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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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일연 

 

   

   무제(無題)

                                     김제현

 

 

   산은 우뚝하고

   골짜기로 물이 흐르는

 

   절로 난 흐름의 길가

   꽃들은 피어서

 

   바쁘게 몸을 추스르는

   이것을 무엇이라 하랴

 

   시냇물 제 혼자

   소리 내어 흐르고

 

   나뭇잎 하나 달빛 싣고

   흔들리며 가느니

 

   이것을 무엇이라 하랴

   먼 산 뻐꾸기 운다

 

  언어와 함께 이는 파동. 정형을 넘어선 정형의 자유를 느껴본다. 품이 참으로 넉넉하다. 시조의 정형 안에 이렇게 넉넉한 품이 있다는 것이 놀랍고 은혜롭다. 그러나 이 품은 형식 없이는 느껴볼 수 없는 품이다. 불가사의하다.

   형식이란 무엇일까. 하늘을 하늘에 있게 하고 땅을 땅에 있게 하고 언어를 있게 하고 자연을 있게 하고 사회를 있게 하고 예술을 있게 하는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시조를 있게 한다.

   시조는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3장 6구라는 형식은 그대로이나 내용에 따라 그 형식은 탈출하고 싶은 올가미가 되기도 하고 이처럼 우주의 품이 되기도 한다. 같은 모양의 꽃이지만 살아있는 생화가 되기도 하고 조화가 되기도 한다. 이것을 무엇이라 할까. 생명이라 할까, 섭리라 할까. 인위가 없는 이것 — 절로 난 것. 돈과 규율의 흐름만이 있는 벽을 보며 살아가는 인간이 언제나 그리워하는 것들. 인간의 판단이나 분별을 넘어선 산과 물과 골짜기와 꽃과 달빛과 나뭇잎과 뻐꾸기, 영원의 자연 안에서 흘러가는 순간의 것들. 

   그러나 어디에나 영원처럼 있는 그것들은 순간과 영원 속 함께 존재한다. 시인이 숭고한 이름을 부여한, 산과 물과 골짜기와 꽃과 달빛과 나뭇잎과 뻐꾸기, 그들이 모두 한 편의 시조에 함께 있어도 산만하지 않은 건 그것을 있게 하는 자연, 그 섭리의 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무어라 함부로 제목을 붙이기도 저어되는, 이것을 무엇이라 할까. 무제(無題)라 이를 수밖에 없는. 

   이 어쩔 수 없는 감탄의 언사에서 우리는 신의 세계로 들어간다. 무엇이기에 눈을 시원하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하고 깊은숨을 쉬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일까. 의식주를 넘어 정작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살게 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바쁘게 몸을 추스르는 꽃, 소리 내어 흐르는 시냇물, 달빛 싣고 흔들리며 가는 나뭇잎…. 그것들은 생명을 가꾸고 또 가야 할 곳으로 가느라고 바쁘게 몸을 추스른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이 아닌 진정한 생명의 환희, 삶의 환희를 노래하느라고 바쁘다. 늘 욕망에 쫓기는 결핍의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스스로 충분한 이런 것들을 보면 가슴이 저릿해 온다. 거기에는 자연과 인간, 참여와 순수, 좌와 우, 선과 악, 기쁨과 슬픔, 나와 너를 나누는 판단과 분별의 이분법이 없다. 불이(不二)의 일원론이며 스스로 충분한 하나의 세계. 우리가 그리워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시조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움은 눈물로 맺혀 흐르지는 않는다. 잔잔히 스며드는 물기를 멀리서 뻐꾸기가 대신 울어줄 뿐.

      

   무심

                                        박재삼

 

 

   가다간 파초 잎에 바람이 불어오고

   덩달아 물방울이 찬란하게 튕기고

   무심한 이 한때 위에 없는 듯한 세상을.

     

   비가 지나간 뒤에 햇빛이 쨍하니 났다. 바람이 불어온다. 파초잎에 고인 물방울이 튕겨 무지개가 섰던가. 또 바람이 불어온다. 방울방울 티 없는 해를 안고 있는 물방울이 튄다. 세상이 파초잎 위에 찬란하다. 누가 보았나 이 한순간을. 가장 여리고 작고 빠르고 짧은 그러나 가장 눈부시고 찬란한 순간을. 시의 눈이 아니면 누가 볼 수 있을 것인가.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자신의 시의 여러 대목을 빌려다가 패러디하여 재구성 한 시 「사실상 모든 시에는」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실상 모든 시에는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한 구절이면 충분하나니

 

   언제 있었던가 싶은, 없는 듯한 세상이 마구 가고 있다. 살면서 놓쳤던 많은 순간을 고단한 세상살이의 우울과 걱정과 근심 속에 지금도 놓치고 있다. 더 열심히 살 것을, 더 솔직할 것을, 잘 살필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모른다. 영원히 기억될 사랑의 순간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순간을, 마구 가고 있는 찬란한 세상의 시간을 우리는 늘 놓치며 살고 있다. 그 순간들은 없는 듯하여 놓치기 쉽다.

   생각이 없는 무심과 속세의 가치를 떠난 무심은 어떻게 다를까. 속세의 가치에 맞추지 않아야 보이는 세상이 있다. 그 없는 듯한 세상을 보고 있는 시인의 눈. 갖은 췌사로 언어를 괴롭히지 않는 시조의 눈은 그 찬란한 순간을 다만 그윽한 관조로 마주하고 있다.

         

   대낮

                                      이종문

 

 

   내 농막 뒷문으로 잠자리가 들어와서 유유히 날개를 편 채 앞문으로 나갔다가

 

   불현듯 유턴을 하여 뒷문으로 나가는,

  

   수많은 대하소설과 서사시, 나아가 모든 예술은 궁극적으로 '우리는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노래하고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겪는다. 세상은 고해이며 삶은 고행이라고 한다. 기쁨은 빠르고 슬픔은 길다. 이별은 길고 편지는 짧다. 그 많은 파란, 고통, 슬픔, 불행, 변화를 겪고서야 우리는 세상에 온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다. 산다고 다 사는 게 아닌 것이다. 

   한 편의 시는 그에 상응한 깊은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이 무거운 은유를 얹어본다. 유유히 날개를 편 채 뒷문으로 들어와서 다시 뒷문으로 나가는 한 마리 잠자리의 얇은 날개는 그러나 휘청거리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한 송이 풀꽃, 한 알의 모래알일지라도 자연은 굳건한 경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무거운 은유를 다 버리고 내려놓은 동심의 눈으로만 한때의 무구하고 천진한 순간을 느끼고 싶다. 그것은 보석과도 같은 반짝임의 순간이 되리니. 잠자리 한 마리가 그 존엄성을 보이는 신비롭고 숭고한 세상, 그 세상으로 들어가 잠시 가져보는 이 유유한 여유는 이 시조가 주는 선물이다. 대낮이 눈부시다.

   잠자리 한 마리가 유유히 날개를 펴고 뒷문으로 들어와서 앞문으로 나갔다가 불현듯 다시 돌아와서 뒷문으로 나가는 이것, 이 무심의 경이를 시조가 아닌 무엇에 이처럼 딱 맞게 담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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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연 ​ l

1980년 《시조문학》 천료. 시조집 『빈 들의 집』 『서역 가는 길』 『저 혼자 꽃 필 때에』 『달집태우기』 『명창』 『엎드려 별을 보다』 『꽃벼랑』 『아프지 않다 외롭지 않다』 『너와 보낸 봄날』 『깨끗한 절정』 『향긋한』, 시조선집 『먼 사랑』 등, 일역 시조집 『花の崖(꽃벼랑)』, 영역 시조집 『All The Daughters of The Earth(세상의 모든 딸들)』, 동화집 『하늘 발자국』, 시평집 『시조의 향연』이 있음. 〈한국시조작품상〉 〈고산문학대상〉 〈한국단시조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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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호(vol.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