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 저자 | 김혜영 | ||
|---|---|---|---|
교토에 온 순례자
장작이 타오르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리는 스파클링 와인을 마셔요
기타리스트는 회색 모자를 쓰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해요
교토에서 마지막 밤을 보냅니다
아랍에서는 전쟁이 끝나지 않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래전부터 교토를 방문하려 했어요
일본어를 잘하시던 엄마를 모시고
일본 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걸 후회해요
착한 딸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진 며느리 역할도 못했어요
은각사 오래된 처마에는
세밀한 나무 조각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은빛이 아닌 무심한 나무색의 절간이
풍기는 은은함에 젖어듭니다
고도가 전하는 단아한 취향에 젖어드는
봄밤에 벚꽃이 환하게 피어납니다
거절당한 연인은 무기력하고
단잠을 청하는 순례자의 두 발은
퉁퉁 부었습니다
빗방울이 톡, 톡, 떨어지는 밤에
벚꽃 가지는 지상으로 한껏 휘어집니다
불그스레한 장작 불꽃은 타오르고
재즈 선율이 담긴 기타 연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을 들려줍니다
엄마, 그곳에서 잘 계시나요?
사쿠라호텔에서의 봄밤처럼
우린 오래된 도시를 걸어갑니다

김혜영 l
1997년 《현대시》 등단. 시집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다정한 사물들』, 평론집 『메두사의 거울』 등, 산문집 『영미시의 매혹』 등이 있음. 〈애지문학상〉 수상.
—
2026년 5월호(VOL.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