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일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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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박정호
오늘이라는 길이여 오늘이라는 섬이여
굴원이 배 저어간 멱라수라는 절해고도여
오늘에 서 있는 이여 어디에 가 닿으시는가?
섬만 섬이 아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이 있으면 오늘이라는 하루도 시간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다. 그 섬의 이름은 ‘오늘도’이다. 시인은 이 ‘오늘도’에서 ‘굴원이 배 저어간 멱라수라는 절해고도’를 아프게 부른다.
이 시조의 초장은 ‘오늘이라는 길이여 오늘이라는 섬이여’이다. 우리는 오늘, 그곳이 길이든 섬이든, 나는 어디에 가 닿는가를 묻는 「오늘도」에 서 있다. ‘My Way’라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가 있다. 그는 이 노래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며 당당히 걸어온 길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마이 웨이’는 “어디에 가 닿는가?”를 늘 물으며 살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고속철도는 서두르지 않으면 매진이라 급하면 고속버스를 타기도 한다. 기차보다 더욱 흔들리며 가는 버스. 기차가 여객선이라면 통통배 같은 버스. 귀경길에 고속버스를 타면 검은 밤바다의 물결에 흔들리는 승객은 섬이 된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 이별한 사람, 문상하고 돌아가는 사람, 홀로 남은 어머니를 두고 가는 사람. 섬 같은 사람들이 골똘한 정적 속에서 길 위를 달린다. 버스는 출렁거리며 섬이 된 사람들을 싣고 달린다. 달리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 닿는 걸까.
굴원(屈原, 기원전 340년~기원전 278년)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이며 정치가이다. 학식이 높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나, 모함을 받아 회왕의 신임을 잃고 끝내 자살하였다. 그는 이러한 아픔을 시 「이소(離騷)」에 담아내었다. 굴원의 그 「이소(離騷)」에 대해 사마천은 그의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문장은 간략하고 그 내용은 정밀하고 그 뜻은 깨끗하고 그 행동은 청렴하며, 그 문장은 사소한 것을 적었으나 뜻하는 바는 지극히 크니 가까운 것을 예로 들었으나 의미하는 바는 심원했다. 그 뜻은 고결하므로 그가 비유한 사물은 향기로웠다. … 진흙 구덩이에 빠져 더러워지더라도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더러움을 씻고, 속세의 바깥으로 빠져나와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니, 진흙 속에서도 깨끗하며 더러워지지 않는 사람이다. …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툴 만한 것이었다.
「어부사(漁父辭)」는 굴원이 정계에서 쫓겨난 뒤 어부와의 대화를 기록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굴원이 강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었다. 얼굴은 초췌하고 모습은 비쩍 말라 야위었다. 어부가 보고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닙니까? 어찌하여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까?”
굴원이 말했다.
“온 세상이 혼탁하나 나 홀로 깨끗하며, 모든 사람이 취했으나 나 홀로 깨어있으니, 그래서 쫓겨난 것이오.”
어부가 말했다.
“무릇 성인(聖人)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며 세상의 변화를 따라야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어찌 그 흐름을 따르지도 그 물결을 더 높이 일으키지도 않았습니까? 뭇사람들이 취했다면 어찌 그 술지게미 배불리 먹고 그 술을 마시지도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옥을 품고 옥을 쥐고도 스스로 추방을 자초하셨습니까?”
굴원이 말했다.
“내가 듣기에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 쓰고 새로 몸을 닦은 사람은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털어서 입으니, 누가 이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물건을 받겠소! 차라리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라도,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두드리며 떠나면서 노래를 불렀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구나, 내 갓끈을 씻을 수 있네. 창랑의 물이 흐리구나, 내 발을 씻을 수 있네.” 마침내 떠나가니, 다시는 더불어 이야기하지 않았다.
굴원은 강가에서 시를 지으며 다니다가 결국 돌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박정호 시인은 그 어떤 절박함으로 “멱라수라는 절해고도”를 부른다. 도로마다 밀물처럼 썰물처럼 밀려가는 자동차들, 주차장이 된 길 위에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들과 강북의 골목마다 강남의 카페와 음식점마다 바글대는 사람들. 오늘에 서 있는 이들이여, 가 닿는 곳이 절해고도가 아니기를. 당신이 가는 곳이 어디든 다시 만날 사람이 있고 따뜻한 잠자리가 있고 자연이 있고 시와 음악이 있는 곳이기를. 그리하여 살만한 곳이기를. 고향을 뒤로하고 부모를 떠나온 서울이 당신의 멱라수가 되지 않기를.
자정 가까이 종착역인 동서울터미널에 닿으니 후드득, 비가 뿌린다. 눈을 감고 적막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유령처럼 빗속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모두들 어디에 가 닿으시는가?
소가 웃는다
김승재
소 먹이러 갔다가
소 잃고 집에 왔다
옷소매 찢어지고 운동화 구멍 나고
외양간
먼저 든 황소
나 보더니 피식 웃네
소 먹이러 가서 한눈을 판다. 파란 하늘 흰 구름 되어 흘러가고 도랑물 소리에 물풀 속을 기웃거리는 오리가 된다. 나는 여기 구름처럼 오리처럼 있는데 길 떠난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나만 이 시골구석에 남은 건 아닐까? 나만 모르는 세상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저런 생각 하다 보니 아차, 내 소가 없네. 어디 갔을까?… 잃은 소 찾느라고 헛된 꿈속에 얼마나 헤매었나. 그 미망 속의 그 어떤 열망이 옷소매 찢어지고 운동화 구멍 나도록 뛰어들게 하였나. 중장 “옷소매 찢어지고 운동화 구멍 나고”를 보니 누더기에 거친 맨발바닥을 드러내고 아버지 하느님의 품에 안긴 렘브란트의 그림 속 탕자와 다름없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시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작품 <돌아온 탕자>는 성경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림 속 아들은 빈곤과 절망에 빠진 비참한 상태로 방랑에서 돌아왔다. 그는 회개하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아들의 어깨를 껴안고 있다. 너그러운 용서와 침묵의 분위기가 가득하여 무척 감동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이 시조의 화자 역시 비참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는 외양간에 있는 게 아닌가. 황소는 꼴같잖은 날 보고, 내 그럴 줄 알았다, 피식 웃네. 이제 돌아왔구나. 그 행색이 무엇이냐. 그러나 돌아올 줄 알았지. 너는 원래 본성이 나를 먹이려 하였느니라. 고생했다. 멱라수에 빠지지 않고 용케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하는 듯이.
월명(月明)
최정희
집어등 불빛같이 하늘에 달이 떴다
달빛 쫓아간 물고기 돌아오지 않고
어부의 성긴 그물에 바람만이 가득하다
캄캄한 바다에 환한 집어등 불빛처럼, 캄캄한 밤하늘에 휘영청 달이 떴다. 만월이다. 바닷속의 물고기 떼는 다 달빛 쫓아 몰려갔다. 휘황하게 떠 있는 달빛 집어등을 쫓아 물고기들이 달려간다. 스노클링하며 어느 열대의 바다에서 본 물고기 떼들이 다시 보인다. 달빛은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을 건져 올렸을까? 달빛 그물이 너무 무거워 만월은 터질 듯 팽창했다. 신비롭다. 이 정경을 보아내는 시인의 눈만으로 충분히 신비로운데 더 신비로운 종장이 놓인다.
어부의 성긴 그물에 바람만이 가득하다
만선을 꿈꾸었으나 그물에 걸린 건 바람뿐. 바람의 만선이구나. 달빛 쫓아간 물고기처럼 눈부신 빛을 쫓던 시간은 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눈물이 마를 때부터 우리는 그리움을 비우는 것을 배운다. 지긋해지면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을 배우는 때가 온다. 삶이란 바람만이 가득한 성긴 그물을 거두는 것이란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시조는 여기서 허무를 넘어 환한 보름달처럼 펼쳐지는 눈부신 달관의 미를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의 정서이다. 김정휴의 「장경각」이라는 시조가 생각난다.
밤이면 장경각이 심해의 어장처럼
금빛 고기 떼들이 무리져 다니더니
바다만 알몸으로 와서 짐승마냥 눕는다
이 작품 역시 장경각에 어린 만월의 환한 달빛을 “심해의 어장처럼 // 금빛 고기 떼들이 무리져 다니”는 것으로 드러내었고, 달빛이 가고 남은 어둠을 “바다만 알몸으로 와서 짐승마냥 눕는”것으로 그리고 있다. 초·중장은 비슷한 심상이지만 종장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다. 「장경각」은 장경각에 ‘알몸’으로 와서 ‘짐승마냥’ 눕는 거친 어둠의 바다를 생동감 있게 그리기 위해 달빛을 배치했다.
이런 꿈
저런 꿈
날마다 꾸지만
허위단심
찾아가 봐야
별것도 없네
헛꿈만
꾸지 않으면
여기가 바로 그곳
— 홍사성, 「샹그릴라를 찾아서」
이런 꿈 저런 꿈 날마다 꾸면서 허위단심 찾아가 봤으니 여기가 나의 샹그릴라라는 것을 안다. ‘오늘도’에 서 있는 이여, 외양간에 소를 두고 찾아 헤매는 이여, 뜨락의 달빛을 두고 심산유곡을 헤매는 이여, 거기가 샹그릴라가 아니라면 여기도 샹그릴라가 아니고 거기가 샹그릴라면 여기도 샹그릴라인 이상한 이상향, 당신은 이미 그곳에 있고 소는 외양간에 먼저 들어 있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수 있으니, 오늘이라는 절해고도에서 너무 헤매지 마시라.
「오늘도」 「소가 웃는다」 「월명」에서 우리는 ‘’오늘도’ ‘소’ ‘바람 그물‘과 같은 없는 존재를 체험한다. 소는 볼 수 있으나 여기의 소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시를 읽거나 쓰는 방식, 시에 대한 개념, 이해도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나 차원은 다르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성서는 사랑이 있는 사람이 읽었을 때 사랑의 차원에서만 이해되는 것”이라고 했다. 안 보이는 침묵의 세계에 있는 것들이 충격으로 전율로,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을 기쁘게 체험하기 바란다.

김일연 l
1980년 《시조문학》 천료. 시조집 『빈 들의 집』 『서역 가는 길』 『저 혼자 꽃 필 때에』 『달집태우기』 『명창』 『엎드려 별을 보다』 『꽃벼랑』 『아프지 않다 외롭지 않다』 『너와 보낸 봄날』 『깨끗한 절정』 『향긋한』, 시조선집 『먼 사랑』 등, 일역 시조집 『花の崖(꽃벼랑)』, 영역 시조집 『All The Daughters of The Earth(세상의 모든 딸들)』, 동화집 『하늘 발자국』, 시평집 『시조의 향연』이 있음. 〈한국시조작품상〉 〈고산문학대상〉 〈한국단시조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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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호(vol.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