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육근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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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인] 육근상
신작시: 줄골 장승 / 용방이 여장승 / 보살
자선시: 동백 / 불목하니임처사전상서
[시인론] 임우기 “ ‘보살심(菩薩心)의 시’, ‘시의 보살행’ ”
신작시
줄골* 장승
저렇게 흩날릴 때는
며칠 밤 꼬박 새웠다는 거다
비바람 견디며
상처만 남은 날들 쓰다듬어
눈물도 흘렸다는 거다
가지마다 화들짝 핀 꽃잎들
모두 어디로 갔나
나를 건너간 진눈깨비가
바람 소리로 운다
흙먼지 흩날리는 언덕 오시느라
많이 흔들렸을 것이다
강물도 눈두덩 붉어지도록
밤새 울었을 것이다
*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91-3
용방이* 여장승
늙은 호두나무 골목
실비집 간판이 닳고 헤진 아버지 이름처럼
시비집이라 보이네
이 아줌니 아직도 옛날은 남아 있어
김치 한 조각 물면 콧등에 땀 송송 맺히고 눈물 쏙 빠지네
목젖 훤히 보이는 웃음소리 자지러지네
나도 이제 아버지처럼 늙어서
탁자 위 막걸리 들이켜고 아는 척이면
누구시더라 누구시더라
금매 아버지 손에 붙들려
몰아치는 동지 바람처럼 들어가
그 집 엄니 바라보고 있응게 설웁더라고
무슨 말이라도 혀긴 혀야겄는디 입이 떨어지야 말이지
눈물이 뺨에 다 얼어붙고 입술 떨어지질 않어
암말도 뭇허고 내빼듯 돌아서는디
솜방맹이만 한 것들이 푹푹
강물 속으로 뛰어들더라고
그것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응게
내 처량헌 영혼인 듯 가엽기만 허더란 말시
얄궂은 옛사랑이 마주 앉아 한잔 들이켜고
매운 김치 집어 드는데 서툰 저범질 여전하시네
웃을 때마다 자글자글 붉은 입술 여전하시네
*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 468
보살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가시는 봄 아쉬우니 나드리래두 댕겨오자 허여 개태사* 들러 흩날리는 꽃 귀경허다 입 군시려워 막걸리 한잔 혔으먼 좋겄다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봐두 그 흔헌 선술집 하나 귀경헐 수 웂어 호주머니 손 집어 늫구 대웅전 뜨락 츤츤히 걷는디 유별나게 큰 눈이랑 주먹 덩어리만 헌 코랑 오물거리는 보살님 조그만 입술만 바라보다 중앙시장까지 왔슈
베름빡 기대놓은 키만 헌 양파 자루 한 망 사구 싱싱헌 표고버섯두 사구 돌돌 감어놓은 돼지곱창두 귀경허구 맷돌에 갈려 나오는 녹두가루두 귀경허구 해바라기 씨앗 호떡 한 컵씩 받아들구 주차장으로 가는디 개태사에서 뵌 보살님이 말린 고사리 한 줌 놓고 난전에 흩날리고 있었겄다
눈 뗄 줄 모르고 따라오던 각시가 홀린 듯 보살님 앞으로 다가가 한참 바라보다 이제 쪼그리고 앉어 손짓허여 비틀비틀 양파 자루 내려 놓는디 이것도 전부 계산허라는 것 아니겄는가 양파두 무거운디 쩌어그 주차장까지 오티게 가라구 이걸 다 쓸어 담으라는겨 투덜거리니 사내가 말린 고사리 한 주먹이 무거우먼 얼마나 무겁겄소 성을 냅디다
보소 이 아줌니가 마흔 넘어 아들 하나 보았다는디 얼마나 기가 멕혔겄어 그 기가 멕힌 것을 니 살 때 슬명절 쇨랴구 장보러 나왔다 바루 이 자리서 잃어 버리구 여적 찾으러 돌아 댕기다 인자 다리두 아프구 허리두 아퍼 이 자리 앉어 있으먼 돌아오겄지 돌아오겄지 저 아줌니 마른 손목 같은 고사리 내다 파는 거 내가 사주야지 누가 사줘 주머니 뒤적거려 말린 고사리 품삯 만들어 내는디
삼십 년 전에두 노을은 오늘처럼 벌겋게 물들었겄쥬 나두 인자 저렇게 늙었겄쥬 컴컴해지는데 그때는 노을이 보였어야 말이쥬 정신이 있었어야 말이쥬 연분홍 복숭아꽃 한 잎 엄니 찾아온 듯 앞자락 파고듭디다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자선시
동백
1
베까티 누구 오셨슈
잣나무 가지 흔드는 밤 언 강 건너 늬 아부지 오셨나 보다 흩날리는 눈발 바라보며 흐릿한 전등불 바라보며 엄니는 타개진 바짓가랭이 꿰매며 혼잣말이시다 틀니 빼어놓았는지 뜯어낸 실밥 오물오물 머리에 얹고 방문 열어 먼 데서 오시는 눈발 바라보다 덜그럭거리는 정짓문 바라보다
동백은 칼바람 부는 밤 새끼를 낳았구나 울타리 벌겋게 핏덩이 낳아놓았구나 아이구 장허다 장혀 쓰다듬어 바라보는 대청마루에 눈발도 잠시 쉬어 간다
2
동담티 넘어가는 동짓날 밤 마른 눈 흩날린다 이 고개 넘으먼 북에 식솔들 두고 내려와 홀로 지내는 노인 산다지 신세가 나와 같아서 산오리 몇 마리랑 손꼽아 기다리며 산다지 북청 얘기만 나와도 눈 반짝거려 이런 밤 우리 오마니는 국수를 밀었어라우 눈길 밟으며 떠오신 동치미 국물에 국수 말아 끌어 올리먼 오마니 잔주름 같은 밤이 자글자글 깊어갔어라우 오마니 우리 오마니 영영 오지 않는 아바이만 불렀어라우
베까티 누가 오셨슈
3
마른 눈 흩날리는 밤 누가 오신 듯 개가 짖는다
아버지 오셨다 간 듯 휘어지는 동백 가지 컹컹 짖는다
불목하니임처사전상서
절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산세가 마치 닭발처럼 생겼다는 계족산(鷄足山) 암자(庵子) 산 적 있지요 이른 봄이라 찬바람 불고 계곡 따라 걸으면 얼음을 문 황톳길이 바스락 소리로 자지러졌지요 거기서 무얼 깨우치거나 남겨진 공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 바퀴 돌고 들어와 뜯긴 문풍지나 바르고 감잎차 마시며 잘그랑거리는 풍경 소리 듣는 게 전부였는데요
산짐승 한 마리 울지 않아 적막도 소음인 듯 진눈깨비 대신하는 오경(五更) 무렵이었을까요 잠 깨어 뒤척이다 소주병 꺼내 뚜껑을 살짝 비튼 것인데요 기지개 켜듯 따닥! 뼈마디 소리 어찌나 듣기 좋던지 이게 그 어렵다는 해탈인가 싶더라고요 더듬거려 찻잔에 쪼르륵 따르던 맑은 소리는 해탈 스님 법문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 소리 하도나 듣기 좋아 처사님 꼬드겨 해가 중천일 때까지 술 따르다 큰 스님께 한 소리 듣고 쫓겨난 것인데요 싸리꽃은 얼마나 무심하던지 잘 가라 인사 한마디 없더라고요
사러리 살다 다 잃고 들어와 불목하니로 사는 게 그렇게 좋다던 임 처사 방에 몹쓸 병 하나 두고 왔는데요 요즘 어떠세요 까닭 없이 우는 문풍지 소리 뒤로하고 계곡에 피던 벽자색 싸리꽃은 여전히 울렁거린다며 징징대고 있겠지요
육근상 l
1990년 《삶의문학》 등단. 시집 『절창』 『만개』 『우술 필담』 『여우』 『동백』, 시선집 『가래울 - 정본 육근상 시집』이 있음. 〈오장환문학상〉 수상.
시인론 / 임우기
‘보살심(菩薩心)의 시’, ‘시의 보살행’
— 육근상 시의 한 특성
詩란 무엇인가? 이 문학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대해 동서고금에 걸쳐 설왕설래가 많다. 이 단평에서 그 정답을 찾기 어려운 건 물론이다. 마침 올해가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이 세상에 빛을 본 지 백 주년이 되는 해이니, 육근상 시인의 시편들에서 이 땅의 유서 깊은 대승불가의 “참다운 시란 과연 어떤 시를 말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본다.
만해 시집 『님의 침묵』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수록된 명시들 중 한두 시구쯤은 모두 마음에 새기고 있을 듯하다. 이 자리에서 『님의 침묵』을 낳게 한 이 땅의 대승 불교 전통, 특히 ‘보살행’ 혹은 ‘보살심’, ‘보살도’ 등에 대해 길게 설명하거나 구체적 시 분석을 하며 따로 해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많은 저명한 비평가들, 국문학자, 학승(學僧) 여러분께서 충분한 해설을 해 놓았을뿐더러 한국인은 누구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대강이나마 시집 『님의 침묵』은 ‘보살’ 정신과 대승불교 사상이 깊고도 고결한 시 정신 속에서 녹아든 명작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집 『님의 침묵』이 이룬 한국 시사에서의 기념비적 성과에도, 만해 시편들이 보여주는 ‘보살심’의 시적 은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점은, 『님의 침묵』의 경우, 계율에 따라 시를 독해하는 독자(혹은 비평가)의 안목이 과연 ‘보살심을 다룬 詩’의 참다운 경지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보살도’를 닦는 보살계(菩薩戒)의 시적 은유들이 빛나는 만해 시를 계율의 심오한 이치를 앞세워 시적 성취 여부를 평가하는 것은 자칫 종교와 문학 간의 상생 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 사실, 인식론 차원에서 종교 및 그 철학적 관점이 아무리 높은 경지를 가리킨다 해도, 그 종교 사상적 계율이 가르치는 이치 혹은 진리만으로는, 시의 진정한 성과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계율에 편향하는 문학 창작은 보살심의 실천행, 곧 ‘저잣거리의 중생과 더불어 삶’이라는 ‘보살행’의 시적 성취를 장담할 수는 없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보살심 또는 보살도는 ‘파계(破戒)’를 통해서 보살행의 참뜻이 드러나기도 하고, 이를 반증이라도 하는 듯이, 이 땅에는 보살도를 실천하기 위한 ‘파계(또는 파계승)’의 옛 고사들이 수두룩하게 전해온다. 요컨대, 이러한 계율(戒律) 편향에 대한 반성적 관점이 새로운 ‘보살심(菩薩心)의 시학’을 위해선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단순화시킨 비유이지만, 만해의 시가 높은 정신 혹은 지성(知性)의 작용으로 ‘보살심’을 깨달은 탈속(脫俗)의 ‘게송(偈頌) 시’에 가깝다면, 여기에 소개하는, 충청도 지방의 시인 육근상의 시는 ‘온몸으로 보살행’을 찾는 세속의 ‘생활 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진정한 보살심’의 경지에서 보면, 이 만해와 육근상이라는 두 시인이 각자 쓴 ‘보살행’의 시편들은 서로 내용이 크게 다름에도 그 품은 뜻은 같음, 곧 회통(會通)의 차원에서 서로 깊이 연관된다. 원효(元曉, 617~686)에 따르면, 회통(會通)은 “글이 서로 다른 것을 通해서 義가 서로 같은 것에 맞추는[會] 것”이다. 만해의 보살심의 시와 육근상의 보살심의 시가 내용이 각각 딴판이더라도 그 시적 존재의 진실과 그 대의에서 서로 통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보살심의 시’의 참뜻을 구해야 한다. ‘회통의 시 정신’이 다다른 궁극의 진리는 한마디로, ‘보살심과 중생심은 둘이 아니다(不二).’는 것이다.
육근상의 시는 산중(山中)의 보살심을 모르는 척, 저잣거리에서 투박하고 질박한 중생의 삶을 애써 품는다. 그리고 중생의 고단하고 괴로운 삶에서 풍성한 보살심을 더듬어 찾는다. 적어도 육근상 시에서 ‘보살’이 등장하는 시편은 ‘절간의 보살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계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파계까진 아니라도 저잣거리에서 중생들과 함께 ‘놀이’를 하던 신라 때 큰 스님 원효를 상상하게 만든다. 원래 보살심이란 저잣거리의 ‘중생심(衆生心)’에 있는 듯이. 육근상 시는 중생들의 구체적 애환 속에서 에둘러 보살심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저잣거리의 투박한 언어가 어떻게 보살심을 드러낼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시 「보살」을 보자.
가시는 봄 아쉬우니 나드리래두 댕겨 오자허여 개태사 들러 흩날리는 꽃 귀경허다 입 군시려워 막걸리 한잔 혔으먼 좋겄다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봐두 그 흔헌 선술집 하나 귀경헐 수 웂어 호주머니 손 집어 늫구 대웅전 뜨락 츤츤히 걷는디 유별나게 큰 눈이랑 주먹 덩어리만 헌 코랑 오물거리는 보살님 조그만 입술만 바라보다 중앙시장까지 왔슈
베름빡 기대놓은 키만 헌 양파 자루 한 망 사구 싱싱헌 표고버섯두 사구 돌돌 감어놓은 돼지곱창두 귀경허구 맷돌에 갈려 나오는 녹두가루두 귀경허구 해바라기씨앗 호떡 한 컵 씩 받아들구 주차장으로 가는디 개태사에서 뵌 보살님이 말린 고사리 한 줌 놓고 난전에 흩날리고 있었겄다
눈 뗄 줄 모르고 따라오던 각시가 홀린 듯 보살님 앞으로 다가가 한참 바라보다 이제 쪼그리고 앉어 손짓허여 비틀비틀 양파 자루 내려 놓는디 이것도 전부 계산허라는 것 아니겄는가 양파두 무거운디 쩌어그 주차장까지 오티게 가라구 이걸 다 쓸어 담으라는겨 투덜거리니 사내가 말린 고사리 한 주먹이 무거우먼 얼마나 무겁겄소 성을 냅디다
보소 이 아줌니가 마흔 넘어 아들 하나 보았다는디 얼마나 기가 멕혔겄어 그 기가 멕힌 것을 니 살 때 슬명절 쇨랴구 장보러 나왔다 바루 이 자리서 잃어 버리구 여적 찾으러 돌아 댕기다 인자 다리두 아프구 허리두 아퍼 이 자리 앉어 있으먼 돌아오겄지 돌아오겄지 저 아줌니 마른 손목 같은 고사리 내다 파는 거 내가 사주야지 누가 사줘 주머니 뒤적거려 말린 고사리 품삯 만들어 내는디
삼십 년 전에두 노을은 오늘처럼 벌겋게 물들었겄쥬 나두 인자 저렇게 늙었겄쥬 컴컴해지는데 그때는 노을이 보였어야 말이쥬 정신이 있었어야 말이쥬 연분홍 복숭아꽃 한 잎 엄니 찾아온 듯 앞자락 파고듭디다
-「보살—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전문
시의 부제와 내용을 보아, 시적 화자는 아내와 함께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고찰(古刹) ‘개태사’에 구경 왔다가 “호주머니 손 집어 늫구 대웅전 뜨락 츤츤히 걷는디 유별나게 큰 눈이랑 주먹 덩어리만 헌 코랑 오물거리는 보살님 조그만 입술만 바라보다 중앙시장까지” 오게 된 사정이 이 시가 나오게 된 꼬투리다. 보살님을 따라온 ‘중앙시장’은 서민들의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삶의 터전이고, 예의 보살님이 삼십 년 전에 마흔 넘어 얻은 ‘네 살 된 아들’을 잃어버리고 여태껏 그 아들을 기다리는 ‘옛 저잣거리 그대로’다. 이 늙은 보살님의 기막힌 사연을 시인은 ‘각시’(아내)의 목소리를 빌려, ‘사설 투의 소리’로 적는다. “보소 이 아줌니가 마흔 넘어 아들 하나 보았다는디 얼마나 기가 멕혔겄어 그 기가 멕힌 것을 니 살 때 슬명절 쇨랴구 장보러 나왔다 바루 이 자리서 잃어 버리구 여적 찾으러 돌아 댕기다 인자 다리두 아프구 허리두 아퍼 이 자리 앉어 있으먼 돌아오겄지 돌아오겄지 저 아줌니 마른 손목 같은 고사리 내다 파는 거 내가 사주야지 누가 사줘 주머니 뒤적거려 말린 고사리 품삯 만들어 내는디”
저자에서 잃어버린 어린 자식을 기다리며 삼십 년이 넘도록 같은 저잣거리에서 좌판 행상을 하시는 늙은 어머니의 지극한 마음에서 시적 화자(persona)는 ‘보살심’을 본다. 이 보살심과 함께 시를 쓴 시인조차도, 시를 읽은 독자도 ‘알게 모르게’ 이 시에 은폐된 신기가 은연중에 전이되기도 한다. 독자는 이 지극한 어머니 마음에서 ‘개태사 석조삼존여래입상’의 은미한 그림자를 엿보기도 하거니와, 이는 이 시가 지성(至誠)의 모심(母心)에서 보살심의 경지를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꿔 말해, 세속의 지극한 중생심과 보살심은 둘이 아닌 것이다. 지성(知性) 너머의 지성(至誠)이 보살행의 길이다.
2
종교는 계율을 따라 교화(敎化)를 꾀하지만 문학은 삶을 따라 조화(造化)를 꾀한다. 교리를 교조적으로 따르는 언어를 시인이 따를 필요는 전혀 없다.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시의 근원은 공(空)이고 무(無)이면서도, 참된 시는 ‘생기가 내재하는 생령(생명)’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니, 시인은 시인됨을 위한 수행 정진 속에서 시어는 시인도 ‘알게 모르게’ 문득, 슬그머니, 나타나기 일쑤다.
대승불교의 언어철학에서는, 논리적인 의미 전달의 언어인 ‘문어(文語)’는 실체가 없는 가상(假相)의 언어로서 부정되고, 세속 세상의 말이 내는 ‘소리’의 음운굴곡(音韻屈曲)이 지니는 ‘소리의 차별성’이 차별적 의미를 전달하는 실상(實相)의 역할을 한다고 가설(假說)한다. 물론, 이 대승불가에서 말하는 ‘가상’과 ‘실상’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가상 외에 실상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곧 마음 외에 일체가 공(空)임을 깨치게 하려는 임시방편적 개념이다.
언어의 근원에서 보면, 언어와 일대일로 상응하는 고정된 실체로서 개념은 부정[空]되기 때문에, 결국 언어는 실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상의 비유’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마음의 작용에 따르는 비유’ 즉 ‘의어(義語)’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연기(緣起)’에 따라 가상의 비유에서 가상의 비유로, 이와 함께, 순도 높은 ‘말소리의 음운굴곡’에 따라 이어지는 것이 언어 행위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보살행’을 대표하는 신라 때 큰스님 원효도 불가의 언어의식인 ‘의어’에 대해 깊이 통찰하였듯, 불가의 언어관에서 보면, ‘가상의 비유’로서 진리를 표현하고 ‘실체 없는 소리의 음운굴곡’이 진리를 전달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불가에서 언어는 그 자체가 공성(空性)이므로, 교리의 원칙에서 보면 공성을 전제로 한 연기(緣起)의 언어가 ‘가상의 비유’로서 표현되고, 따라서 진리를 전하는 방편으로서 언어(義語)는 언어가 지시하는 뜻과 소리의 진위(眞僞) 여부를 떠나 궁극에서는 ‘중도(中道)’의 경지를 찾게 된다. ‘중도의 언어’는 의미 언어와 청각적 소리 언어를 가지고 합리적인 ‘중간’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관습적 의미 언어(개념)와 세속적 소리 언어 감각들을 여의되, 언어의 근원인 공성(空性)을 터득하며 ‘가상의 비유’를 구하는 가운데 ‘소리 언어’가 본성적으로 지닌 변형과 굴절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언어를 추구하는 수행 정신은, 만유가 내는 ‘소리’(음운굴곡)의 차별성을 터득하는 근원적이고 활연한 언어 정신이 필요하다.
육근상 시인은 타고난 고향어(故鄕語)이자 자연어인 ‘충청도 방언’을 기본 질료로 삼아 순도 높은 ‘소리 시’의 형상(形狀)들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출난 ‘시적 재능’이다. 위에 예로 든 시 「보살-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에도 육근상 시 특유의 충청도 방언들이 ‘놀이’하듯이 익살스럽지만, 충청도 방언이 능란한 사설 투의 시 「불목허니임처사전상서」는 절간에서 일하며 더부살이하는 ‘불목허니’(‘負木’의 방언)가 절에서 쫓겨나기까지의 사연을 사설하는 청승이나 해학의 솜씨도 상당한 수준이다. 특히, ‘보살심과 중생심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시 정신은 저잣거리의 ‘놀이’, ‘익살’의 형식들을 ‘시’ 안에 ‘모시게[侍]’ 한다. 그리고, 이 시편들에서 ‘말소리’가 나타내는 익살스런 화용(話用)의 감각과 ‘말놀이’가 잔잔하게 일으키는 천진난만한 기운이 감지된다. 여기서 서민들의 애환과 질박한 세속 언어를 깊이 헤아리며 ‘소리 시’로서 승화시키는 시인의 속 깊은 시심 — 시를 향한 지극한 마음(至心) — 을 엿볼 수 있다.
절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산세가 마치 닭발처럼 생겼다는 계족산(鷄足山) 암자(庵子) 산 적 있지요 이른 봄이라 찬바람 불고 계곡 따라 걸으면 얼음을 문 황톳길이 바스락 소리로 자지러졌지요 거기서 무얼 깨우치거나 남겨진 공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 바퀴 돌고 들어와 뜯긴 문풍지나 바르고 감잎차 마시며 잘그랑거리는 풍경소리 듣는 게 전부였는데요
산짐승 한 마리 울지 않아 적막도 소음인 듯 진눈깨비 대신하는 오경五更 무렵이었을까요 잠 깨어 뒤척이다 소주병 꺼내 뚜껑을 살짝 비튼 것인데요 기지개켜듯 따닥! 뼈마디 소리 어찌나 듣기 좋던지 이게 그 어렵다는 해탈인가 싶더라고요 더듬거려 찻잔에 쪼르륵 따르던 맑은 소리는 해탈스님 법문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 소리 하도나 듣기 좋아 처사님 꼬드겨 해가 중천일 때까지 술 따르다 큰 스님께 한 소리 듣고 쫓겨난 것인데요 싸리꽃은 얼마나 무심하던지 잘 가라 인사 한마디 없더라고요
사러리 살다 다 잃고 들어와 불목하니로 사는 게 그렇게 좋다던 임 처사 방에 몹쓸 병 하나 두고 왔는데요 요즘 어떠세요 까닭 없이 우는 문풍지 소리 뒤로하고 계곡에 피던 벽자색 싸리꽃은 여전히 울렁거린다며 징징대고 있겠지요
- 「불목하니임처사전상서」 전문
몸을 의탁하던 절간에서 쫓겨난 ‘불목허니 임처사’의 행적이 시의 줄거리를 이루지만, 사실 이 시의 숨은 주제는 ‘중생들의 수행심’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생들은 수행을 반복하지만, ‘도로(徒勞) 아미타불’이라는 것이 겉에 드러난 시의 내용이다. 불심이 동(動)한 시적 화자는 막상 절을 찾아가 ‘암자’에 살게 되지만, 암자에서도 술 탐(貪)을 이기지 못해 사단이 벌어지고, 애꿎게도 ‘불목허니 임처사’가 절간에서 쫓겨난다. 이 시 내용에서 시적 화자의 의뭉함과 함께 골계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 독자는 웃게 되지만, 웃음도 잠시, ‘불목허니 임처사’가 안스러워진다. 이때 독자는 시적 화자(persona)의 성격이 궁금해지고 의심스러워진다. 무엇보다, 시적 화자와 임처사는 세속과 절간을 분간하지 못하는, 곧 사리분별이 없는 성격인 듯이 보이면서도, 특히 시적 화자의 능청 떠는 성격을 읽게 된다. 시 첫 연에서, “절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산세가 마치 닭발처럼 생겼다는 계족산(鷄足山) 암자(庵子) 산 적 있지요 (……) 거기서 무얼 깨우치거나 남겨진 공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 바퀴 돌고 들어와 뜯긴 문풍지나 바르고 감잎차 마시며 잘그랑거리는 풍경소리 듣는 게 전부였는데요”에선 의뭉 떨기 또는 능청 떨기 수준이 보통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 의뭉한 능청 속에서 청승의 형식을 드러내는 시적 재능은 비상하다. 이 시에서 특유의 청승 떨기가 속세와 절간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비승비속의 마음 상태 속에서 드러나는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시적 화자는 세속에서 자질구레한 탐욕심을 떨치지 못하는 중생임에도 보살심을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깨달음의 길이 아득할 수밖에 없는 중생의 형편이지만, 시적 화자가 산사(山寺)를 찾아 자연의 소리들, 가령 “얼음을 문 황톳길 바스락 소리에 자지러졌다”고 적으면서 절간의 “잘그랑 거리는 풍경소리”를 병치하는 시적 감수성은 시적 화자가 비상한 마음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도무지 나오기 힘든 시적 표현이다. 수행처인 ‘암자’에서도 ‘술병’을 찾는 걸 보면, 시적 화자는 보살심과 중생심이 서로 뒤섞인 채인 비승비속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비승비속의 중생심을 ‘가상의 비유’(진실한 ‘비유의 언어’)와 ‘소리 언어’의 형상을 통해 표현된 점이다. 이 시가 품은 시적 진실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일어난다. 수행하는 마음(修行心), 곧 ‘보살심’의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면, 중생의 언어와 보살의 언어는 둘이 아닌 것(不二, 正覺)이다. 그러하기에 산중의 ‘암자’와 세속의 ‘저자’가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이 시의 화자가 서술하는 능청과 청승을 낳게 하는 동기(動機)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드러나는 시적 화자의 청승 떨기는 보살심이 산중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저잣거리의 중생심 속에 보살심이 서로 인접(隣接) 관계에 있거나 서로 아이러니[反語] 관계에 있다는 뜻을 품고있는 것이다.
앞서 불가의 언어관에 대해 잠깐 설명한 것처럼, 이 시의 진미(眞味)는 자연어(自然語)인 방언의 ‘소리’ 혹은 속세의 ‘소리’들이 그 자체로 ‘진리(보살심)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언어관과 관계가 깊다. 그 진리를 지향하는 언어관의 요체는, 세속의 말소리와 천지간 자연의 소리는 스스로 진리와의 ‘반어적(反語, 空性)’ 연관성(緣起性)을 깊이 품고 있다는 것이다. 육근상 시의 시적 화자(persona)의 특성으로 지목되는 뛰어난 방언 구사 능력과 특유의 충청도 기질을 반영하는 듯한 ‘능청’ ‘청승 떨기’에는 세속에서 중생들이 내는 온갖 ‘소리’ 감각들이 동시에 생생하게 살아남으로써, 시 「불목허니임처사전상서」는 세속적 의미에 대한 ‘가상의 비유’와 진리를 향한 ‘소리’가 둘인 듯 하나인 듯 서로 인접 관계에 있게 된다. 이러한 ‘소리 시’ 형식은 그 자체로서 진실한 언어(義語)의 경지를 향하게 된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이 시는 세속에서 습관적인 ‘인위의 말소리’가 보살행의 수행심을 통해서 나오는 ‘무위의 말소리’와 어울리며 조화(造化)의 ‘소리 기운’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소리 시’의 매력과 참뜻이 찾아지는데, ‘소리’의 존재를 깊이 곱씹고 음미하면서, 아래 시구를 경청할 이유가 있다.
“거기서 무얼 깨우치거나 남겨진 공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 바퀴 돌고 들어와 뜯긴 문풍지나 바르고 감잎차 마시며 잘그랑거리는 풍경소리 듣는 게 전부였는데요 (……) 산짐승 한 마리 울지 않아 적막도 소음인 듯 진눈깨비 대신하는 오경(五更) 무렵이었을까요 잠 깨어 뒤척이다 소주병 꺼내 뚜껑을 살짝 비튼 것인데요 기지개켜듯 따닥! 뼈마디 소리 어찌나 듣기 좋던지 이게 그 어렵다는 해탈인가 싶더라고요 더듬거려 찻잔에 쪼르륵 따르던 맑은 소리는 해탈스님 법문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 소리 하도나 듣기 좋아 처사님 꼬드겨 해가 중천일 때까지 술 따르다 큰 스님께 한 소리 듣고 쫓겨난 것인데요 싸리꽃은 얼마나 무심하던지 잘 가라 인사 한마디 없더라고요”
이 시에서 ‘불목허니 임처사’가 절간에서 쫓겨나는 해학적 이야기를 가리켜서 불교의 세속화 또는 현실불교의 자비없음을 거론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시 읽기는 부차적이고 표피적이다. 이 시가 품고 있는 속 깊은 주제 의식은 따로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중생심’ 속에서 ‘보살심’을 구하는 것, 더 뜻깊은 주제의식은, ‘시와 보살’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다. 이 시는 겉으론 ‘암자의 계율’이 풍자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시의 심층에선 ‘시의 계율’도 풍자 대상이 되어 있다. 이 시는 스스로 관습적 ‘의미 언어’를 반성하고 자연의 소리를 포함한 ‘소리 언어’들을 통해 세속적 시 쓰기를 극복하려는 시 정신이 역력하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衆生’인 시인 존재)도 스스로 시인됨(보살심)의 ‘반어적’ 존재로서 ‘시인’이란 존재의 의미를 깊이 반성하는 한편, 시적 화자가 쓰는 시어들은 ‘스스로 저절로’ 만유(萬有)가 내는 ‘소리(음운굴곡)’의 차별성을 나타내며 보이지 않는 조화의 기운에 연결되는 듯이 느껴진다. 이는 이 시가 스스로 특별한 ‘조화(造化)의 기운’에 감응하는 계기를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조화의 기운에 접하는 시적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 시를 낳은 육근상 시인이 시 쓰기를 위한 수심정기(修心正氣)에 성실함을 증거한다. 이 점을 미루어 따져보면, 이 시의 시적 화자가 괜스레 ‘암자’를 찾은 게 아니다. 시인이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수행’의 상징적 공간이 ‘암자’이기 때문이다.
본래 시인에게는 절이건 집이건 수행처가 아닌 데가 없는 것이니, 절간도 시의 수행처요 세속도 시의 수행처일 따름이다. 이 시에서 “잘그랑거리는 풍경소리” “산짐승 한 마리 울지 않아 적막도 소음” 특히, “소주병 꺼내 뚜껑을 살짝 비튼 것인데요 기지개켜듯 따닥! 뼈마디 소리 어찌나 듣기 좋던지” 같은 청승과 익살은 세속이건 자연이건 절간이건, 무릇 들려오는 만유의 소리들 저마다의 차별성의 비유이면서 아울러 ‘가상의 비유’로서의 시의 진실을 찾는 ‘소리 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소리 시’는, 의미와 주제를 쫓는 ‘문어’의 벽을 마침내 허물고, 만유가 내는 저마다의 음운굴곡의 차별성들이 조화(造化, 곧 ‘無爲而化’)의 한 기운으로 생생(生生, 낳고 낳는!)한, 곧 주객 유무 뜻/소리 가상/실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화의 시’를 향한다. ‘소리 시’의 달인(達人)은 만유가 내는 제각각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를 통해 시어의 관습적 의미를 넘어서고 ‘소리’가 스스로 세속적 의미를 변형 굴절 확장하는 ‘조화의 시’를 낳도록 정진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시인의 정성 어린 시혼 속에서 비로소 육근상 시인의 ‘보살행의 시’들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 ‘소리 시’의 진경(珍景)에 이르러, 시는 관습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 결박된 수동태의 존재가 아니라 소리의 조화 기운을 타고난 능동태의 존재로 바뀌게 된다. 바로 이때, 시는 독자 여러분 각자 ‘조화(造化)의 기운(생명의 기운)’을 주고받는 ‘조화 속의 유기체로서 시적 존재’(‘창조적 유기체로서의 예술 작품’)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보살」 「불목허니임처사전상서」 등 보살심을 화두 삼아 쓴 육근상의 명편들을 가리켜, 능동적인 기운을 지닌 ‘시적 존재’, 바꿔 말해 ‘시의 보살행’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생들의 생활 속 감각에 익숙한 ‘소리 시’의 높은 시 정신이 낳은 빼어난 시가 바로 시 「동백」이다. 시 「동백」에 대해서 이미 상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굵은 서체는 필자의 강조.

임우기 l
1985년 《삶의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평론집 『살림의 문학』 『그늘에 대하여』 『네오샤먼으로서의 작가』 『한국영화 세 감독』 『유역문예론』 『문학과 예술의 다시 개벽』 『은폐된 서술자』 『마음 귀신』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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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호(VOL.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