상봉의 열망이 강할수록 그것을 피하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심사가 작용하고 있다. 만남은 현실이고 그리움은 관념이다. 시인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은 영원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제국카페”를 나온 시인은 “부치지 못할 편지를 품에 넣고/다시 3천 걸음의 첫발을 내딛”는다. 그가 이처럼 아무 보람 없는 수고에 매달리는 것은 주술적인 제의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자기암시 말이다.
「단둥으로 가는 물통 씨」도 위의 시편들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 특히, “언제나 배가 고프다/ 물통 시가 열거한 그 많은 먹거리 덕분에// 나는 대양푼에 그 많은 음식들을 싸잡아 넣고 쓱쓱 비비고 싶다/ 그 음식들은 영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구절은 맨 앞의 시 「빗방울은 개별적이군」에 등장하는 ”개별적 빗방울“, “장대비”와 합일된 시적지향점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고 싶다. 다채로운 “먹거리”의 “고유명사”들을 한통속으로 비벼서 먹는 행위는 과잉된 정신(말)으로 피폐해진 몸을 보살피는 일이고 구체적인 삶을 북돋는 처방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시인은 ‘장대비’와 ‘비빔밥’으로 어우러지는 대동 세상을 꿈꾼다. “언제나 배가 고”파야 건강한 시를 쓸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이산 그리고....
정철훈의 시적 화두는 단연 이산이다. 남북이산뿐만 아니라 산업화로 흩어진 남남이산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의 시는 이 땅의 모든 상실에 바치는 헌사이다. 이산은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의 역사다. 따라서 그의 시의 모든 들숨과 날숨은 철저하게 역사적 관점으로 발산, 수렴된다. 우연과 필연은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선택에 따라 판가름되어질 뿐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현실정치에게 엄중한 책임성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선택의 위험성 때문이다. 역사의 결과는 필연이되 그 원인은 우연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개별적인 빗방울’의 모습으로 무수히 태어나고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빗방울은 필연의 몸짓으로 내 얼굴에 떨어진다. 이것은 사랑의 방식과도 닮았다.
정철훈의 시적 세계관과 시론이 물씬 담긴 시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만주에서 개장수, 블라지보스똑에서 항만 노동자였던 강자들
그때는 우리의 시대라고 부르던 시대다
나의 시대는 우리의 시대와 다르다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미몽의 시대에 살고
우리는 이미 좌절된 무력함의 시대다
나는 우리가 못다 이룬 꿈의 변형에 대해 쓴다
귀신과 허공과 우연을 믿었던 청년
나의 청년은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내 안에 깃들어 있다
나의 시대는 나 하나를 구원하기에도 모자란다
나는 변해 왔고 아직도 변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시대」 부분(『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창비, 2010.)
글 · 정병근 | 1962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 2001년 『현대시학』에 「옻나무」 외 9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등이 있다.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