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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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임승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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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임승유

  신작시: 나를 데리고 다녀주세요 / 서술자 / 역사

  자선시: 괴산에서의 생활 / 이델

  [시인론] 박성준 “문장이 골목을 만들 때”

 

 

 

 

 

 


 신작시 


 

 

 

 나를 데리고 다녀주세요

 

 

 

 

 

여럿이 만나서 예식에 참여하기로 한 날 우리는 한꺼번에 다 모이지는 못하고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 그렇게 제각각이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아 나중에 오는 사람을 기다렸고 중간에 온 사람은 자기가 맨 마지막에 온 줄 알고 낙담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예식이 시작되고 들어온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다 같이 모여 예식에 참여하는 일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던 겁니다. 예식이 끝난 후에는 모여서 식사를 하고 식사를 하다보면 식사는 어느새 끝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모일 때는 한꺼번에 모이지 못했으면서 헤어질 때는 한꺼번에 헤어지는 게 말이 되나. 누가 먼저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만났는데 우리 좀 걸을까요? 말이 나왔을 때는

 

걸어야지요. 말이 나온 김에 걸어야지요. 다들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걷게 되었지요. 골목을. 걸을 때는 다 같이 모여서 걷는 줄 알았는데 막상 걸을 때는 안 보이게 따라다니는 경우도 있었고 벌써부터 와서 걷는데 안 보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았습니다. 골목에 사람이 많은 데 무슨 이유가 있었겠어요. 그냥 너나없이 골목을 걸었던 겁니다.

 

 

 

 

 

 

 

 

 

 

 



 

 

 서술자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의 서술자는

 

지빠귀가 지나다니는 시골 저택에 세 들어 사는 남성인데 이제 겨우 이 마을에 발을 들인 처지라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리를 해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까지 찾아가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다가

 

심한 감기에 걸리게 되고

 

서술자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인물을 불러내기에 이른다. 그이에게 자기 역할을 떠넘기기 위해 다 죽어가는 시늉을 한다. 아픈 이를 돌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새로운 서술자가 가장 잘하는 일이라서

 

그이는 뜨끈한 죽을 끓여온다. 바느질감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입으로만 떠드는 건 적성에 맞지 않기도 하고 뭔가를 시작할 때는 그럴듯하게 시작하는 게 좋으니까. 이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 위의 저택과

 

지빠귀가 지나다니는 시골 저택에 살고 있는

 

양쪽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해내는 이를 마을 사람들은 넬리라고 부른다. 넬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지치면 등장 인물 중 하나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하는 방식으로

 

양쪽 집안을 다 돌아다닐 수 없을 때는 한쪽 집안 가정부를 장터로 불러내 말하게끔 하는 방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한 후에 뒤로 슬쩍 빠진다. 그러는 사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고되고 눈물 나고 답답한 시절을 다 겪었으니 이제 뒤로 슬쩍 빠진다는 듯이

 

가정부 넬리로 돌아와

 

죽을 사람은 죽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각자의 생활을 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처음에 만난 서술자는 이야기가 다 끝날 때쯤 해서는 감기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남은 이야기를 더 들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쩐지 흥미를 잃은 표정이 되어서는 서둘러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역사

  

  

 

 

 

금을 그어 놓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우리 집이야. 말하고 나니까 너는 금 밖에 서 있다. 너를 데리고 들어가고 싶은데 아직 문이 없는 집이라

 

너는

 

내가 금을 긋느라 손에 쥐었던 막대기를 들고 저만큼 걸어간다. 그만큼의 골목이 생겨난다.

 

이 골목에서

 

나는 얼마나 오래 서 있어야 할까.

 

  

 

 

 

 

 

 

 

 

 


 자선시 


 

 

 

 괴산에서의 생활

  

  

 

 

 

그녀는 괴산에서의 생활을 이어왔다. 그렇게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 생활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다. 그녀가 괴산에서의 생활을 이어 왔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면

 

그녀는 그동안 어디 있었던 것이며 그녀가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들어 그녀가 이쪽을 보고 있다고. 괴산까지 가는 동안에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괴산에 근접하는 순간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괴산의 입구라는 것이 있다면 입구에서. 괴산의 색깔이라는 것이 있다면 색깔에서

 

냄새가 난다고 우겨볼 수도 있을 텐데

 

그녀가 괴산에서 생활한다는 냄새. 냄새가 그녀의 생활을 휘감고 눅눅하게 하고 머리카락에 배어서 괴산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실체를 구성한다지만 냄새를 계속 맡다보면 냄새에 익숙해지고 이게 냄새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가고

 

괴산에서 돌아와 머리를 감다가 머리가 하얘지는 것이다. 그녀가 문지르고 그녀가 닦아냈던 괴산에서의 생활을. 수줍고 외롭고 분노와 당혹감에 찬 자신을. 그런 자기 자신을 불러 세우지 않고서 그녀가 어떻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나 괴산에서의 생활을

 

 

 

 

 

 

 

 

 

 

 

 


 

 

 

 이델

 

            

 

 

 

 

동생을 찾아가서 시간을 보냈다. 동생과 있을 때는 남아 있는 모든 것이 시간이었다. 시간은 보내면 없어지지만 그래도 남는 건 시간밖에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헤더를 보려고 언덕에 올랐을 때 시간이 구부러졌다. 소설 문장에서만 봤던 헤더를 직접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언덕을 내려왔을 때는 이미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간 다음이었다. 며칠 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후에 동생이 어디 좀 가자고 해서

 

언덕에 들어섰을 때였다. 이번에는 올라가는 언덕이라기보다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지나가는 언덕에 가까웠다. 바람이 불어서 외투를 여미며 언덕을 지나갔다. 언덕은 가만히 있고 동생과 내가 언덕을 지나가는 건데 시간 입장에서 보면 언덕이 언덕을 지나가고 언덕이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언덕은 서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언덕이 끝나는 곳에서는 마을이 시작되니까.

 

시간이 시간을 끼고 들어앉은 마을엔

 

펍이 하나쯤 있고

 

동생과 나는 펍에 들어가 맥주 한 잔씩을 마셨다. 맥주를 중간에 끊는 일은 잘 없었기 때문에 더 마셔야 했지만 그랬다가는 언덕이 벌써 돌아가고 없을지도 몰랐고

 

기껏 동생을 찾아갔다가 길을 잃는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임승유  l 

2001년 《문학과사회》 등단.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그 밖의 어떤 것』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생명력 전개』 『다음 계절까지는 붙어 있자고 말했다』,  산문집 『텍스트 기억 연습』이 있음.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시인론 / 박성준  


  

 

 

 

 

문장이 골목을 만들 때

— 임승유 신작시의 수행성과 사람의 자리

 

 

 

   

 

하버드의 윌리엄 제임스 초청 강연(1955)에서 J. L. 오스틴이 문제 삼은 것은 언어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기술하거나 사실을 전달한다는 철학적 통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결혼식에서 발화되는 짧은 대답인 “I do”를 예로 든다. 나는 이 사람을 배우자로 받아들인다는 이 말은 결혼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거나 보고하지 않는다. 적절한 사람과 절차와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그 말을 발화하는 행위 자체가 결혼이라는 사건의 일부가 된다. 문장이 현실을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문장을 따라 움직이는 셈이다. 우리는 말로 약속하고, 명령하고, 선언하며, 한 사람을 이전과 다른 관계 속에 놓는다. 그 결과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기호에 머물지 않고, 사람의 관계와 자리를 새롭게 조직하는 하나의 행위가 된다. 오스틴은 이러한 언어의 작용을 수행적 발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수행이 성립하는 조건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오스틴은 무대나 시, 독백 속에 놓인 발화를 일상적인 수행적 발화의 분석 대상에서 일단 제외한다. 배우가 무대에서 “I do”라고 말한다고 해서 현실의 결혼이 성립하지는 않으며, 시나 독백 속에 놓인 수행적 문장 역시 현실의 제도적 효력을 획득하지 못한다. 문장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스틴은 이러한 발화를 특수한 의미에서 공허하거나 무효한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 구분은 시의 자리에서 곤란한 역설을 낳는다. 시의 말은 혼인이나 선고와 같은 제도적 행위를 직접 성립시키지는 못하지만, 사물의 위치를 바꾸고 감각의 순서를 흔들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관계를 발생시킨다. 그렇다면 시는 제도적 효력을 갖지 못한 말이 다른 층위의 효력을 획득하는 장소, 다시 말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이 감각과 관계의 사건으로 전환되는 장소에서 기인된 언술이 아닐까.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시의 수행성은 오스틴이 설정한 수행적 발화의 범주를 그대로 확장한 것이 아니라, 문장이 제도적 효력과 다른 층위에서 감각과 관계, 장소의 배치를 바꾸는 작용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임승유의 시에서 이 질문은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는 물음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의 자리는 이미 마련되어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 말하고 걷고 기다리는 동안 뒤늦게 생겨나는가. 임승유의 시에 등장하는 “집”과 “골목”, “언덕”과 “저택”, “마을”은 인물을 담아 두는 배경이 아니며, 문장 역시 그 장소를 묘사하는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문장은 사람을 불러들이거나 밀어내고, 서로 다른 시간과 위치에 놓인 이들을 잠시 같은 장면에 머물게 하며,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곁에 놓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는 이미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다음 말과 다음 행위에 의해 다시 흔들리는 임시적인 자리다. 이 지점에서 오스틴의 수행성은 임승유의 시를 읽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전환될 수 있다. 시를 이미 존재하는 공간의 재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람의 자리를 만들고 그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사건으로 읽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승유의 시에서 공간을 읽는 일은 문장이 사람을 어디에 놓는지, 그렇게 배분된 자리가 어떻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지를 살피는 일이 된다.

 

“꽃을 꺾었다. …… 꽃을 꺾었다는 문장은 한참 전에 적어 놓았던 ‘내가 꺾어서 모아 온 꽃이야!’라는 문장을 들여다보다가 이 문장은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향하지 말고 그야말로 행위만 남기려고 적은 것이다. 겹문장을 홑문장으로 만들고 수식어를 빼고 나면 서사가 지워지면서 추상에 가까운 문장이 될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생각과 감각이 달라붙는다. …… 문장에 달라붙는 관계의 우글거림을 견디지 못하는 이런 감각이 문장을 헐벗게 만든다.”

-임승유, 「마음에 드는 문장」, 《​​​​​​파란》​​​​​​ 제36호, 2025, 45쪽.

 

“저는 한 편의 시를 통과한 후에 구조적으로 질적 변화를 겪는 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시를 쓰는 행위가 능동적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는, 그러니까 한 편의 시가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한 편의 시가 통째로 일상의 문법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거죠.

(중략)

언어의 구조물로서의 시는 스스로의 생명력이 있어서, 쓰는 이와 읽는 이들 사이로 스며들고 틈을 만들며 어떤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걸 실감한 거죠. 실제 현실에서 독자들과 만나 소통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쓰는 일이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어떤 흐름 속에 있다는 인식 또한 중요하게 생각되더라고요. 여전히 이게 뭐지? 불안해하면서 더듬더듬 쓰게 되겠지만 내가 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하면서 쓰게 될 것 같아요.”

- 임승유·손남훈, 「무지한 독자가 미지수의 시인에게」, 《오늘의문예비평》 제120호, 2021, 158쪽, 164쪽.

 

두 발언을 함께 놓고 보면, 임승유에게 문장은 관계를 담아 전달하는 그릇이라기보다 관계가 발생하는 조건에 가깝다. “꽃을 꺾었다”라는 문장에서 주체와 대상의 구체적인 사연을 지우고 행위만 남기려는 시도는 문장을 추상화하거나 비어 있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꽃을 꺾었는지, 그 꽃은 누구에게 건네질 것인지, 꺾는 행위에는 어떤 감각과 기억이 들러붙어 있는지를 연쇄적으로 불러낸다. 서사를 덜어낸 문장에 “더 많은 생각과 감각”이 달라붙고, 제거하려 했던 관계가 다시 “우글거림”의 형태로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임승유가 말하는 “헐벗은” 문장은 관계가 소거된 문장이 아니라, 관계를 미리 규정하는 맥락이 제거된 문장에 가깝다. 문장이 비워놓은 자리는 공백으로 남지 않고,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람과 기억과 감각이 들어설 가능성으로 열린다.

이러한 문장관은 한 편의 시가 “통째로 일상의 문법”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임승유에게 시는 경험한 현실을 적절한 수사로 옮겨놓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시를 통과한 뒤 현실의 사물과 관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질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때 시가 지닌 “스스로의 생명력”은 작품이 현실과 단절된 자율적 형식이라는 뜻이 아니다. 언어의 구조물이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로 스며들어 “틈”과 “흐름”을 만들고, 개인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세계 속에 다시 놓는다는 뜻에 가깝다. 그러므로 임승유의 시에서 세계는 언어 바깥에 완성되어 있는 대상이 아니라, 문장의 움직임에 따라 사람과 사물의 관계가 달라지며 계속 구성되는 장이다. 오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시의 문장은 제도적 현실에서는 무효일지라도, 감각의 배치와 관계의 문법을 바꾸는 방식으로 고유한 수행성을 획득한다.

기존 임승유론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조는 반복해서 포착된 바 있다. 박상수는 「사랑과 영혼의 ‘있음’을 끝내 믿는 일」(《현대시》, 2017. 1)에서 임승유의 “문법적 착란”과 구문의 반복과 변형이 새로운 상황과 공간을 생산하며, 그 과정에서 언어가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임승유의 문장은 현실적 계기를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문법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연속해서 만들어 내면서 사라진 사람을 다시 불러내고 무너진 삶과 공동체를 복원할 가능성을 발생시킨다고 보았다. 박상수가 이처럼 문법 내부에서 시작되는 운동과 그 윤리적 가능성에 주목했다면, 소유정은 「약동하는 시」(《문학과사회》 통권 제147호, 2024 가을호)에서 그 운동이 시의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핀다. 소유정은 시집 『생명력 전개』(문학동네, 2024)에서 “현재와 미래, 읽기와 쓰기”를 비롯하여 “내피와 외피, 안과 바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두 항의 이중 구조”가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가령 「만두」의 화자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만두를 “미리 끌어와 시를 쓰”고, 다시 “시에 언급된 만큼 만두를 만드는 것”을 예정한다. 이때 미래의 만두는 현재 쓰이고 있는 시의 재료가 되지만, 동시에 시에 기록된 문장은 미래에 만두를 만드는 행위를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 현실이 먼저 존재하고 문장이 이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아직 오지 않은 현실의 장면과 행위를 미리 조직하는 셈이다. 이러한 양방향적 작용은 인물과 공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인물이 공간의 안팎으로 드나들면 그가 돌아온 장소는 물리적으로는 이전과 동일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빈 시간과 그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같은 장소일 수 없게 된다. 소유정의 표현대로라면, “안팎의 드나듦”으로 인해 사건이 발생하고 “정적인 풍경”에서 “변화와 움직임”이 감지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승유의 시는 “두 개의 항 사이를 바삐 오가며 시의 생명력을 추동한다.”

따라서 두 평론은 임승유의 언어가 완성된 현실을 묘사하기보다 문법과 장면의 이동을 통해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다시 조직한다는 점에서 만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존 논의가 문법적 착란이 생산하는 가능성과 두 항 사이에서 전개되는 생명력에 주목했다면, 여기서는 신작시 세 편에 나타난 장소와 인물의 배치를 중심으로 문장이 사람을 어디에 놓고, 그들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조정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여럿이 만나서 예식에 참여하기로 한 날 우리는 한꺼번에 다 모이지는 못하고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 그렇게 제각각이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아 나중에 오는 사람을 기다렸고 중간에 온 사람은 자기가 맨 마지막에 온 줄 알고 낙담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예식이 시작되고 들어온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다 같이 모여 예식에 참여하는 일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던 겁니다. 예식이 끝난 후에는 모여서 식사를 하고 식사를 하다보면 식사는 어느새 끝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모일 때는 한꺼번에 모이지 못했으면서 헤어질 때는 한꺼번에 헤어지는 게 말이 되나. 누가 먼저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만났는데 우리 좀 걸을까요? 말이 나왔을 때는

 

걸어야지요. 말이 나온 김에 걸어야지요. 다들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걷게 되었지요. 골목을. 걸을 때는 다 같이 모여서 걷는 줄 알았는데 막상 걸을 때는 안 보이게 따라다니는 경우도 있었고 벌써부터 와서 걷는데 안 보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았습니다. 골목에 사람이 많은 데 무슨 이유가 있었겠어요. 그냥 너나없이 골목을 걸었던 겁니다.

- 「나를 데리고 다녀주세요」 전문

 

「나를 데리고 다녀주세요」는 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것이 어떤 예식인지, 예식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예식의 제도적 내용보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어떻게 도착하고, 기다리고, 서로의 위치를 바꾸게 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식은 사람들을 하나의 장소에 불러 모으지만, 이들을 완전한 동시성 속에 놓지는 못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모인다’는 말은 여러 사람이 하나의 시각과 장소로 수렴하는 행위를 뜻하지 않는 셈이다.

그 자리에는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이 있고, 자신이 맨 마지막에 왔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마지막이 아니었던 사람이 있으며, 예식이 시작된 뒤에야 도착한 사람도 있다. 같은 사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시간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다. 더욱이 먼저, 중간, 마지막이라는 그 위치는 각자가 도착하는 순간 확정되지 않는다. “중간에 온 사람”의 위치는 그보다 늦게 온 사람이 나타난 뒤에야 소급하여 결정된다. 한 사람의 자리가 자신의 행위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출현에 따라 뒤늦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가 “다 같이 모여 예식에 참여하는 일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던 겁니다”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함께 있음’은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각자의 지연과 낙담, 기다림이 가까스로 포개진 결과다.

그런데 이 시에서 주목할 점은 모이는 일보다 헤어지는 일이 더 문제적인 사건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한꺼번에 모이지 못했으면서 예식과 식사가 끝나자 한꺼번에 헤어지려 한다. “모일 때는 한꺼번에 모이지 못했으면서 헤어질 때는 한꺼번에 헤어지는 게 말이 되나”라는 반문은 어렵게 포개진 서로 다른 시간들이 정해진 절차의 종료와 함께 단번에 해체되는 상황을 문제 삼는다. 예식과 식사는 끝났지만, 만남까지 동시에 끝나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 반문에서 “우리 좀 걸을까요?”라는 말이 나온다. 예식의 공식적인 절차에 포함된 선언도 아니고 특별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내린 명령도 아닌, 우연히 나온 제안이다. 심지어 시는 “누가 먼저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이라고 말하며 최초 발화자의 자리마저 비워놓고 있다.

그러나 말한 사람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은 특정한 개인의 의사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 사이로 번져갈 수 있다. “걸어야지요. 말이 나온 김에 걸어야지요”라는 응답이 이어지고, 마침내 “다들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습니다”라는 집단적인 발화가 만들어진다. 이때 “한 것 같았습니다”라는 표현은 누가 실제로 말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남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걷기 시작한다. 말의 효력은 최초 발화자의 명확한 의도나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반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특히 “말이 나온 김에”라는 표현은 이 걷기에 별도의 목적이나 원인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목적지가 있어서 걷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걷는 것도 아니다. 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걷는 이유가 된다. “우리 좀 걸을까요?”라는 문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행위를 제안하고, “걸어야지요”라는 응답은 그 제안을 공동의 의지로 바꾸며, 말은 이미 끝난 모임 뒤에 없었던 시간을 더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나를 데리고 다녀주세요」는 오스틴이 제도적 수행의 바깥으로 밀어냈던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다른 효력을 얻는지를 보여준다. 예식은 적절한 절차와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말에 의해 관계를 공인하는 자리다. 하지만 시편 속에서 사람들을 실제로 약동시키는 것은 예식 중에 발화된 공식적인 문장이 아니라 예식이 끝난 뒤 누군가 우연히 꺼낸 “우리 좀 걸을까요?”라는 말이다. 제도적 권한이 없는 이 문장은 다른 사람들의 응답을 얻으면서 현실의 다음 장면을 만든다. 수행성의 조건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말할 자격을 지녔는가가 아니라, 그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다시 발화되는가이다. 임승유의 시에서 말의 힘은 한 사람의 권위에 집중되지 않고, 말하고 듣고 응답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산된다.

“그래서 걷게 되었지요. 골목을”이라는 문장의 배치도 이러한 발생의 순서를 형식적으로 보여준다. 문법적으로는 “골목을 걷게 되었지요”라고 쓰는 편이 자연스럽지만, 시는 걷게 되었다는 문장을 먼저 끝낸 다음 “골목을”을 뒤늦게 내놓는다. 이 지연으로 인해 골목은 사람들이 걷기 전에 이미 마련되어 있던 배경이 아니라, 걷는 행위 다음에 발생한 장소처럼 나타난다. “우리 좀 걸을까요?”라는 말이 걷기를 만들고, 그렇게 시작된 걷기가 다시 그들이 지나갈 골목을 불러낸다. 문장은 이미 존재하는 골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먼저 움직인 다음, 그 움직임이 놓일 공간을 문장 뒤편에 마련한다.

그들이 걷는 곳이 넓은 광장이나 곧은 대로가 아니라 골목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골목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길이라기보다 집과 집 사이를 지나며 방향을 바꾸고, 앞선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의 거리를 벌렸다 좁혔다 하는 장소다. 그 때문에 모두 함께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안 보이게 따라다니는 경우”와 “벌써부터 와서 걷는데 안 보이는 경우”가 동시에 생긴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그곳에 없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는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이미 앞서 도착한 사람일 수도 있으며, 기억 속에서 동행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시는 이들의 정체를 확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사람이 많았습니다”라고 단언한다. 이 구절은 눈앞에 보이는 인원을 헤아려 얻은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사람만으로는 그곳에 있는 사람을 모두 셀 수 없다는 감각에서 나온 진술이다. 즉 이 구절은 현실의 시야에서 포착되지 않는 사람까지 골목 안으로 불러들여 다른 사람의 곁에 놓는다. 이에 따라 무리는 경계가 분명한 집단이 아니라, 부재와 현존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느슨한 공동체로 확장된다.

아울러, 제목 「나를 데리고 다녀주세요」는 이러한 장면을 한층 더 낯설게 만든다. 본문에는 ‘우리’와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제목의 ‘나’는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데리고 다녀 달라고 부탁하는 ‘나’는 누구인가. 무리에 섞여 보이지 않게 걷는 사람일 수도 있고, 예식이 끝난 뒤에도 헤어지지 못한 마음일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걷는 동안 그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야기를 가리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나’가 독립적으로 서서 이동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움직임에 자신을 맡긴다는 사실이다. “나를 데리고 다녀주세요”라는 부탁은 말하는 사람과 그를 데려갈 사람 사이에 아직 없던 동행의 관계를 만든다. 또한 한번 함께 걷자는 제안이 아니라 계속 자신을 “데리고 다녀” 달라는 요청이라는 점에서, 본문의 일회적인 산책을 앞으로도 반복될 움직임으로 연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본문 바깥에서 가장 늦게 합류한 한 사람처럼 작동한다.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 예식이 시작된 뒤 도착한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제목의 ‘나’는 시를 다 읽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가장 늦게 도착한 이 말은 시 전체를 따라다니며 독자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동행을 의식하게 한다. 동시에 본문의 인칭은 제목의 ‘나’에서 “우리”와 “다들”, “사람”을 거쳐 마지막의 “너나없이”로 이동한다. “너나없이”에는 ‘너’와 ‘나’가 들어 있지만, 둘 사이의 구분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제목에서 한 사람이 건넨 부탁이 집단적인 걷기를 통과하며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관계의 형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진정한 공동의 사건은 예식 자체보다 예식이 끝난 뒤 시작된 걷기에 가깝다. 예식은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한자리에 모았지만, “우리 좀 걸을까요?”라는 사소한 말은 그 만남이 곧바로 끝나지 않도록 새로운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분명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골목을 걷는 것이 아니다. “골목에 사람이 많은 데 무슨 이유가 있었겠어요”라는 마지막 물음은 이 만남을 하나의 원인이나 목적에 종속시키려는 해석을 밀어낸다. 이들은 말이 나왔기 때문에 걷고, 걷는 동안 서로의 곁에 놓이며, 문장이 그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람까지 포함한 무리가 된다. 그렇게 「나를 데리고 다녀주세요」는 하나의 문장이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골목을 만들며, 그 골목이 다시 서로 다른 시간에 속한 존재들을 함께 머물게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임승유가 말한 “일상의 문법”이란 이처럼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문법이 아니라, 아직 없던 관계가 잠시라도 가능하도록 사람과 장소를 새롭게 배치하는 문법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의 서술자는

 

지빠귀가 지나다니는 시골 저택에 세 들어 사는 남성인데 이제 겨우 이 마을에 발을 들인 처지라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리를 해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까지 찾아가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다가

 

심한 감기에 걸리게 되고

 

서술자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인물을 불러내기에 이른다. 그이에게 자기 역할을 떠넘기기 위해 다 죽어가는 시늉을 한다. 아픈 이를 돌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새로운 서술자가 가장 잘하는 일이라서

 

그이는 뜨끈한 죽을 끓여온다. 바느질감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입으로만 떠드는 건 적성에 맞지 않기도 하고 뭔가를 시작할 때는 그럴듯하게 시작하는 게 좋으니까. 이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 위의 저택과

 

지빠귀가 지나다니는 시골 저택에 살고 있는

 

양쪽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해내는 이를 마을 사람들은 넬리라고 부른다. 넬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지치면 등장 인물 중 하나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하는 방식으로

 

양쪽 집안을 다 돌아다닐 수 없을 때는 한쪽 집안 가정부를 장터로 불러내 말하게끔 하는 방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한 후에 뒤로 슬쩍 빠진다. 그러는 사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고되고 눈물 나고 답답한 시절을 다 겪었으니 이제 뒤로 슬쩍 빠진다는 듯이

 

가정부 넬리로 돌아와

 

죽을 사람은 죽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각자의 생활을 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처음에 만난 서술자는 이야기가 다 끝날 때쯤 해서는 감기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남은 이야기를 더 들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쩐지 흥미를 잃은 표정이 되어서는 서둘러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 「서술자」 전문

 

공간이 이미 주어진 배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이동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자의 자리 역시 미리 정해져 있을 수 없다. 「서술자」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취한 액자식 서술 구조를 재구성하면서, 누가 말할 자리를 얻으며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노동은 누구에게 맡겨지는지를 묻는다. 물론 임승유는 원작의 서사를 요약하거나 인물들의 비극을 다시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 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어떤 사람이 그 이야기를 넘겨받으며, 여러 사람의 삶이 어떤 경로를 거쳐 독자에게 도달하는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때 서술자는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전달하는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이야기의 이동 과정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임시적인 자리다.

시의 첫 번째 서술자는 “지빠귀가 지나다니는 시골 저택에 세 들어 사는 남성”이다. 이는 『폭풍의 언덕』에서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세 들어 사는 록우드를 가리킨다. 그는 “이제 겨우 이 마을에 발을 들인 처지”이므로 마을 사람들의 과거와 관계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말할 의욕은 있지만 말할 수 있는 위치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까지 찾아가 정보를 얻으려 하고, 그 무리한 이동 끝에 심한 감기에 걸린다. 세계를 알아내려는 그의 시도는 지식의 획득으로 이어지지 않고, 움직일 수 없게 된 아픈 몸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바로 그 실패가 “서술자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인물”을 불러내는 계기가 된다. 첫 번째 서술자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이야기 안에 새로운 말의 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다소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서술된다. 첫 번째 서술자는 다른 사람에게 역할을 떠넘기기 위해 “다 죽어가는 시늉”을 한다. 이 ‘시늉’은 실제 죽음은 아니지만, 서술자의 자리를 이동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효력을 발휘한다. 아픈 사람을 연기하는 행위가 그를 돌볼 사람을 불러들이고, 그렇게 불려 온 사람이 새로운 서술자가 된다. 임승유의 시에서 서술자의 교체는 공식적인 권한의 위임이나 문학적 자격의 승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아픈 몸을 내보이고 다른 사람이 그 몸 곁에 머무는 관계가 먼저 만들어진 뒤, 그 관계 안에서 이야기를 건네고 넘겨받는 일이 발생한다.

새로운 서술자인 넬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뜨끈한 죽”을 끓여 오고 바느질감을 챙긴다. 시에서는 “입으로만 떠드는 건 적성에 맞지 않”다고 덧붙임으로써, 넬리의 말하기가 생활의 행위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아픈 사람에게 죽을 끓여 주고, 그의 곁에서 바느질하며 머무는 시간이 서술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이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선언에서 ‘진짜’는 어떤 객관적 진실이나 원본의 이야기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곁에 머무르면서 그의 몸과 시간을 돌보는 사람에게 이야기가 넘어간 뒤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말하기를 가리킨다. 이 시에서 이야기할 자격은 세계를 멀리서 내려다보는 시선보다 관계 속에 오래 체류한 몸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넬리의 서술을 투명하고 완전한 전달로 볼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양쪽 저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현장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넬리는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장면을 전달하기 위해 등장인물에게 편지를 쓰게 하고, 양쪽 집안을 모두 돌아다닐 수 없을 때에는 다른 가정부를 장터로 불러내 말하게 한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하게 하는 방식으로”라는 구문이 중요하다. 넬리는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옮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게 하고, 다른 누군가를 특정한 장소로 나오게 하고, 그곳에서 말하게 함으로써 이야기가 전달될 조건을 직접 만든다. 그의 문장은 사람에게 발화의 역할을 부여하고, 서로 다른 장소에 놓인 사람들을 이야기의 장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런 점에서 「서술자」의 액자식 구성은 이야기를 둘러싸는 정적인 테두리가 아니다. 첫 번째 서술자와 넬리, 편지를 쓰는 인물과 장터로 불려 나온 가정부의 말이 서로 이어지면서 액자는 여러 목소리가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누구도 이야기 전체를 단독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 보충된다. 서술은 세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떨어진 장소에서 나온 불완전한 말들을 이어 붙여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작업이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서술 이전부터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다가 언어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장터에 나와 말하며 다른 사람의 말 속에 다시 놓이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자리를 얻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물들의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한다는 진술에는 과장도 섞여 있다. 실제로 한 사람의 삶을 빠짐없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넬리가 동원하는 편지와 전언은 이야기의 빈틈을 메우는 장치인 동시에, 그 빈틈이 끝내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넬리의 서술은 완전한 재현이라기보다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다음 말과 다음 화자를 만들어내는 수행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복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을 다른 사람의 말과 연결함으로써 이야기가 계속 이동하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서술은 넬리의 생애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고되고 눈물 나고 답답한 시절”을 모두 통과하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이도 먹을 만큼 먹”는다. 서술하는 시간은 사건이 모두 끝난 뒤 그것을 정리하는 중립적인 시간이 아니다. 타인의 삶을 말하는 사람 역시 그 이야기 안에서 늙고 지치며 자신의 시간을 소모한다. 이 때문에 시에서 두 차례 반복되는 “뒤로 슬쩍 빠진다”는 표현은 단순한 퇴장을 넘어선다. 넬리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말하지만 그들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로 소유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읽힌다. 정보를 전달한 뒤에는 서술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가정부 넬리로 돌아”가고, 죽을 사람은 죽고 남을 사람은 남아 각자의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야기를 오래 했다는 사실이 타인의 삶을 대신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는 듯한 물러남이다.

반면 처음의 서술자는 감기가 낫자 남은 이야기를 더 들려줄 수 있었음에도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마을을 떠난다. 그의 서술이 낯선 사건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흥미와 함께 끝난다면, 넬리의 서술은 돌봄에서 시작되어 사람들이 죽고 남는 시간까지 이어진다. 제목이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역할을 가리키는 「서술자」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서술자의 자리는 처음의 남성에서 넬리로, 다시 편지를 쓰는 인물과 장터에서 말하는 가정부에게로 옮겨 간다. 이들은 타인의 삶에 머무르는 동안 이야기를 움직이지만, 그 이야기를 완전히 소유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야기는 그 자체로 구속력이 없는 모두의 이야기로 승화되는 것이다.

 

금을 그어 놓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우리 집이야. 말하고 나니까 너는 금 밖에 서 있다. 너를 데리고 들어가고 싶은데 아직 문이 없는 집이라

 

너는

 

내가 금을 긋느라 손에 쥐었던 막대기를 들고 저만큼 걸어간다. 그만큼의 골목이 생겨난다.

 

이 골목에서

 

나는 얼마나 오래 서 있어야 할까.

- 「역사」 전문

 

이러한 특징은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화자가 금을 긋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우리 집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의 선은 집의 경계가 되고 ‘너’는 그 바깥에 놓인다. ‘우리’라는 말이 공동의 자리를 만드는 동시에 한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다. 화자는 너를 데리고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집에는 “아직 문이” 없다. 경계는 금과 선언만으로도 만들 수 있지만, 그 경계를 함께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의 자리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긋고 말하는 행위에 따라 안과 밖으로 나뉜다.

그러나 너는 화자가 금을 긋는 데 사용한 막대기를 들고 “저만큼” 걸어간다. 경계를 만들던 도구가 이동의 도구로 바뀌면서, 소유의 범위를 정하던 선은 서로 오갈 가능성을 여는 골목으로 전환된다. 그 결과 집 안의 주인이었던 화자는 너의 걸음이 만든 골목에서 “얼마나 오래 서 있어야 할까”를 묻는 사람이 된다. 「서술자」에서 말하는 역할이 여러 사람에게 옮겨 갔듯, 「역사」에서도 사람의 위치는 말과 이동에 따라 뒤바뀐다. 이때 역사는 완결된 과거의 기록이라기보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길 위에서 누군가 기다리며 감당해야 하는 시간에 가까워진다.

이렇듯 임승유의 신작시를 경유해 보건대, 그의 문장관은 세계를 빠짐없이 재현하기보다, 말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 다른 사람을 불러들이고 그에게 말하기와 걷기, 기다림의 역할을 건넴으로써 세계가 계속 이어질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이때 사람의 자리는 한 번 정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람의 말과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따라서 임승유의 시에서 수행성은 관계를 제도적으로 확정하는 언어의 힘보다, 이미 정해진 관계와 공간의 배치를 흔들어 새로운 이동의 가능성을 만드는 힘에 가깝다. 이는 관계를 지우려 할수록 문장에 “더 많은 생각과 감각”이 달라붙는다는 그의 시론과도 연결된다. 임승유의 “헐벗은” 문장은 관계가 사라진 문장이 아니라, 관계의 방향과 주체가 미리 결정되지 않았기에, 아직 오지 않은 사람까지 들어설 수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 시는 사람에게 영구한 거처를 제공하지 않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놓인 이들이 잠시 곁에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현실에서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의 문장이 끝내 수행하는 일은 무엇일까. 사람이 떠난 뒤에도 다른 사람이 걸어올 수 있도록 세계 안에 하나의 골목을 남기는 일, 우리는 그 길을 같이 걸어본 적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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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l 

2009년 《문학과사회》 시, 2013년 《경향신문》 평론 등단. 시집 『몰아 쓴 일기』 『​​​​​​잘 모르는 사이』, 평론집 『안녕, 나의 페르소나』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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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호(VOL.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