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문효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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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인] 문효치
신작시: 雨期 · 1 / 雨期 · 2 / 雨期 · 3
자선시: 벌레 / 광대
[시인론] 유성호 “잃어버린 꿈과 하소연을 넘어 생을 충실하게 견뎌가는 마음”
신작시
雨期 · 1
물이 모여서 간다
와글와글 우글우글
하늘에 오르려다
떨어진 물들
아래로 아래로만
엎드려 흐르던 것이
사다리도 없는 허공을
몸부림으로 오르려다가
떨어진 것들
꿈은 승천이었나
이루지 못한 꿈이 꿈틀거리며
흘러가고 있다
雨期 · 2
비가 우는 것을 보았는가
저 많은 별과 헤어지고
붉은 노을의 담을 넘어오면서
얼마나 애타는 이별을 했을까
거기 멍하니 있는 풀꽃과
푸른 입술에서 풍겨 나오는 음률을 배경으로
그려 놓은 얼굴을 만지다가
마구 풀어헤쳐 버리는 통곡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젊은 너구리처럼
가뭇없이 달아나버리는 하루가
참 지랄 같기만 한데
맹물이지만 맹물 같지 않은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 보았는가
雨期 · 3
빗줄기는 하늘의 총알
나를 향해 집중사격이다
언제부터 나는
누구의 총알받이가 되었나
내 뒤에
누가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나를 앞세워 밀어붙이고 있다
이번 생은
어쩔 수 없다
그냥 속절없이 구멍 뚫리며 피 흘리며
견뎌내야 한다
자선시
벌레
저 생명 속의
빛나는 사고(思考)
풀잎 위에 써 놓은 철학을
어두운 눈 비비며
겨우 읽어 보는데
한 줄 읽다 막히고
두 줄 읽다 멈추고
난해한 시
너무 길구나
광대
달빛 중에서도
산이나 들에 내리지 않고
빨랫줄에 내린 것은 광대다
줄이 능청거릴 때마다 몸이 휘청거리며
달에서 가지고 온 미친 기운으로 번쩍이며
보는 이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달빛이라도
어떤 것은 오동잎에 내려 멋을 부리고
어떤 것은 기와지붕에 내려 편안하다
또 어떤 것은 바다에 내려 이내 부서져 버리기도 한다
내가 달빛이라면
나는 어디에 내려 무엇을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사는 일에 아슬아슬한 대목이 많았고
식구들은 가슴 졸이게 한 걸로 보면
나는 줄을 타는 광대임에 틀림없다
문효치 ■
1966년 《한국일보》 ·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계백의 칼』 『어이할까』 『헤이, 막걸리』 등이 있음.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석정시문학상〉 등 수상.
시인론 / 유성호
잃어버린 꿈과 하소연을 넘어 생을 충실하게 견뎌가는 마음
— 문효치의 신작들
단단한 고요함을 통해 듣게 되는 선명한 음성
문효치의 근작은 비교적 뚜렷하고 일관된 자의식에 의해 구심적 시형과 주제를 갖추어가고 있다. 시인은 가파른 속도나 외연적 활력 혹은 수직 상승 같은 세상의 주류적 표상보다는, 천천히 사라져가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겨가는 존재자들을 수평적으로 호명하고 재현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럼으로써 크고 단단한 것들이 구축해온 세계의 질서에 항의하면서, 작고 부드러운 것들이 새로이 구성해가는 세계의 역리(逆理)를 탐구하고 호소한다. 이러한 방법은 꽃이나 풀 같은 가녀린 생명체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려는 명명 욕망을 수반하곤 한다. 그렇게 문효치 시인은 근원적 의미에서 낮은 곳을 향하는 사유와 감각을 지속적으로 구현해간다. 굳건하게 시력(詩歷) 60년을 쌓아오면서 시인은 근원적 세계를 탐색하고 사유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시사적 위상을 더욱 견고하게 펼쳐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문효치 시인이 작고 가녀린 것을 통해 사라져가는 사물의 이름과 목숨을 상상적으로 복원하려는 기획을 보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생태적 사유의 한켠을 드러내는 것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주의 원형을 복원하는 일이자 이제는 소멸되어 버린 원초적 세계를 탈환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결국 그의 시는 주류 담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취하면서 외곽과 주변을 성찰하는 목소리를 담아가는 최전선에 우뚝 서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솔길을 걸을 때 말소리가 훨씬 크게 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문효치 시의 단단한 고요함을 통해 더욱 선명한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음성을 듣게 된다. 이는 그가 택하는 대상과 작법이 소음으로부터 비켜선 채 단단한 침묵을 배후에 거느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기’ 연작을 통해 탐구하는 생의 이면
이번에 발표되는 문효치 신작 세 편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우기(雨期)’ 연작이다. 소리를 내서 읽어보니 문면에 흐르는 리듬이 거장의 호흡 안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우기’의 반대는 ‘건기(乾期)’이니 각각 시편들은 메마른 건기를 지나 비가 가지는 생생한 소리를 안으로 품고 있는 듯이 들린다. 문효치 시인은 건기를 지나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들었을까.
물이 모여서 간다
와글와글 우글우글
하늘에 오르려다
떨어진 물들
아래로 아래로만
엎드려 흐르던 것이
사다리도 없는 허공을
몸부림으로 오르려다가
떨어진 것들
꿈은 승천이었나
이루지 못한 꿈이 꿈틀거리며
흘러가고 있다
― 「雨期 · 1」 전문
우기를 맞아 세상의 물은 서로 모여 “와글와글 우글우글”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시끄러운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비 스스로의 존재증명이기도 할 것이다. 원래 ‘물’은 지상을 향해 흐르는 하강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하늘에 오르려다/떨어진” 물과 “아래로 아래로만/엎드려 흐르던” 물 그리고 “사다리도 없는 허공을/몸부림으로 오르려다가/떨어진” 물이 속절없이 아래로 흘러가고 있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에 특별한 감회가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문효치 시인은 그렇게 흘러가는 물을 통해 수직 상승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래로만 흘러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처연하게 바라보고 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지만, 아래로 흐르는 물의 순리 속에서 꿈의 좌절을 바라보는 ‘雨期’의 시인이 선명하게 부조(浮彫)되고 있다. 다음은 어떠한가.
비가 우는 것을 보았는가
저 많은 별과 헤어지고
붉은 노을의 담을 넘어오면서
얼마나 애타는 이별을 했을까
거기 멍하니 있는 풀꽃과
푸른 입술에서 풍겨나오는 음률을 배경으로
그려 놓은 얼굴을 만지다가
마구 풀어헤쳐 버리는 통곡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젊은 너구리처럼
가뭇없이 달아나버리는 하루가
참 지랄 같기만 한데
맹물이지만 맹물 같지 않은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 보았는가
― 「雨期 · 2」 전문
우리는 과연 “비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있을까? 시인은 저 빗줄기가 수많은 별들과 헤어지고 노을의 담을 넘어오면서 애타는 이별을 수없이 했을 것이라고 읽는다. 그러니 비는 푸른 입술에서 풍겨나오는 음률을 배경으로 하여 울고 있지 않겠는가. 그려 놓은 얼굴을 스스로 풀어헤치면서 통곡 소리를 내고 있지 않겠는가. 비가 내지르는 ‘울음소리’를 포착하면서 시인은 “가뭇없이 달아나버리는 하루”를 아쉬워하며 “맹물이지만 맹물 같지 않은/그들의 하소연”을 새기고 있다. 역시 시인에게 ‘우기’는 울음소리로 번져오면서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존재자들의 하소연을 품는 언어의 장(場)으로 다가오고 있다.
빗줄기는 하늘의 총알
나를 향해 집중사격이다
언제부터 나는
누구의 총알받이가 되었나
내 뒤에
누가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나를 앞세워 밀어붙이고 있다
이번 생은
어쩔 수 없다
그냥 속절없이 구멍 뚫리며 피 흘리며
견뎌내야 한다
― 「雨期 · 3」 전문
이번에는 빗줄기가 “하늘의 총알”로 은유되고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해한 총알은 시인을 향해 집중사격을 한다. 이 ‘총알-빗줄기’는 그동안 얼마나 시인을 총알받이로 만들었던 것일까. 시인은 자신의 뒤에 숨어 있어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힘”이 ‘나’를 앞세워 밀어붙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 이번 생은 어쩔 수 없이 “속절없이 구멍 뚫리며 피 흘리며/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기’는 삶의 고통과 고독, 그리고 연단과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으로 찾아온다.
이처럼 시인은 ‘우기’ 연작 세 편을 통해 내면의 고독과 이루지 못한 꿈, 그리고 처연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길어올리고 있다. 그 시간은 ‘누림’의 대상이 아니라 ‘견딤’의 대상으로 찾아온다. 시인은 눅눅히 내리고 무심하게 아래로만 흘러가는 빗속에서 불가피하게 기울어가는 생의 이면을 바라보고 있다. 선명한 빗소리를 통해 우리 또한 시인이 노래하는 삶의 필연적 소멸과 그 어둑한 잔상(殘像)을 저만치의 거리에서 바라보게 된다. 선명한 감각과 생생한 음률 그리고 일관된 마음의 현상학이 이번 세 편 연작에 소중히 담겨 있는 셈이다.
서정의 원적으로서의 사유와 감각
우리가 천천히 읽어왔듯이, 문효치 시인은 말수를 점점 줄이면서 내용의 명징함을 점증해가고 있다.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철저하게 절제와 깊이를 획득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만큼 시인은 서정의 간단없는 심화를 통해 우리 시의 귀중한 자산인 자기 성찰과 타자 발견의 시학을 줄곧 보여왔다. 단형의 형식을 통해 소통 친화적이면서도 개성적인 깊이를 확보한 시세계를 일관되게 구현해온 것이다. 특별히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애착은 시인에게 제일의적 창작의 수원(水源)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게 시인은 한때 존재했다가 이제는 부재하는 사물들을 일일이 호명하고 재현하면서 그러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그리움의 감정을 일관되게 노래한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기억과 그리움이 인간 존재 형식을 그대로 담아내는 정신 운동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기억과 그리움이 과거의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현재적 욕망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기억과 그리움 또한 시인의 현재형의 닮아 있음에 상도(想到)하게 된다.결국 문효치 시인은 지난 시간을 일일이 찾아가면서 기억과 그리움의 힘으로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고, 잃어버린 세계를 순간적으로 탈환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번 ‘우기’ 연작도 비록 우울과 하강의 분위기를 띠고 있지만 이러한 질서를 충실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의 불가피한 속성을 더욱 심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준 성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꿈과 하소연을 넘어 생을 충실하게 견뎌가는 마음이야말로 더욱 근원적인 생의 질서를 수납하고 스스로를 완성해가는 현장이 아닐 것인가. 그러한 언어 감각으로 감싸인 문효치 시편의 우뚝한 단형 미학을 더욱 기다리며 기대해 마지않는다.

유성호 ■
199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서정의 건축술』 등이 있음.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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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호(VOL.1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