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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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음: 변하는 것들의 이름
● 김효숙
시인의 마음은, 알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일인칭의 주관적인 내면 작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른바 생각·(무)의식·기분·느낌·감정·의지·기억·상상 같은 것들. 이와 관련한 내면을 배제한다면 얼마나 생각을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를 만큼 시인에게 마음은 절대성을 지닌 내용이다. 그래서이겠지만 우리도 시에서 마음과 관련한 어휘를 만났을 때 막막하면서도 그만큼의 호기심으로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본질을 가려내고 싶어 한다.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도, 이미지를 그려낼 수도 없는 속성 때문에 더더욱 표현 의지를 부추기는 마음에 대한 문제는 인간 개인의 언행뿐만 아니라 예술·종교·철학·과학 측면에서도 같은 무게를 지닌다.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근접 거리에 있다고 여긴다. 떠나간 연인을 마음이 떠난 일로 받아들일 때도 마음의 원근법을 따른다. 하지만 존재적으로 가장 가깝다 하여 마음의 거리까지 거기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가까이에 놓인 하나의 사물처럼 대하는 방식은 애초에 이를 읽어내는 일에 실패를 자초한다. 사람마다 다른 마음의 독자성, 수시로 변하며 새로워지는 마음의 특성 때문에라도 이는 사물 같은 불변의 대상일 수가 없다. 사물을 변하게 하는 건 이것을 바라보거나 만지는 우리의 마음이지 결코 도처에 붙박인 사물 같은 대상일 수가 없다. 그 마음이란 것이 대체 어떤 장소를 차지하느냐는 질문, 요컨대 마음의 물리적 경향을 의문시할 때마다 이는 더더욱 잡히지 않는 답으로 남는다. 시 언어도 바로 이곳에서 발생한다. 때문에 ‘시’가 시일 수 있는 건 마음의 장소를 지정하지 못하는 인간-시인의 한계에 대한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와 철학은 어떤가. 종교는 영혼에, 철학은 마음에 관심을 두며, 거기에 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 종교에서는 영혼을 천상에 두어 절대성과 단일성을 강조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인간(Homo philosophy)이 자발적으로 실존적 성찰의 주체로 나서면서 그 영혼은 시끌벅적한 지상으로 끌어내려져 인간의 정신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그물망을 두르고 있는 내면 작용들은 불변하는 신비인 영혼과 달리 타자와의 관계성과 상대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 관한 담론 중 몸을 배제하는 사고 실험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몸에서 마음을 떼어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고 실험을 ‘생각하는 주체’라는 고유 영역에 자리매김한다. 몸을 배제하고 마음의 문제에 기형적으로 주목하는 사고 실험을 이어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지대한 관심거리인 마음-기계나 인공지능은 마음과 연동하는 기계적 성격에 대한 사유거리를 제공한다. 마음은 우리가 의식이 있는 한 존재하는 정신 작용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생각이, 기분이, 감정이 우리의 정신 영역 어딘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출처는 대체 어디일까? 그곳이 몸이냐 마음이냐는 이분화 작업으로 그 답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의 시도는 번번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마음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풀 수 없는 선천적 한계 때문이다. 더구나 마음이 신체적 속성을 함유한다는 가정하에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진다. 신체화한 정신인 마음으로 그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이 인공지능 개발로 이어지면서 현 시대인의 생활 양식은 전방위로 재편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시인에게 마음의 문제는 반드시 인공지능 문제와 연계한 고민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작용점을 지닌다. 그에게 마음은 공중에 부양 중인 열기구 같은 것이 아니다.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은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신체에 지속적으로 작용하면서 에너지의 총량을 좌지우지하고, 심지어 우리의 신체까지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 말해야 한다. 그 마음이 고정되지 않고 수시로 전변할 때 시 언어도 움직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고 보는 데카르트식 사유는 고정불변의 진리를 숭앙하는 차원이지만, 시 언어는 이와 다른 감각의 산물이다. 예컨대 인간의 발에서 “큼직하고 둥글고 하얗고 부드러”운(유주연, 「와유(臥遊)」, 《문파》, 2026년 봄) “거대한 빵” 같은 형상을 보거나, ““여름” 하고 말하면 나무가 생기고 벌레가 들끓고 수풀이 발목을 뒤덮는”(김동균, 「캘린더」, 《파란》, 2026년 봄) 감각의 착란에서 시 언어는 발생한다. 감각에 속더라도 슬퍼하지도 노하지도 않고 도리어 거기서 진실을 보아내려는 자. 자아라는 중심을 벗어나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의심 덩어리인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자. 그가 시인이다.
1. 마음으로 듣는 소리
인간은 언어 규칙이나 행위 규칙을 단일하게 통합하여 언제나 같은 판단 아래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상황 A에서 Z까지를 겪게 될 때 비교와 대조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동한다. 그만큼 우리 앞의 상황이 언제나 다양한 선택지나 다름없고 심지어 수시로 변하기까지 한다는 증표다. 변하는 마음의 원인자가 바로 그 마음이라는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요인도 여기에 있다. 타자에게는 나 역시도 타자이므로 이 세계에서 주체는 사라지고 무수한 상황만이 존재한다. 이때 눈에 보이는 것뿐 만이 아니라 귀로 들은 내용까지도 우리의 판단을 요구하는 경우가 수다하다. 귀로 듣는 소리를 놓고 그 의미를 추정해 보는 다음 시에서도 마음의 문제가 불거진다. 불규칙한 풀벌레 소리의 비-화음, 비-운율, 엇박자가 지닌 비-음악의 음악이 거기에 있다.
들려?
응. 들려. 이것은 가로로 나는 소리.
그래. 이것은 세로로 나는 소리.
음치인 것 같아. 틀림없다. 음치의 울음이야. 높낮이가 없어. 크기도 없어. 짜임새만 있다. 화음이 아니야.
있구나 음치가. 진짜로 있었어. 날개를 부비나 봐. 세로에 가로. 가로에 세로. 날개가 마모되어 멸종했다던데. 그늘 속의 그늘처럼. 어제의 내일처럼. 위장에 능한 거야.
짝짓기를 하는 걸까.
……
……
끊어졌어.
아니야. 세로에. 들어봐. 세로로 마모된 날개의 가로. 가로에. 엇박이야. 가로로 가로. 무늬가 생기고 있어. 무한연속이다. 가로로 세로
끊어질 듯이. 세로로 세로
촘촘해진다. 곱다. 거봐. 번식하고 있어.
결계를 치는 게 아닐까. 가로에 가로의 세로로. 선율을 걸러낸 소리의 소리일 수밖에 없는 청정 구역에. 모르는 가로로. 가로에 모르는 세로로. 숨으려는 거야.
고막을 치는 걸지도 몰라. 세로로 가로로로. 어둡고 큰 귀에. 어느새 깊은 귀에. 모르는 귓속에.
더듬어봐야겠어. 우리는 가로로. 가로로 세로로로. 더듬이를 세워야 했는데.
소름이었다. 소름이 돋고 있었다.
― 신해욱, 「여름의 특별한 적막」(《발견》 2026년 봄호)
풀벌레라는 타자 존재들 속에서 인간의 현실을 구성한 시다. 눈앞의 세계를 인간만으로 온전히 자발적으로 구성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시인은 소리 현상과 마음 작용의 관계를 말하기 위하여 소리의 높낮이와 수평적 확장성을 물리적인 공간에 표시하고자 감각이 예민해져 있다. 음표를 그려 넣고 각 음을 연결하면 운율이 생기는 이치처럼, 좌표를 찍듯이 이어지는 풀벌레 소리, 때로는 무음 상태까지도 채보하는 심정으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시를 읽어 나가다 보면 인간의 마음은 모눈종이 같은 포충망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풀벌레 소리가 선연히 들려오는 듯하다. 들을 수 있는 귀의 지극히 깊어지는 영역과 확장하는 영역이 마음과 연동할 때 그 포충망에 걸려드는 건 소리의 높낮이와 파장이다.
호기심의 화신인 인간은 풀벌레가 내는 불협화음에서 의미를 읽어내고 싶어 하지만 그럴수록 상대는 더 단단히 몸을 숨긴다. 캄캄한 밤중이라 보이지도 않는 세계에서 인간은 곤충의 날갯짓을 들으려는 감각을 총동원한다. 온 청력을 기울여 타자 존재들이 만든 세계에서 무언가 비밀을 캐내려는 열정으로 한마음이 된 이들의 대화는 “날개”를 지닌 곤충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저들의 생명 활동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호기심으로 충만하다. 반면에 곤충은 수평으로 확장하는 소리(“가로로로”)와, 때로는 아래로 깊어지는 소리(“세로로로”)를 내고 있다고 화자는 생각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를 자신의 청력으로 포집하고자 하는 열정의 주체들은 모눈종이처럼 촘촘한 소리 포집 망을 상상 범주에 걸어 놓았다. 때로는 “가로”로 길이를 늘이고, 때로는 “세로”로 늘어지는 거기에 어떻게든 걸려들 법한 소리의 파장에 아슬 아슬하게 감각을 잇댄 이들에게 적막을 뚫고 나오는 곤충 소리는 불규칙한 “엇박”의 의외성을 구사하는 음악 형식을 방불케 한다. 선율은 없으면서도 오직 “소리의 소리일 수밖에 없는 청정 구역에”서 차라리 침묵처럼 깊어지는 곤충의 세계. 거기에서 인간은 무엇을 들었던 것일까.
소리가 불규칙하기 때문에 다음 소리를 듣기 위해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그들은 단지 소리를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소리의 의미, 즉 기의를 산출하려는 의지를 지닌다. 하지만 그 기의는 본래 인간의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인간은 기표만 들을 수 있으나 만약 기표가 없다면 기의를 구성하는 효과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기표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것을 읽어내야만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라캉이 “기의는 기표의 효과”라고 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다.
다시 시 현실로 돌아와 보면 시적 대상은 “위장에 능한” 풀벌레들이다. 그들은 “화음”도 “운율”도 없이 오직 “짜임새” 하나로 “무한 연속”되는 엇박 속에서 “번식”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이 과정에 참여한 인간의 감각 중 청각이 우세한 건 그 타자들의 생명 활동이 소리로 전해지는 까닭이다. “날개가 마모되어 멸종했다”는 세간의 낭설을 부정하는 듯한 저들의 위장술에 탄복하는 인간의 귀에 들리는 건 불협화음 같은 소리일 뿐. “음치의 울음” 같은 소리와 “마모된 날개”를 부딪쳐 내는 소리에서 발견되는 건 가혹한 시간의 법칙을 감내하며 죽은 듯이 살아 있는 미물의 생명력이다.
구애와 번식으로 이어지는 풀벌레의 생명 활동을 저들의 소리에서 포착한 시인이 “결계를 치는” 행위라 여기는 데서 풀벌레의 소리는 마침내 하나의 기의를 얻는다. “가로로로”, “세로로로”처럼 곤충의 소리가 점점 작게 들리는 상황을 따라서 발음해 보게 하면서, 음치 같은 저들의 소리가 구애와 번식 행위인 점을 넘어 이 세계는 마음으로 듣는 소리가 충만하다는 점을 전한다. 번식 행위가 실존재의 경험적 사건이라면, 결계는 수행자의 정신 영역에 있는 경험적 사건이다. 번식과 결계 사이에 놓인 소리를 인간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에서 풀벌레의 불협화음은 청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들리는 소리, 수행에 방해가 될 만한 욕망의 원인자들과 거리를 두어 반성적 자아가 홀로 깊어지는 소리라 할 수 있다. 곤충이 풀숲으로 숨어드는 이유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작용에 따라 짝짓기이거나 결계로 달리 들린다. 타자 존재를 통하여 자신의 현실을 구성하는 인간이기에 이 모든 경험들은 언제나 타자로부터 오고, 시 세계를 세우는 건 추정과 상상을 불러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다.
2. 뒤숭숭한 마음의 정글에 반-체제적 흐름 만들기
어떤 경우에도 투명하고 순수하기만 한 의식은 있을 수 없다. 지배적인 의식의 맥락은 있을지라도 거기에 끼어들거나 말려드는 또 다른 의식이 우리의 마음을 정글로 만들어 버린다. 의식의 방향은 그중 가장 지배적인 생각이 어떤 지향성을 지니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생각은 싫으므로 떨쳐내고 싶고, 어떤 생각은 좋으므로 내내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의식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렇게 의식은 생각을 일정 부분 통제할 수 있으나 이것이 반드시 첫 생각을 뜻하지는 않는다. 무수히 다른 생각을 하던 중 명료해지는 하나의 생각이 의식의 우물을 깊게 파나간다. 무언가에 목적적으로 집중해야만 의식이 생긴다는 의미다. 마음은 다르다. 구름처럼 나타나 수시로 형태를 바꾸다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어진다. 지향성이 없는 마음에 비하면 의식은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목적적이다. 마음의 정글을 헤치고 나가리라 마음먹은 자의 탈주 의지는 아래 시에서처럼 군더더기를 키우는 일에 매몰된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 생긴다.
똑같은 장소에서
원을 따라 돌아만 갈 것인가
주어진 길을 찾지 못하고
조금도 성장하지 못하고
나아갈 방향을 완벽하게 잃어버렸다
군살이 박혀 딱딱해지고
불필요하게 덧붙어버린 살
마디마디 두드러지게
부푼 군더더기는
어느 사이 돋아난 것일까
낟알 같은 사마귀가
도도록하고 납작해진 원둘레
모든 방향 감각은
제자리에 굳어 맴돌고
아무리 곧게 펴보아도
마음속은 이미 완벽한 정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맴돌며
멈추었다는 것은
원 안에 갇혀 있다는 것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내 안의 야망을 힘껏 부풀렸다
벗어나려는 과속에 맞추어
거침없이 계속 달려 나갔다
― 구재기, 「원(圓)의 방향」(《학산문학》 2026년 봄호)
이 시의 메타포는 생각에 자신을 가둔 자의 내면이 뒤숭숭해진 상황을 피부 증상(“사마귀”)에 빗대는 데 있다. 이 무념의 존재를 빌려 삶의 방향이 원(圓)의 범주에서 끝없이 환원하는 구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출구를 틀 수 없는 마음이 그 안에서 덧나며 군살을 굳혀 가는 과정을 이미지화하여 여기에 작용하는 반동의 힘이 역설적이게도 무목적성임을 보여준다. 굳이 그 동기를 밝힌다면 “야망”이라고나 해야 할 마음의 큰 그림을 간결한 언어 형식에 담아내고 있다. 존재 자체를 마음에 “완벽한 정글”을 들이는 일로 아는 화자에게 존재와 사건(“원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삶이란 자잘한 사건들과 마주치는 일이라 할 수 있고, 삶의 시작과 끝 지점의 평면에는 그 일들이 빼곡히 배치되어 있다. 화자는 지금의 자기를 벗어나고자 하지만 자기 안의 동일자에 갇혀 “제자리에 굳어 맴”돌고만 있다. 이런 마음을 “도도록하고 납작해진 원둘레”를 지닌 사마귀 표상으로 묘사한다.
마음은 정글과 같으나 분열적 흐름을 만들지 못한 채 엉켜 있는 이 사태는 급기야 “나아갈 방향을 완벽하게 잃어버”리는 지경이 된다. 하나둘 지류를 만들어 가는 분열적 생산이 불가능한 ‘원’은 화자 스스로 그 안에 감금되는 방식으로 고착화한다. 더구나 영원히 자기 내면의 동일자로서 반복 운동을 하는 삶이란 시작이 곧 결말이라는 빤한 결과를 몰아오고,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순환하는 반복 운동 속에서 그 흐름을 탈 수 있을 뿐이다. 정글 같은 “마음”이 키우는 건 “군살”과 “군더더기”들이며, 이때 문제적인 것은 부지불식간에 돋아난 군살이 그의 살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처럼 군더더기 같은 조건과 이에 대한 감각이 반체제적 흐름을 자발적으로 만드는 계기를 안긴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모든 고정된 것들은 반동하는 힘에 의해 언제든 와해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 시를 목적 추수주의자의 상처로 얼룩진 푸념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반시대적 전쟁 기계’라는 압도적인 비유로 탈주하는 인간 유형을 말했을 때 거기에는 자기 안에 갇힌 자가 사실은 더 큰 범주의 구조에 포섭된 자라는 점을 상기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삶의 과정에 필연으로 끼어드는 사건들이 한시도 멈춘 적이 없으며, 인간 개체를 가둔 규범들에 대하여 반-체제, 반-구조, 반-시대적 전쟁을 불사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에게 분열적 생산을 가능케 하는 기계로서 역능을 발휘하게 한다. 그런 이유로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기 안의 “야망을 힘껏 부풀”리며 “벗어나려는 과속”주의를 택하지 않았을까. 구획된 것에서 탈주하는 감각으로 그의 몸-마음은 급기야 “거침없이 계속 달려나”가는 전쟁 기계로 전변한다.
이로써 우리는 마음의 문제를 실천의 문제로 전환하여 인간 개체가 지닌 남다른 “방향 감각”이야말로 자신을 보편화라는 세계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일정 범주에 갇힌 채 끝없이 도돌이표를 밟는 실행들 속에서는 보편화와 일반화가 삶의 원칙과 질서가 되고 만다. 그 삶을 구성하게 하는 건 자신의 처지를 의심하지 말고 편히 있으라며 인간 개체를 한 장소에 눌러 앉히는 세계의 폭력성이다. 여기에 분열적 흐름을 만드는 자만이 이 같은 반복 순환을 깨고 나오는 현실 원칙의 주권자일 수 있다. 모든 새로운 삶, 창조적인 일들은 탈주자의 감각에서 비롯한다.
3. 좋은 감정의 폭력성
좋은 감정이 일관되게 좋은 감정이기만 하다는 관념은 말 그대로 관념에 그치기 쉽다. 좋은 것의 해로움이나, 해로운 것의 좋음을 가늠해 볼 겨를도 없이 우리의 의식은 긍정이 아니면 부정이라는 이분법 쪽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타자의 감정과 마음을 겪을 수 없으므로 타자는 이해할 수 없는 심연이면서도 나의 주체성은 타자 경험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나의 나 됨을 지원하는 상대도 마찬가지로 타자라 말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도 타자의 마음에 공감하고자 하면서 상대를 향하여 나아가곤 한다. 그러려면 그의 마음을 읽어야 하고, 그의 욕구나 신념을 앎으로써 그가 그것에 의해 행동한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반성적 사유의 주체로서 타자를 만나는 일과 마음 읽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맥락을 지닌다. 하지만 상대의 의식이나 감정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진정한 만남은 성립되기 어렵다. 아래 시에서는 당신-되기와 나-되기를 “연습”하는 인물이 어떠한 이해의 지점으로 나아가는지를 엿볼 수 있다.
화를 내고 욕을 하는 당신과 나를 연습해 봐요
똑같은 길이의 우리를 시험해 봐요
당신이 된 나와 내가 된 당신
쓰고 나서 살 수 있는 문장과 써버린 뒤에 죽어버릴 수 있는 문장을
오디션은 이번뿐입니다
엄마, 이렇게 작은 벌레도 심장을 가졌을까
사육장 안에서 키우는 달팽이의 숨구멍 안에 하얀 벌레들이 번식했다 달팽이에게 감염을 일으키고 스트레스를 준다는 벌레를 죽이려고 달팽이를 따뜻한 물에 넣어 조심조심 움직이게 하고, 어르고 달래는 말을 해가며 벌레에게만 해롭다는 약을 반복해 달팽이에게 뿌리고
나는 너의 손을 깨끗한 물로 씻겼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벌레가 달팽이의 수명을 줄인다고
그런 벌레들을 완벽히 없애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매 순간 누구를 위협하는 벌레일까
마음과 마음이 같아지는 순간은 한 번뿐입니다
우리처럼 커다란 미움을 가진 사람이
똑같이 사랑을 포기할 수 있다고요?
괜찮습니다
죽을 만큼 좋아하는 것을 죽일 수 있는 소중한 체험의 순간은 매년 다시 돌아오니까요
그날 밤 나는 벌레가 된 내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 조혜은, 「이쿼녹스 오디션(Equinox Audition)」 부분(《청색종이》 2026년 봄호)
자신을 객관적인 바라보기의 주체로 돌려놓고 타자가 되어 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디션 장에서처럼 상황을 연극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보이고, 배역을 바꿔 연기하는 배우의 마음으로 역지사지의 관계성을 묘파하고 있다. 요컨대 자신이 중심인 세계를 정상으로 아는 관념을 도치하여 자신이 먼저 타인이 되어 보는 경험, 자신의 본모습을 타자 존재를 빌려 발견해 보자는 제안이라 할 수 있다. 타자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포개는 일이 단 일회적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을 지향하는 지극함이 읽힌다. 처음 만난 ‘당신’의 분노와 욕하기를 화자가 “연습”하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럴 때 당신의 감정은 화자에게 체화되어 그럴 만한 이유를 지닌 것으로 이해될 소지를 안고 있다. ‘나’는 나이기만 하다는 주체론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의지에서 오지만, 타자와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관계성으로 자아를 정립할 때는 자기 동일성이 깨진다. 화자는 “욕”하고 “화”내는 부정적 감정을 내면화한 채 당신에게서 나오는 그것과 자신에게서 나오는 그것을 연습하면서 나르시시즘 극복(“그러면 나는 나를 싫어할 수 있을 것 같아요”)이라는 명제를 육화한 경험으로 바꿔내고 있다.
좋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음이고, 해로움은 좋음이 구제할 수 없는 해악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 시는 타자의 욕과 화를 자기화하여 그 감정을 경험해 보고, 자신을 싫어하는 감정 연습도 해봄으로써 사랑이나 좋음 같은 달콤함은 물론이고 미움이나 절망 같은 쓰라림도 마찬가지로 인간 감정의 폐곡선임을 시사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감정의 양면성을 다음같이 전한다. 좋아하는 감정의 마법이 약자를 죽이게 하고(“다정한 손을 들어 귀뚜라미를 던지고 숨을 막았는데”), 기어이 “좋아하는 것을 죽이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일이 기이하게도 “삶을 유지”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좋음’이 폭력을 낳고, 이 감정이 점차 진화하는 문제를 짚어내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
연극적 상황이 바로 현실 무대이기도 한 시 현실에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은 똑같이 당신과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랑할 것도 더 많이 미워할 일도 없게” 하고 싶은 간절함을 “똑같은 길이의 우리”라 말하는 심리 기저에는 사랑이 아니면 미움이라는 이분법에 매인 삶을 불편해하는 감정이 실려 있다. 화자가 진정 바라는 바는 “당신이 된 나와 내가 된 당신”이며, 당신의 마음인지 나의 마음인지 분간치 못할 만큼의 질량에 깃든 삶이다. 이 문제가 비로소 글쓰기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이렇게 적는다. “쓰고 나서 살 수 있는 문장과 써버린 뒤에 죽어버릴 수 있는 문장을” 어떻게든 써내는 삶이라고 말이다. 좋음이 이유가 되어 모든 정신적 폭력까지도 용인하게 되는 삶에서 그의 문장도 시종 삶의 문제를 내면화해 온 작업이었다.
이는 글의 쓸모에 대한 발언을 넘어 글쓰기가 곧 삶이기도 한 시인의 고백이다. 그래서 ‘좋음의 폭력성’이나 ‘삶의 죽음’은 다른 표현의 같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이 점을 한 아이가 “다정한 손을 들어 귀뚜라미를 던지고 숨을 막”는 행위로 대변하는가 하면, 좋음이 이유가 되는 위협, 좋아하는 대상을 자기 안에 가두어 자신의 심신마저 폭력과 죽음에 가두는 반성적 사유를 이 시에 담아낸다. 마침내 자신이 자발적으로 당신이라는 감옥에 갇히기를 바랐음을 알기까지 반성적 자아는 몸과 마음을 분리하기 어려운 지경을 부단히 왕래하고 있었다.
4. 자괴감과 평상심 사이
‘각성된 의식’이라는 표현은 합리적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걸맞아 보인다. 마음의 혼란과 감정의 나약함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직시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대상이나 자신을 의식하는 일이 어떤 의지를 지닐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방심보다 집중에, 무관심보다 관심에 더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이 소비 시장 쪽으로 쏠려 있다면 이 이야기의 심각성은 크게 달라진다. 시장은 소비를 자극하는 곳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더구나 미디어와 결합한 광고의 스펙터클이 소비자의 심리를 압도하는 동시에 소비 심리를 끌어올리는 마케팅 전략 앞에서 합리적 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른다. 만약 있다면 그는 마음도 감정도 닫은 채 석고상처럼 일관되게 평정심을 유지할 것이다. 그만큼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미디어가 송출하는 광고 효과는 이성을 작파하고 감정에 충실한 인간형으로의 변모를 끝없이 자극한다.
불프세일/오늘의 슈퍼딜
글렌굴드 바하 평균율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을 시작할 때 듣는 곡
방해하지 마, 이어버즈를 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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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뛰지 않고 클릭/또 클릭
난 네게 반했어
물건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기 쉽지 않아
소심하게 장바구니에 담아 놓는 것으로,
결정 장애인 내게 또 화가 난다
콜드플레이의 일렉 비트에 맞춰 뛴다
끊임없이 원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절망을 쿵쿵 밟는다
무릎이 꺾일 때쯤
작고 작게 쪼개진 물방울들 너머
사랑병원 배수구 시궁창 가까이 낚시꾼들의 찌가 색색으로 예쁘다
오래 살아서 미안하다/또 한 살을 먹는다니/알롤달록한 지팡이들이/5도 살짝 옆으로 가며 앞으로 간다/지겹도록 정성스러운 인내가 삭아 간다
왜가리가 날개를 펼쳤다 접는다
장례식장만 있으면 강변에서 다 해결할 수 있는데/사랑병원, 요양병원, 장례식장, 추모관/세트 상품입니다/더 저렴한 가격으로 즐기세요
― 최미정, 「블랙프라이데이」 부분(《문학들》 2026년 봄호)
인간은 대부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불공평한 조건을 안고 태어난다. 우리의 삶에서 파생하는 문제들만 하더라도 누구나 공평하게 죽는다는 기정사실이 없는 한 풀리지 않는 난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는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준다며 꼬드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광고 앞에서 졸렬해지는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심리를 ‘마음의 이치’ 정도로 풀이한다면 지금 화자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자기 심리를 점검 중이다. “본색”을 가리고 “치장”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면 소비왕으로 등극한다는 강령이라도 따르듯이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 시대인에게 그의 행동은 많은 생각거리를 안긴다. 이는 후기 자본사회로 재편된 이래 자본만이 진리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자화상이라 해도 좋을 현상에 대한 반성적 행위로 보아도 좋을 테다. 반면에 어느새 관습이 되어 버린 자본 논리를 되새긴다는 점에서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중 인상적인 부분은 사람답게 사는 문제를 소비 차원에 한정하여 성찰하는 것을 넘어 죽음의 형식까지도 상품화하는 시대를 직시한다는 점이다. “유튜브”를 섭렵하는 중에 발견한 마케팅은 노화·죽음과 관련한 “세트 상품”(“사랑병원, 요양병원, 장례식장, 추모관”) 판매, 즉 끼워 팔기 전략이다. 살아 있을 동안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소비에 투신하라는 듯이 죽음의 형식을 곁들이는 마케팅에서 상품 판매 전략의 극단성을 보게 된다. 본래 “블랙프라이데이”는 연중 한 차례 벌어지는 대규모 할인 행사를 뜻하지만 최근에는 이를 수시로 전유하는 마케팅이 기승을 부린다는 점을 환기한다. 이때를 놓치면 손해를 본다는 식의 즉결 판단을 끌어내기 위하여 소비자의 조급증을 이용한다. 이 같은 “불프 세일”(블랙프라이데이 세일)에 더하여 “오늘의 수퍼딜”이라는 마케팅 문안이 불쏘시개가 되어주면서 소비의 화력을 급속히 피워 올린다. 단 하루, 단 한 차례, 특별한 상품이라는 차별성을 앞세우지만 이는 정작 촉박한 시간이라는 압박감 속에서 소비자의 판단력이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일 뿐이다.
이렇게 고민할 틈을 주지 않고 즉결 결재로 이어지도록 심리를 조작하는 마케팅 전략에 음악 듣기로 대응하는 화자의 감정 조절 방식은 소비적 자아와 거리를 두려는 전략이라 해야 할 것이다.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글렌굴드 바하 평균율”을 들어 보지만, 광고의 배경 음악인 “콜드플레이의 일렉 비트”는 화자의 허기를 정확히 짚어 알려준다. 바라는 것이 많을수록 “절망”도 깊어진다는 아포리즘을 말이다. 그러나 좌절은 얻고자 하는 욕망의 크기만큼이라고 전하는 노래 가사보다도 더 문제적인 것은 번번이 “결정 장애”를 앓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광고의 “과도한 아첨”과 자신의 “인내”가 대치하는 국면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그에게 평상심과 안정감을 안길 수 있을까. 화자가 자괴감을 앓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사촌”이 어떤 아이를 때린 일에서 주어진다. 친모가 아닌 화자의 엄마가 대신 학교로 불려가 “창피”와 부끄러움을 감내해야 했던 일화를 통화여 화자는 자괴감이 단지 자기 내면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사회화한 개인의 심리인 점을 발견한다. 여하한 감정이 가로지르는 와중에도 자괴감이 끝까지 남아 있다면 “불프세일”과 “오늘의 슈퍼딜”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감을 안기면서 시인은 소비왕 등극에 실패한 이의 심리를 해부해 보고 있다.
5. 마음을 읽는 마음
의지는 변하지 않을 수 있으나, 감정은 전변하면서 이전 것을 덮어쓰고, 잊고, 새로워지기까지 한다. 타자와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면 그때는 양자 간 의지가 합치하는 지점이 있었을 것이며, 타자와 나누었던 사랑이 식었다면 의지로 굳힐 수 없는 감정이 지배적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사랑의 약속은 불가능에 대한 약속이며, 사랑이 유지되고 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과 약속이라는 의지 중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쏠리지 않도록 평형을 유지하는 마음 씀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일 테다. 그래서 시인은 한마음을 간수 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설령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일어날 법한 변동성 쪽으로 더 관심이 간다. 관람하듯 바라볼 수 없는 타자의 마음이 시의 소재로, 철학의 주제로, 과학의 연구 과제로 부단히 호출되는 되는 것도 이런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중에도 시인의 부름을 받은 마음은 철학이나 과학과는 다른 진폭 안에서 미적으로 해부된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 마음의 일치점을 찾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마음 현상은 어느 시인도 예외일 수 없는 상상력의 펌프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시는 인간 감정의 흐름을 읽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시인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소리를 귀에 담아 상황을 추정하고, 또 다른 시인은 자아에 갇힌 채 군살만 키우는 마음의 해방을 위하여 드디어 탈주를 감행한다. 좋은 감정도 의심해 보는 시인은 좋음 때문에 깊어져 어느새 관습이 되어버린 폭력성을 발견했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광고에 어느새 저당 잡혀 버린 마음을 발견한 시인은 자괴감이야말로 파행적인 소비 심리에 대응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마음의 파장과 파고에 대한 성찰은 시인에 이르러 마음의 허기에서부터 과잉까지, 무의식에서부터 의식까지를 두루 관류하는 시 쓰기로 구현된다.
지금 시대는 인문학 영역인 문학·사학·철학 담론만으로는 이 세계의 변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과학주의의 흐름이 거세어진 배경을 첨단 기술력의 급진전, 이에 따라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는 에피스테메에서 찾을 수 있다. 문학과 역사가 나란히 한 시대를 증명했던 우리 문학의 성과는 이제 문학과 과학기술의 상호 조응으로 급속히 변화하는 중이다. 고전적 사학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신생의 과학 담론이고, 이에 따라 삼각 구도도 문학·과학·철학 담론으로 재편되어 가는 듯 보인다. 작가의 상상력도 역사적이냐 과학적이냐에 따라 작품 경향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마음에 관한 담론의 진전 상황을 보더라도 이 같은 변화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마음의 내면에 집중하는 내성심리학이 신뢰를 잃은 후 행동주의(내면세계는 없다고 보고 오직 행동을 관찰하는 경향)가 출현했다. 이후 기능주의(마음을 컴퓨터의 입출력 기능으로 이해하는 경향)가 대두했고, 지향성(대상에 관한 어떤 성질로 이해하는 경향) 이론을 거쳐 1990년대에 이르자 의식 연구가 비로소 진지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1) 이는 자연주의와 물리주의 관점이 우세해진 시대를 반영한다는 의미가 있다.
시는 어떤가. 이전 시대에는 “내 마음은 호수요”(김동명, 「내 마음은」)라는 은유로 자연화한 마음을 내성 심리 측면에서 묘파했다. “구렁이같이 태연하게 앉아서 / 마음을”(김수영, 「휴식」) 쉬는 또 다른 시인은 자신과 역사까지도 속이고 있다는 ‘회피’의 감정을 기만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지향성을 보인다. 이 시대의 시인들에게 내재한 무수한 마음의 분파들마다에서 달라지는 감정은 남다른 말에 실려 우리에게 온다. 이전에 자연에 빗대었던 인간 마음의 도덕률은 이제 합의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깨져 나가면서 분열체가 된다. ‘마음 관리가 곧 감정 관리’2)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마음의 지배력을 이중감정 탓으로 돌리며 얼마간의 자유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수시로 전변하는 것의 이름을 마음이라고도 감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건 여기에 연유한다. 그렇다면 외부 사물에 반응하며 시시각각 변덕스러워지는 마음이 ‘음악이 빈 데서 난다’[樂出虛]면서 마음의 출처를 물었던 장자도 모름지기 정글 같은 마음을 벗어나지 못했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같은 이치로 우리가 마음의 갈피를 잃어 버리고, 이전의 상황에서 수시로 달아나고, 처음 자리로 돌아오더라도 이전의 그곳은 아닌 마음의 자리를 알게 되는 일들도 결국 마음 비움[空]의 실패와 마음의 소란을 인정하는 차원이 아닐까.
1) 한우진, 「철학계의 록스타」, 강진호 외 13인, 『마음과 철학-서양편(하)』,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2(초판 5쇄), 402쪽 참조.
2) 칼 다이서로스, 『감정의 기원』, 최가영 역, 북라이프, 2026.

김효숙 I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시인의 거울: 시의성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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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호(VOL.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