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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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2년 9월 공시사 월평 


  

  

 

 

 

서커스와 시의 미장센,

그 모순과 불일치의 생존 방식

   

● 신수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흑인 단원의 옷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나 마약과 사기와 감옥과 싸움 등으로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 등이 등장하는 짐 툴리의 소설 『서커스 행진』(1927), 유랑하며 쇠사슬을 끊는 차력사 잠파노와 지능이 낮지만 순수한 젤소미나가 질투와 폭력과 살인과 유기 그리고 정신병력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길〉(1954) 같은 작품들은 고달프고 서러운 길 위에서 살아가는 광대들의 삶을 누아르 혹은 비극으로 보여준다.

 작품 속의 서커스단은 고아, 이민자, 장애인, 떠돌이, 사기꾼, 동물 등이 우스꽝스럽거나 기괴한 모습으로 재주를 부리고 속임수를 쓰는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반짝이는 조명과 놀라운 묘기에도 불구하고 무대 밖에서 이들의 삶은 학대하거나 학대받거나, 착취하거나 착취받거나, 버리거나 버려지거나, 하는 구도를 거쳐 비통하고 파렴치하고 잔혹한 죽음으로 귀결된다. 사회의 최하층민이 겪는 실상의 보고이기도 하고 소수자들의 낮은 목소리에 대한 대변이기도 하지만, 휘황찬란한 천막 뒤에 가려진 세계에는 마술도 환상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는 오직 처절한 절망과 싸우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바닥 끝까지를 들여다보도록 하는 문학적 요청이 있다.

 물론 찰리 채플린의 영화 〈서커스〉(1928)처럼 우연과 기적과 진실의 힘으로 점철된 한낮의 꿈 같은 서커스도 있다. 벤야민이 스크린 속의 채플린을 두고 어떤 운명의 시련도 견딜 수 있는 방탄복을 입은 사람 같다고 한 것처럼 채플린은 천진난만한 표정과 악의 없는 행동으로 헐값에 그를 부려먹는 고약한 고용주를 골탕 먹이고 처음 그곳에 왔던 모습 그대로 빈 들판으로 나아간다. 그 뒷모습은 퇴장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또 어디에선가 감동스러운 페이소스를 전하며 등장할 것이라고 믿게 한다.

 한편 거울방에 들어간 채플린이 반사되어 수많은 채플린으로 복제되는 씬이나, 우리 안에 갇힌 채플린과 사자가 대비되는 씬은, 인간의 도구화가 만연했던 당대에 노동자의 본질과 한계 그리고 그 체계에 갇혀버린 우리 모두의 아이러니를 집약하고 있는 압도적인 미장센으로 남았다.

 서커스는 시대와 지역을 거슬러 어디에서나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서커스의 어원은 써클(circle)의 라틴어 키르쿠스(circus)에서 유래했다. 이는 원형극장의 장소이면서 공연을 뜻하는데 산업혁명 시기에 천막 극장의 등장으로 이동과 구조를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유랑의 패러다임을 띠게 된다. 서커스는 옛 시대의 유물로 박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안에서 건재하는데 이번 글에서는 서커스가 시에서 예술적 미장센으로 작동하는 방식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차를 타고 멀리 들어간다

 중심지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졌다

 

 낡은 건물의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랫동안 어두웠다

 변기 안에서 죽은 벌레는

 빛이 깜빡이며 켜지는 동안

 잠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흐르고 고였다가 다시 흘렀다

 

 공연장에는 창문이 없다

 순환하지 못하는 공기와 생각

 타국의 어른은 타국의 아이를 높이 던졌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럴수록 아이는 더 높이 던져졌다

 

 묘기를 보여주는 단원들의 표정은

 길가에 생긴 의문스러운 구멍처럼 

 들여다보기 버거워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지 않는 동안

 제주의 도로를 거닐었다

 

 제주의 도로는 넓다

 2차선 도로도 4차선 도로터럼

 내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무단횡단을 하면

 여기서 고였다가 저기까지 흐를 것처럼

 무궁무진하다

 

 나는 자꾸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제주를 걸으면 걸을수록

 물에 잠긴 채 죽고 싶다고 되뇌는

 이미 죽은 곤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제주의 해변에는 창문이 없다

 나는 계속 숨이 막혔다

 시가 나를 높이 던졌다

 눈을 떠도

 아이가 무사히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 김상희, 「서커스」 전문(《창작과비평》, 2022년 가을호)

 

    

 ‘나’는 제주에서의 동선과 공간, 사물. 행위 등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소상히 드러낸다. 제주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사건과 배경은 단순히 인물이 놓이게 된 환경이 아니라 화자의 심리와 정서를 투영하기 위해 정밀하게 고안된 설정인 것이다. 이를테면 차를 타고 갈 때 “중심지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는 ‘나’의 경로는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자꾸만 유리되어가는 화자의 좌표이며, “낡은 건물의 화장실”의 “오랫동안 어두웠”던 공간은 긴 시간 침체되어온 화자의 내부인 것이다.

 “잠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흐르고 고였다가 다시 흘”러간 “변기 안에서 죽은 벌레”는 시에서 일관되게 ‘나’의 자화상으로 등장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어디에도 “창문이 없”고, “순환하지 못하는 공기와 생각” 때문에 “계속 숨이 막”히는 ‘나’는 이미 죽었으면서도 계속해서 죽고 싶다고 되뇌는 비존재로 화한다. 죽은 벌레로 치환된 ‘나’는 순환하는 변기물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그래서 마치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직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같은 자리를 맴돌며 그저 시간이라는 유속에 휩쓸려 어딘가에 난파된 존재. ‘나’는 살아있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조난된 것이다.

 의식적인 죽음에 다다랐음을 짐작케 하는 이 문제적인 상태는 삶과 죽음을 전도시키고 죽음의 편으로 건너가 지금 여기의 현재적 삶을 관조하는 거리를 확보한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가정해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치 사후 체험을 기술하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사체를 응시하는 듯한 자기객관화의 거리다.

 이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외줄을 타고 불구덩이 속을 뛰어넘는 서커스는 등장한다. 최고 수준의 예술성과 운동성을 갖춘 곡예단이지만 파트너의 손을 놓치거나 몸의 균형을 잃는 순간 허망하게 목숨을 잃거나 영원히 무대에 설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비극의 극치와 바꾼 스릴과 쾌감으로 사람들은 숨죽여 무대를 지켜보고 탄성을 지른다. 그래서 “묘기를 보여주는 단원들의 표정은 길가에 생긴 의문스러운 구멍처럼 들여다보기 버”겁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호기심을 부추기기 위해서 타국의 어른은 타국의 아이를 높이 더 높이 던질 수밖에 없다. 자극의 강도가 올라갈수록 역치도 비례해 올라갈 것이므로 순조로운 것이나 자연스러운 것은 배제되고 위험천만하고 말초신경적인 것들이 출연한다.

 삶은 점차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결합된 서커스가 되어간다. 수년째 미디어를 잠식하고 있는 음식 콘텐츠의 경우 로마 시대 귀족들이 사치와 권태에 빠져 음식의 맛만 보고 뱉어냈던 식사법처럼 오직 육체적 행위에만 탐닉함으로써 관음적 시선을 부추기고 금기를 자극한다. 과장되고도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의 판타지를 재현하고 있는 장면을 소비한다는 점에서 이 현상들의 메커니즘은 기만적이다.

 시에 나타난 서커스 역시 사람들의 감정이나 욕망의 극대화를 위해 스토리에 극단적인 왜곡과 창작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점이 문제다. 이 사태를 지켜보는 ‘나’의 고통은 곧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의 얼굴”로 나타난다. “시가 나를 높이 던졌”고 “눈을 떠도 아이가 무사히 내려왔는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는 물에 빠져 죽은 곤충이 된 듯한 자기부정성으로 나타난다. 시는 높은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서커스처럼 내 삶 그 자체를 거는 것이다. 때로 내 육체와 정신을 날 것 그대로 팔아먹어야 하는 환멸 속에서 시는 나온다. 공중에서의 삶보다 더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땅 위에서의 삶이다. 이미 죽었으면서도 죽고 싶다고 하는 이 극단성은 서커스와 시가 갖는 ‘모순’과 ‘불일치’로부터 발로한다.

 서커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의 최대치를 넘어선다. 자의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신체 영역의 극소점이라면 서커스는 신체 영역의 극대화에서 존립한다. 예컨대 인간의 눈에 지각되는 가시광선 바깥에 존재하는 자외선이나 적외선의 파장처럼 서커스도 인간적인 스펙트럼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다. 올림픽 선수를 응원하는 관중은 자신의 능력을 갱신해가는 선수와 혼연일체가 되고 그래서 도전과 성취의 가치를 새길 수 있다. 그런데 서커스의 생리에서 곡예사의 동작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한계를 넘어서야 박수와 인기를 얻을 수 있다. 목숨을 걸수록,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수록, 위험도와 기이성이 가히 경악스러울수록 관중은 열광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두 발로 서는 코끼리와, 동전을 던져주면 인사하는 곰, 박수 치는 물개, 불의 고리를 관통하는 사자들 역시 동물이지만 전혀 동물 같지 않은 범주에 속해 있다. 굶기기와 채찍질을 당하며 사람이나 할법한 동작들을 하도록 훈련된 이 동물들은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닌 듯 가시광선 밖에 존재한다. 사람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동물이 동물처럼 보이지 않는 상태로 진입할 때 비로소 쇼는 시작된다. 사람은 동물처럼, 동물은 사람처럼 보이는 ‘모순’과 ‘불일치’의 생존 방식이 여기에는 있다.

 결국 서커스는 가면무도회처럼 환상의 영역을 조성함으로써 현실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다. 서커스는 이 환상의 시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해야 한다. 현대 과학의 기술력은 증강현실을 통한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지만 서커스는 눈앞에서 인간의 육체 그 자체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관객을 조종하는 것은 서커스 단원들이지만 관객은 자신들이 단원들을 조종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곡예사와 관중의 역학 관계는 돌고 돈다.

 시 또한 현실의 언어와 다르게 공중제비를 돌고 외발자전거를 타며 새처럼 날아간다. 그것은 꿈의 단말마이고 신의 기표다. 시를 위험천만하게 던지면 던질수록 좋은 시가 나오는 것도 사실 이런 측면 때문이다. 신이 시를 쓰고 서커스를 한다면 재미도 감동도 없을 것이지만 인간이 인간 너머의 존재가 되어 천의무봉의 재주를 펼치려 하기에 아슬아슬한 서커스도 난해한 시도 아름답다. 서커스도 시도 인간과 신의 두 차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너는 먼 나라에서 왔을라

 너는 말더듬이 말다듬이

 너는 나무 종이 기둥에 시를 새기는 시인

 딱끄르르 딱그래 따그르르 딱,

 쓰다 만 시 한 줄

―서정춘, 「딱따구리」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9월호)

   

  

 죽음을 갖고 놀면서도 극한의 공포 대신 웃음을 띠어야 하는 광대와 찰나의 눈부심과 환상을 통해 삶의 눈물을 잊으려는 사람들 사이의 부조화가 바로 서커스의 작동 원리다. 인간다움을 저버릴 때, 인간다움의 범위를 벗어날 때, 인간다움의 정의를 무화시킬 때 서커스가 성립하는 것이라면 시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말로 전할 수 없는 말, 말로 이해할 수 없는 말, 말로 간직할 수 없는 말. 벙어리와 같은 웅얼거림과 신음과 울부짖음이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불명확하고 불가해한 불명의 시, 시. 인간다움의 언어, 논리, 이성 그 바깥에 시가 있다. “너는 먼 나라에서 왔을라” “너는 말더듬이 말다듬이” 어느 딱딱한 벽에 쓰다 만 시 한 줄 새기는 딱따구리.

 서커스와 시의 미장센은 모순과 불일치의 핍진한 폐허에서 일어나 멀리 도움닫기를 한다. 곡예사와 시인은 가시광선 밖으로 주저없이 걸어나간다. 땅에서 공중을, 비언어에서 언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니 거꾸로 공중에서 땅을, 언어에서 비언어를 감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두 개의 레이어 사이에서 서커스와 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미장센을 기획한다. 이 아이러니 위에서 나는 높이 던져졌을 때에만 비로소 내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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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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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