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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몌별부(袂別賦)
1
석사 3기였다.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 않았는데 몇 개 업무 때문에 학교에 갔다. 그날 저녁, 시인 기형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다. 등단하기 전이었고, 나는 그저 시를 습작하는 일개 대학원생이었다. (정확히는 기형도라는 시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한다.) 1989년 여름이었다. 군사 독재정권은 동아리방의 창비와 유사 문집을 다 걷어가 불태웠다. 참 단순무식한 방법이었다. 한번 본 이상 그 불씨는 가슴에서, 영혼에서 절대 꺼지지 않는 법이다. 나는 많이 아팠다. 실제 몸이 아팠고, 정신은 형체를 이루기 전의 지리멸렬이었다. 한 젊은 시인이 폭압을 존재의 근거로 환원하는 논리와 저항을 미학으로 내면화하는 사태에 끼어 죽었다. 일개 습작생이던 나는 그 ‘퇴폐성’에서 어떤 희망의 근거도 찾았다고 믿었다. 실제, 시인이 신춘문예 출신이라는 것도 별로 부럽지 않았다. 김수영과 기형도를 입에 달고 한국 현대시를 걱정하는 분들의 용기와 시대정신이 내겐 없다.
7.
오라, 와서 잔을 채워라. 봄의 열기 속에
회한의 겨울 옷일랑 벗어 던져라
세월의 새는 오래 날 수 없거늘
어느새 두 날개를 펴고 있구나
9.
아침마다 장미꽃 무수히 핀다지만
어제 핀 장미는 어디로 갔나?
장미꽃 피우는 초여름 달이
잠쉬드와 카이코바드*를 데리고 가리
* 한 페르시아 왕가의 시조.
12.
시집 한 권, 빵 한 덩이, 포도주 한 병
나무 그늘 아래서 벗삼으리
그대 또한 내 곁에서 노래를 하니
오, 황야도 천국이나 다름없어라
민음사에서 출간한 『루바이야트』에서 가져왔다. ‘하이쿠(俳句)’는 귀동냥이라도 해서 익숙하지만, ‘루바이야트’에 대해서는 책의 해설을 좀 빌릴 수밖에 없다. “‘루바이야트(rubaiyat)’는 ‘4행시’라는 뜻을 가진 ‘루바이(rubai)’라는 페르시아어 낱말의 복수형인데, 오마르는 모두 1,000편에 달하는 루바이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모든 루바이들은 어떤 경우 혹은 행사를 맞아서 써진 것이라는데 각기 독립해서 한 편의 시로 읽힐 수 있다.”는 소개와 함께, 오마르 카이얌의 4행시들이 세계적인 각광을 받게 한 것이 1859년 영국에서 처음 출판된 영역본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The Rubaiyat of Omar Khayyam)』이고, 그 번역가가 E. 피츠제럴드라는 것을 알려준다.
작품을 관통하는 “불가지론적인 인생철학과 철저한 현세주의적 생활 자세”라는 평가도 매혹적이지만, 장마의 끝자락 갑자기 쏟아져서 도무지 그칠 기세를 보여주지 않던 장대비와 더불어 기형도의 첫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서 만났다는 데서 더 감회가 새롭다. 김현 선생은 시집 말미에 붙은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ㅡ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라는 해설에서 진혼가의 마지막 마디를 이렇게 적었다. “그는 젊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다.” 그리고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의 시 하나를 빌려, 그의 넋을 달랜다.
우리 모두 오고가는 이 세상은
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
묻는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리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주지의 사실이지만 젊은 시인을 위해 검은 피 같은 진혼곡을 썼던 선생도 곧 불귀의 몸이 되었다. (앞의 ‘루바이’는 김병옥 역이라 하는데 민음사 판에는 같은 내용이 없다.) 나는 이 한 밤 지면(紙面) 말고는 전혀 인연이 없는 두 사람을 생각하면서 일종의 비감에 젖는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런 터무니 없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이라는 깨달음이 먼저일까,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이 앞서는가.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그저 ‘말’이라는 ‘포도주’에 취해 혼자 주정을 늘어놓는 것일까.
2
사전적 의미에서 ‘몌별’은 “소매를 잡고 작별한다는 뜻으로, 섭섭하게 헤어짐을 이르는 말”이다. 봄에는 항상 ‘섭섭한 헤어짐’의 기억이 갖가지 꽃처럼 사방에서 피어난다. 계절 탓을 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또는 내 기억의 왜곡이라 치부할 수 있어도 괜찮으련만 ‘사실’은 역사가 되지 못했어도 당사자인 내겐 ‘사실’로 엄연하게 존재한다. 천 리(千里)를 배웅해도 결국은 헤어져야 한다는 어떤 사극의 대사가 떠오르고, 다시 기형도의 첫 시집에 갈겨놓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겹쳐진다.
시를 파고 들어가는 자는 모든 우상을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과 결별해야 한다. 진리를 지평선으로 삼지도 말 것이며, 미래를 그가 머무를 곳으로 삼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희망을 가질 권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절망해야 한다. 시를 파고 들어가는 자는 죽은 자이다. 심연과 같은 자신의 죽음과 해후하는 자이다.
위안이 되느냐고 묻지 말자. M. 블랑쇼의 이 말이 무슨 심대한 진리나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내게 남은 ‘몌별’의 순간들을 회피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으면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종국에는 ‘시’와 일으키는 사태라 할지라도.

백인덕 I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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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