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 저자 | 이민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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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골목을 지나는데 누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모르는 사람 같고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는 사람 같고
가로등은 먼 하늘에 먼지처럼 떠 있었다
어두운 입들은 빗장처럼 굳어져
플래시를 비추어도 모르는 얼굴 같고 그렇게 생각하면 설레는 것도 같고
과거 속에 누워 생각하면 아는 얼굴 같고 그렇게 생각하면 무너질 것만 같고
이게 뭐라고 종이나 긁적이면서 즉석복권도 아닌데
이게 뭐라고 인생을 긁적이면서 자다가도 일어나
검은 얼굴에 대고 꾸벅꾸벅 인사를 한다
어차피 무관한 사람 아니면 지나간 사람
못 본 척 지나칠 수도 있는데
인사 후엔 누구세요? 물어보면 그만인데
순찰을 마치고 퇴근하려고 폐가들을 빠져나왔다
눈 더미가 깨끗이 녹아 있었는데
앙상한 검은 고양이가 빤히 바라봤다
나도 빤히 바라봤다 모르는 고양이 같고 아는 고양이 같고
거울이 사방에 걸려 있는 집에서도 그랬다
천적 같고 감옥 같던 시절에도 그랬다
세월이 깨끗이 녹아 있었는데
거울을 다 치우고도 자다가도 그랬다

이민하 l
2000년 《현대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미기후』 『우울과 경청』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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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호(VOL.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