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오세영 | ||
|---|---|---|---|

[이달의 시인] 오세영
신작시: 출옥 / 만리장성
자선시: 찰칵 / 보름달 / 모든 새들의 부리는 젓가락
[시인론] 조강석 “역설의 언어”
신작시
출옥
한 잔 한 잔 비워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야
비로소 장에서 풀려나는 20년산
발렌타인
포도주든, 위스키든, 막걸리든
술병은
비움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찾는다.
혀와 입술의 관능
이 한세상의 감옥,
인생 또한 장기수(長期囚) 아니던가.
만리장성
저 너머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멀리서
마냥 바라보기만 했던,
새날이 밝아오고 찬란히 무지개가 뜨던
언덕 너머 그 하늘,
가로막는 장성은 높고 가파르기만 한데
굳게 닫힌 문, 단단한 포루(鋪樓).
해자(垓字)는 간신히 건넜건만
내 휘하엔 병력도 무기도 변변치 않아
다만 펜 하나 들고 이 험한 장벽,
어떻게 깨부시고 넘을 것인가.
탁자 앞에서 오만하게 버티고 서
날 굽어보는 그 벽의 서가(書架),
용기를 내서
사다리를 놓고 기어올라
간신히 한 권의 장서(藏書)를 뽑아든다.
부질없이
석축(石築)에 괸 돌 하나를 허문다.
근작시
찰칵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한 편의 영화는
필름의
마지막 신*에서 끝나버린다.
그러나 사진은
한 번 찍어 영원한 것.
영원을
긴 시간에서 찾지 마라.
내일 아침에 헤어질 운명의 남녀도
한 몸이 되어 뒹구는 오늘 밤의 그
순간만큼은
내 사랑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더냐.
무시무종(無始無終)이 어디 있으랴.
반짝 빛나는 플래시의 섬광,
그 한 찰나가 바로
영원인 것을.
* scene
보름달
죽어 저세상에서 이승의 잘한 일 못한 일 다 심판받을 때 이 골목 저 골목 촘촘하게 설치된 지상의 감시 카메라에 찍혀 그 증거자료로 제시될 녹취 녹화 필름 한 통, 예수인지 석존(釋尊)인지 하늘에 큰 CCTV 한 대 매달아 놓았다. 어두운 밤엔 서치라이트까지 동원해서 불 밝힌 그 환한 카메라 렌즈.
모든 새들의 부리는 젓가락
그것도 남녀의
성 구분일까.
이 세상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먹기 위해 아우성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하나님께서는 날개나 발이 아니라
먹는 방법으로 날짐승과
들짐승을 구분해주셨다.
모든 새들의 부리는 젓가락,
모든 들짐승의 주둥이는
숟가락.
오세영 I
시인. 1965~68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 등단. 시집 『사랑의 저쪽』 『바람의 그림자』 등, 저서 『시론』 『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등이 있음.
시인론 / 조강석
역설의 언어
1. 아포리즘 대신 역설
열망은 모든 것을 꽃피게 하지만 소유는 모든 것을 시들고 스러지게 한다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말한 바 있다. 열망과 소유의 역설적 관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열망하되 소유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소유를 전제하지 않는 열망이 허망이 되지 않는 조건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개별적 정념들을 설명하기에 앞서 정념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변위의 두 축을 슬픔과 기쁨으로 설정한 바 있다. 이는 실상 우리의 정념이, 말하자면 두 축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과 왕복 운동을 하는 것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스피노자가 극단의 두 축을 설정한 것은 단순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두 축 사이에서 언제든 위상 변화가 가능한 변주를 거듭하는 것이 정신의 삶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같은 논리로 말하자면 인간은 열망과 소유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연속선상의 어느 점에서라도 슬픔은 일정 정도의 기쁨의 결여이고 기쁨은 어느 정도 슬픔의 결여이듯, 열망은 결여로부터 비롯된 소유 의지이고 소유는 열망의 결여가 된다. 실존주의자들의 문장을 원용해 말해보자면, 우리는 열망과 소유 사이의 쉼 없는 왕복운동을 선고받은 존재자들이다.
한 잔 한 잔 비워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야
비로소 장에서 풀려나는 20년 산
발렌타인
포도주든, 위스키든, 막걸리든
술병은
비움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찾는다.
혀와 입술의 관능
이 한세상의 감옥,
인생 또한 장기수(長期囚) 아니던가.
-「출옥」 전문
이 시에는 우리가 두 개의 심리적 위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존재자들이라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노자(老子)적 전언을 섣불리 취하기 전에 인간 욕망의 양가적 구조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1연과 2연을 보라. 우리의 시선이 “발렌타인”에 붙박이면 이 시 전체는 비움으로 채움을 얻는다는 『도덕경』의 여러 구절들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술병이 비는 것은 득도를 위한 수행 때문이 아니라 “혀와 입술의 관능”을 달래려는 열망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두 축의 정념이 그렇듯 열망과 소유는 그 자체로 선악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연속선상에서 두 극의 인력에 의해 쉼 없이 자리를 옮겨 다니는 욕망이 우리 삶의 한 부분임을 냉연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이 시의 역설이 여기서 성립된다. 관능이 감옥이고 열망이 자유를 낳는다. “인생 또한 장기수”라는 진술은 삶의 신산함을 환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이 역설을 삶의 비의로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T.S. 엘리엇은 보통 사람들은 때론 연애를 하고 요리를 하기도 하며, 때론 스피노자를 읽기도 하지만 작업할 준비를 완전히 갖춘 시인의 정신은 이런 요소들을 쉴 새 없이 융합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른바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에 대한 요청이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움으로써 자유를 찾는다”는 전언만을 취하면 실상 시의 대부분을 잃는다. 바로 뒤에 “혀와 입술의 관능 / 이 한세상의 감옥”이라는 대목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대목을 함께 살피면, 시에서 쉽게 아포리즘을 구하는 대신 삶의 한 비의를 직시할 수 있다.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독자의 마음 한편이 서늘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한 편의 영화는
필름의
마지막 신*에서 끝나버린다.
그러나 사진은
한 번 찍어 영원한 것.
영원을
긴 시간에서 찾지 마라.
내일 아침에 헤어질 운명의 남녀도
한 몸이 되어 뒹구는 오늘 밤의 그
순간만큼은
내 사랑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더냐.
무시무종(無始無終)이 어디 있으랴.
반짝 빛나는 플래시의 섬광,
그 한 찰나가 바로
영원인 것을.
-「찰칵」 전문
이 시에도 역설의 묘미가 드러나 있다. 이 시에서 펼쳐지는 것은 시간의 역설이다. 모든 일에는 자초지종이 있기 마련이나 영원의 편에서는 그것 역시 단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주지하듯 근대인들은 직선적 시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7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앤드루 마블(Andrew Marvel)은 「그의 수줍은 연인에게 To His Coy Mistress」에서 “그러나 등 뒤에서, 나는 항상 듣는다 / 날개 달린 시간의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를(But my back I always hear / Time's winged chariot hurrying near)”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직선적 시간관은 한편으로는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진보적 낙관을 반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등 뒤에서 육박하며 우리를 떠미는 시간에 대한 경계와 부담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비판적 인식을 보여준 시인 중 한 명이 옥타비오 파스일 것인데 그는 『진흙의 아이들』에서, 직선적 시간관이 기독교적 영원성의 가치를 세속화한 것이라고 비판하며 이에 맞서 서정시는 모든 시간들의 교차점으로서의 현재를 강조한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재를 미래를 기약하는 화폐로 바꾸는 것이 영원 앞에 선 이들의 세속적 태도라면 찰나적 순간 속으로 모든 시간을 수렴시키는 것이 시적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찰칵」 역시 이런 시적 비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 찰나가 바로 영원인 것”이라는 말은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를 성화하는 직선적 시간의식 대신 현재 속으로, 찰나 속으로 모든 시간을 수렴시키는 순간의 시학을 보여준다. 모든 것들이 웅성거리는 찰나를 포착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시적 ‘순간’의 비전이다.
2. 응시와 시선의 역설
이처럼 시적 역설의 작동 기제는 반대자들의 수렴을 통해 기지의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설은 항상 이질적인 타자와의 마주 섬을 전제로 한다. 다음 두 작품은 이를 시선의 교환이라는 맥락 속에서 상관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
저 너머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멀리서
마냥 바라보기만 했던,
새날이 밝아오고 찬란히 무지개가 뜨던
언덕 너머 그 하늘,
가로막는 장성은 높고 가파르기만 한데
굳게 닫힌 문, 단단한 포루(鋪樓).
해자(垓字)는 간신히 건넜건만
내 휘하엔 병력도 무기도 변변치 않아
다만 펜 하나 들고 이 험한 장벽,
어떻게 깨부시고 넘을 것인가.
탁자 앞에서 오만하게 버티고 서
날 굽어보는 그 벽의 서가(書架) ,
용기를 내서
사다리를 놓고 기어올라
간신히 한 권의 장서(藏書)를 뽑아든다.
부질없이
석축(石築)에 괸 돌 하나를 허문다.
-「만리장성」 전문
(2)
죽어 저세상에서 이승의 잘한 일 못한 일 다 심판받을 때 이 골목 저 골목 촘촘하게 설치된 지상의 감시 카메라에 찍혀 그 증거자료로 제시될 녹취 녹화 필름 한 통, 예수인지 석존(釋尊)인지 하늘에 큰 CCTV 한 대 매달아 놓았다. 어두운 밤엔 서치라이트까지 동원해서 불 밝힌 그 환한 카메라 렌즈.
-「보름달」 전문
인용된 두 편을 함께 읽으면 “저 너머”의 세상을 내다보는 시선과 그 시선을 들여다보는 응시가 교차하는 현장을 그려볼 수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주체의 시선(the sight)은 항상 큰타자의 응시(the gaze)의 일부이다. 모든 욕망이 매개된 욕망이듯 시선 역시 응시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다. 「보름달」에는 이 응시의 현전을 전제하는 무의식이 드러나 있다. 보름달과 CCTV의 유비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열망과 실천이 언제나 미혹과 환희 사이를 왕복하기 때문이다. 미혹이 환희로, 환희가 미혹으로 전신하는 까닭을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비록 응시의 주체가 “예수인지 석존(釋尊)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응시가 있다는 유력한 표지만을 가까스로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해(解)를 알지 못한 채 단지 열망하는 존재일 따름이라는 자각이다. 이 열망의 절박함이 「만리장성」에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에는 심리적 원경과 체험의 근경이, 추상과 구체를 오가는 이미지들에 의해 절묘하게 직조되어 있다. 아마도 이 구도를 구성하는 시적 진술의 얼개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① 저 너머엔 /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② 가로막는 장성은 높고 가파르기만 한데
③ 펜 하나 들고 이 험한 장벽, / 어떻게 깨부시고 넘을 것인가.
④ 한 권의 장서(藏書)를 뽑아든다.
⑤ 석축(石築)에 괸 돌 하나를 허문다.
①에서 ⑤에 이르는 과정이 이 시의 중심 사건이라면 그 사이사이에, 적재적소에 쓰인 네 개의 부사어는 이 사건의 함의를 적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멀리서”, “다만”, “간신히”, “부질없이”가 그것이다.
①과 ② 사이엔 “멀리서”가 있다. “새날이 밝아오고 찬란히 무지개가 뜨던 / 언덕 너머 그 하늘”이라고 묘사된 바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 시의 화자는 저 너머의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은 채 “멀리서” ㅡ 아마도 이는 물리적 거리이면서 동시에 심리적 거리를 지시하는 것일 터인데 ㅡ 이를 내다보고 있는 듯하다.
②와 ③ 사이에는 “다만”이라는 시어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어를 전후로 이편의 삶과 저편의 삶을 가르는 장성은 화자의 구체적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와 장서의 장벽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 전환과 더불어 “포루”, “해자”, “병력”, “무기”와 같은 이미지들은 장성과 “서가”에 양의적으로 포개어진다. 이제, 바라만 보던 “저 너머”에 가닿기 위한 구체적 간난고투가 있었음을 암시하면서 장성의 원경은 생활의 근경으로 효과적으로 변환된다. 아마도 여기에 언어적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라는 표현을 붙여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장면들이 이미지를 통해 교차·변환되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할 때 “다만”이라는 시어는 세 가지 의미 층위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제아무리 절박한 열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이 공성전의 승기를 잡기는 쉽지 않다. 둘째, 남은 전력이 크지 않지만 퇴로는 없다. 따라서, 셋째, 이 도전을 멈출 수도 없다는 것이다. ③과 ④ 사이의 “간신히”라는 라는 시어가 이 전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아마도 이 시에서 가장 문제적 시어가 있다면 바로 ④와 ⑤ 사이에 슬쩍 자리 잡은 “부질없이”라는 부사어일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부질없다는 것일까? 장서 한 권을 독파한다고 해서 석축이 무너질 리는 없다는 것일까? 어쩌면 필생의 것일 이 싸움은 그저 도로(徒勞)일 뿐이라는 말인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시선이 응시의 부분집합인 까닭은 “예수인지 석존(釋尊)인지” 모를 큰타자(the Other)의 응시의 방향과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응시에 자신의 욕망을 합치시키기 위한 신경증적 열망이 아니라 “저 너머”를 더듬는 데 열심인 시선이 바로 그 열심 때문에 결국 응시에 포개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주체는 해자를 건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부질없이”는 승산 없는 싸움 끝에 내거는 백기가 아니라 외통수의 일념을 북돋는 깃발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 기표는 한 권의 장서를 빼내는 것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체념이 아니라 결국은 그 부질없음으로 인해 석축이 기울 수도 있다는 믿음을 건사하는, 그리하여 계속 환유적 운동을 작동시키는 결핍과 부재의 기표가 된다.
3. 척도의 역설
‘존재의 사슬(chain of being)’이라는 말만큼 인간 중심주의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 피라미드에서 비록 신이 최상위에 놓인다고는 해도 여전히 ‘척도(unit of measure)’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간이다. 식물이나 동물이 모두 인간이라는 척도에 의해 재단될 여지가 충분하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만물은 인간을 중심으로 계량된다. 그러나…….
그것도 남녀의
성 구분일까.
이 세상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먹기 위해 아우성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하나님께서는 날개나 발이 아니라
먹는 방법으로 날짐승과
들짐승을 구분해주셨다.
모든 새들의 부리는 젓가락,
모든 들짐승의 주둥이는
숟가락.
-「모든 새들의 부리는 젓가락」 전문
만물이 그 스스로 척도가 된다면 사정은 어떨까? 인간-척도에서 새의 부리와 들짐승의 주둥이는 유용성 계량에 유리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새와 들짐승들 자신의 척도에서 인간은 무엇일까? 이 시에서 척도는 두 번 펼쳐진다. 첫째, 계문강목과속종을 분류하는 인간의 척도가 아니라 새와 들짐승의 척도로 측량된 세계란 무엇일까를 상상해보게 한다. 둘째, 이마저 뛰어넘어 신의 척도에서 인간과 새와 들짐승이 서로 무한히 상대적인 존재자들로 계량될 때 세계는 무엇일까를 헤아려보게 한다. 척도의 형이상학이라고 할까, 형이상학적 척도라고 할까? 존재론적 평등이라고 할까, 척도의 무한 상대주의라고 할까? 아니면 그저 척도의 역설이라고 할까? 어떤 드문 경우에 한해서, 시의 언어가 보여주는 시계(視界)는 이렇게 광대무변하다.

조강석 I
문학평론가.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한국시의 이미지-사유와 정동의 시학』 『틀뢴의 기둥』 『이미지 모티폴로지』 『경험주의자의 시계』 『아포리아의 별자리들』 『한국문학과 보편주의』 『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김달진젊은비평가상〉 수상. 현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
2022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