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지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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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지 위의 시어들 18
— 오탁번 시「꼴뚜기와 모과」
술을 좋아하는 아빠가 포장마차에 갈 때
그림일기 그리다 말고 나도 따라나선다
아빠는 똥집 안주로 소주 한 병 마시고
살짝 데친 꼴뚜기 한 접시는 내 차지다
“꼴뚜기처럼 생긴 애가 골뚜기를 참 좋아하네.”
포장마차 할머니는 아빠를 본 체도 안 하고
꼴뚜기 먹는 나만 바라본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더니
우리 집 망신은 요놈이 다 시키누나.”
아빠는 하하 웃으며 술잔을 비운다
엄마 따라 춘천 가는 국도 가에는
호박이랑 모과를 파는 길가 가게가 많다
엄마는 춘천 대학 국어 선생님
나는 서울 종암 초등 학교 1학년
엄마는 모과 다섯 개를 고르고 나서
“과일 가게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데
오천 원은 비싸요, 천 원 깎아요.”
모과 파는 아줌마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요즘 모과는 망신이 아니고 자랑이에요.
이 애가 모과처럼 예뻐서 주는 거예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아줌마를 보면서
“우리 집 망신은 요놈이 다 시키누나.”
엄마를 깔깔 웃으며 모과 봉지를 집어든다
큰소리치면서 작은 것 잡아먹는
상어나 문어는 나는 싫다아
잘생기고 커다란 과일도 싫다아
꼴뚜기와 모과가 나는 젤이다아
오늘 오가혜 그림일기는 이만 끝
아버지는 어린 나를 업고 가실 때 꼭 엉덩이를 간질였다. 내가 대여섯 살 때 일이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짐짓 뒷산에 걸친 구름 쪽으로 시선을 돌리시면서 중지로 내 똥꼬를 콕콕 긁으면 나는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만 그만” 하면서 자지러지곤 했다. 아버지는 종종 나에게 어깨 안마를 부탁했는데 아버지 등에 업혀 두드리는 안마가 제일 시원하다고 하셨다. 명절 때는 동네 어른들이 다 모여 화투를 쳤다. 아버지의 패는 늘 안 좋았고 화투판에 술잔이 몇 순배 돌면서는 말싸움이 일어나기 십상이었다. 어떤 날은 서로 멱살잡이까지 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패들과는 섞이기 싫다며 슬쩍 내 손을 잡아끌었다. “돈 많이 잃었어 아부지?”라고 물으면 껄껄 웃으셨는데 그런 날은 엉덩이를 간질이지 않고 툭툭 치기만 하셨다. 가로등도 전기도 없는 동네였지만 보름달만으로도 길이 훤했던 밤이었다. 나는 아주 자그맣고 빼짝 마른 아이였다. 헌데(부스럼이나 종기 피부병의 일종으로 영양결핍이 주원인)투성이였고 다래끼를 달고 살았다. 생후 어떻게 될지 몰라 출생 신고도 늦추었다는 얘기는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었다. 어머니는 틈틈이 몸에 좋다는 것들을 내 입에 욱여넣어 주셨다. 밤벌레(밤나무에 사는 애벌레, 주로 장작 팰 때 나온다)나 굼벵이, 우렁이 삶은 물 같은 것이었고 심지어 살망아(살모사) 달인 물도 먹어본 본 적이 있다. 동네 사람들은 잘 안 먹는 흔한 것들이었다. 남자 어른들이 밤에 모여 육백을 쳤다면 여자 어른들은 낮에 모여 민화투를 쳤다. 판에 일정액을 개평으로 떼어 놓는데 돈이 모이면 계란을 삶았다. 동네에서 작은 산 하나 넘으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포천 우시장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양계장이 있었다. 살짝 깨져 출하하지 못하는 계란이 쌓여 있는 그곳에 삼백 원쯤 가져가면 양동이로 한가득 담아 주었다. 낑낑대고 들고 오는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고 아궁이에 불 때고 삶는 것도 내 차지였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기껏 먹고 집에 몇 알씩 싸가시고도 많이 남았다. 덕분에 나는 삶은 달걀 스물 몇 개를 한 번에 먹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농군이 아니었다. 시오리나 되는 읍내에 매일 나가셨고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셨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어머니도 모르는 듯했다. 아버지의 술자리를 따라가 본 일은 없다. 집으로 들어오는 자전거 소리가 들리면 나는 으레 쫓아 나갔는데, 내 몫으로 들고 오시는 비닐봉투 안이 궁금했을 것이다. 껌이나 사탕 몇 개일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아버지의 구령에 맞춰 열중 쉬엇, 차렷, 경례를 했고 “아부지 잘먹겠습니다”를 외쳤다. 아버지가 흡족한 웃음을 지으시면 그 밤은 대개 평온했다. 아버지는 주사(酒邪)가 심하셨다. 비닐봉투에 들어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역시 돼지갈비였다. 짭짤하고 달콤한 양념이 맛있었다. 거무스름하게 탄 뼈에는 살점이 많이 붙어 있지 않았다. 돼지갈비는 뼈 말고 고기를 주로 먹는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아버지는 술자리에서 남는 뼈를 슬며시 담아 오신 것이었다. 몸 약한 막내가 눈에 밟히셨던 것일 게다. 그게 얼마나 눈치 보이고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나중에야 알았다.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에 중풍을 맞으셨고 나는 집을 떠나 대학을 다녔다. 거동을 못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읍내 목욕탕에 가 마른 등을 밀면서는 울음을 삼킨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내 엉덩이를 간질인 것처럼 등을 찰싹거리며 “울 아부지 등짝의 때가 국수네 국수”했는데 아버지는 “그만 밀어 이놈아”하면서 자지러지게 몸서리를 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스물네 해의 한가위를 지난다. 이만큼이라도 사는 막내가 기특했는지 꿈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새벽녘에 귀가하는 골목에선 그런 아버지가 서럽고 그리워 펑펑 운 적도 있었다.
아가 아가 우리아가 햇님(달님)처럼 자라거라
그늘진 곳 아픈 마음 하나 없도록
아가 아가 우리아가 아빠(엄마) 품에 잘자거라’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내가 아이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은 자장가였다.
동물 잠옷 동물 잠옷 동물 잠옷 아빠가 선물로 사주신 동물 잠옷
동물 잠옷 동물 잠옷 동물 잠옷 슬이가 젤로 좋아하는 동물 잠옷
둘째가 자라면서는 아이에게 이 노래를 만들어 가르쳐 주었다. 이십오 년에서 삼십여 년 전에 잠시 있었던 노래들이다. 아이들에게 이 노래들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가 핀잔만 들었다. 꼴뚜기와 모과를 만든 건 그보다 오륙 년 지나서였다. “아빠 아빠 나 불량식품 사줘” 그 시절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마다 칭얼거리는 아이의 말이 하도 우스워 쫀드기를 잔뜩 사준 적은 많았으나 포장마차에 함께 간 적은 없다. 이십여 년이 지나 다시 노래를 들으며 나는 어떤 아버지일까를 곱씹어 본다. “꼭 필요한 사람은 되지 못할지언정 있으나 마나 한 놈은 되지 말자”는 어느 집의 가훈처럼, 있으나 마나 한 아버지만 아니라 해도 살 만하다. 내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큰 사람이었지만.
이 노래는 2007년 시노래운동 동인 ‘나팔꽃’이 만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 ― 교과서에 실린 시》에 〈즐거운 편지(황동규)〉,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청포도(이육사)〉, 〈배추의 마음(나희덕)〉 등과 함께 실렸다. 이 음반에는 내가 작곡한 〈낙화(이형기)〉, 〈호수(정지용)〉 등이 함께 실렸다. 노래는 ‘노래마을’의 어린이 노래 모임 ‘굴렁쇠아이들’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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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XFoFRGRt8EU?si=2mPlAFq1T9EpBiZ5



이지상 l
가수. 작곡가. 작가. 1991년 〈통일은 됐어〉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로 작품 활동 시작. 음반 《사람이 사는 마을》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위로하다 위로받다》 《기억과 상상》 《기억과 상상》 《그리움과 연애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등, 산문집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대한민국 도슨트—포천』이 있음. 시노래 운동 모임 〈나팔꽃〉 동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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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호(VOL.1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