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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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ㅡ 아직 다 하지 못한 말
어떤 폭로는 타인의 고통을 숨긴 채 정당방위로 치부하려 애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런 논리는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가령, 내가 싱크대에서 낙지 손질을 하려고 비닐봉지를 여는 순간 뒤로 나자빠질 뻔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처럼. 엄청 크고 징그러운 생명체가 싱크대에 빨판을 붙인 채 공격적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얼마나 민첩하고 재빠른지 손을 쓸 새도 없이 싱크대를 장악했다. 발만 동동 구르기엔 내 나이가 좀 우스워져서 집게를 들고 그것들을 싱크대 안으로 집어넣으려 애쓴다. 사투가 시작됐다.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자와 죽기를 바라는 자. 어떤 싸움이든 누가 더 끈질기게 버티는가의 문제다. 차마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물컹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싸움에 가담한다.
치사한 방법이지만 밀가루를 뿌렸다. 상대는 처음보다 동작이 느슨해졌다. 마침내 내 손이 물컹한 그것에 닿았다. 이걸 먹겠다는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지만 멈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낙지를 밀가루로 구석구석 문지르고 닦아내며 수돗물로 씻어낸다. 공포를 견뎌낸 손은 아무렇지도 않게 빨판을 떼어내며 온몸에 묻은 더러운 부유물을 훑어내린다. 마치 아이를 목욕시키듯 자연스러운 손놀림이다. 처음보다 얌전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포기를 모르는 생명체다. 굵은 소금을 뿌린다. 저 혼자 소금에 몸을 비벼대더니 차츰 풀이 죽어갔다. 그래도 여전히 싱크대 위를 기어오르려는 의지는 멈추지 않는다. 살아있음은 얼마나 지독하게 죽음을 견디는 일인가. 물이 펄펄 끓어오를 때 그것을 집어넣었다. 집게에 달라붙으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걸 간신히 물속에 집어넣었다. 끝까지 몸부림치며 달아나길 시도했지만 결국 죽은 몸뚱어리로 가라앉았다. 식탐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먹는 일이 어쩐지 굴욕스러워진다. 살고자 발버둥 치는 생명을 기어코 내 손으로 죽여서 먹어야 하는 이 동물적인 습성. 최고의 포식자는 인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죄책감 따위는 순간일 뿐이다. 인간은 시각에 의존하는 동물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징그러움 따위는 쉽게 지워진다. 동물의 가죽을 벗겨낸 현장을 보지 못했고 핏물이 씻겨나간 흔적을 떠올릴 리 없다. 그러니 자랑스럽게 벗겨낸 악어가죽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여우 털을 목에 두르고, 소가죽을 신고 다닌다. 타인의 부러운 시선을 즐기면서. 살인의 추억은 생명체라면 누구나 몸속에 축적된 본성 같은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이렇게 잔인하다. 분명 감각하면서도 무감각하려는 습성이 뇌를 떠난 손이 하는 일이다. 손은 그저 뇌가 시킨 일을 했을 뿐이라며 오히려 피해자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성큼성큼 손이 걸어온다. 복도가 울리더니 드르륵 문이 열린다. 척~ 철썩. 순식간에 공포의 기운에 잠긴다. 아침부터 뺨 때리는 소리로 교실이 요란하다. 왜 맞았을까. 그러나 ‘왜’라는 물음을 절대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도리어 화(禍)를 부르는 행위가 되어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오니까. 종아리와 엉덩이를 회초리로 맞는 것도 억울한데 손으로 뺨을 맞는 일은 수치스러움을 넘어 참담하다.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단지 복도에서 뛰었다는 이유만으로,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는 이유로 손은 화(禍)의 노예로 전락한다. 소위 X세대라 불리던 때까지 흔하게 겪는 일이었고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하는 시절 탓으로 돌리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 우악스러운 손으로 아이의 뺨을 때리고 약한 자의 뺨을 때리고 짓밟는 행위가 매일매일 벌어진다. 고통에 세뇌당한 뇌는 손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저 방어하기만 할 뿐. 손은 학대가 시작되는 곳이다. 머리보다 먼저 손이 움직인다. 이제 손은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뇌는 고장 난 채로 손의 명령을 따른다. 손의 노예다. 때리는 시늉만 해도 움찔거리며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손. 절대로 착한 기운으로 돌아설 수 없다. 마침내 두 손이 차가운 쇠사슬로 채워지기 전까지. 맨 먼저 선악과에 손을 댄 최초의 감각. 그래서 손은 처음 잡은 감각의 기운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습관이 되기 전에 끊어내지 않으면 손은 처음의 감각으로 가는 걸 멈추지 못한다.
어느새 우리의 아침이 손가락 터치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순간 ‘이모티콘’의 노예가 된다. 계절마다 꽃이 쏟아지고 구름이 쏟아지고 울음이 쏟아지기도 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좋아요’를 누른다. 감정이 이모티콘에서 나오고 손으로 전달된다. 손가락 터치 하나로 세상이 열리고 순식간에 지옥이 열린다. 손가락 하나로 수억의 돈을 날리기도 하는 세상이다. 손은 뇌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은 저 혼자 이탈하기를 좋아한다. 신체 하나하나에 달린 촉수들마저 자신들의 미래를 향해 고군분투한다. 그들도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한계에 도전하며 진화를 시도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신체의 모든 영역은 퇴화하지 않고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중인지도 모른다. 손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폭력과 다정의 얼굴로 운명을 쥐고 흔드는 일까지. 손가락에서 끊임없이 이야기와 음악이 흘러나오고 때론 피가 흘러넘치기도 한다. 손은 많은 걸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내면의 말들을 흘린다. 지문이 생겨난 이유다.
그 손을 잡았을 때 얼마나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지. 그래서 그는 처음에 손을 잡지 않으려 했다. 손에 땀이 너무 많아서. 콤플렉스가 되어버린 손을 아무도 잡으려 하지 않는다고. 그 손을 잡는 순간 여자들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다고. 닦고 또 닦아도 땀이 멈추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면 손은 참 많은 말을 한다. 땀이 나는 증상도 차갑게 얼어버리는 증상도. 무심코 팔짱을 낀다거나 턱을 괸다거나 주먹을 쥔다거나 손을 흔드는 모습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내면의 말을 대신하는 증상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표정을 읽는 것보다 손을 읽는 것이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훨씬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손을 그렇게 꽉 쥘 필요는 없잖아요. 되도록 정치인들과는 악수하지 않는 게 좋지만.
손목터널증후군입니다. 어느 날 나에게 그런 진단이 내려졌다. 키보드를 누를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몰려왔다. 섬에서 살다 다른 지역으로 일을 보러 가거나 여행을 가게 됐을 때 우리나라에 터널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가도 가도 터널이었다. 산을 깎고 벼랑을 깎고 숲을 깎아내려 만든 인공 굴이다. 문명은 조금 더 편하게 사람의 길을 내려고 자연을 이용한다. 자연스러움이 인공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숲은 사라지고 산도 절반이 무너지고 언덕은 이름마저 지워진다. 제1터널, 제2터널, 터널은 계속 이어지고 갑자기 숨이 막혀온다. 터널로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조여오면서 숨이 막힌다. 수시로 밖과 안을 드나드는 통에 멀미가 나 영혼은 이미 가출한 상태다. 정착지인 손으로 가는 기차는 갑자기 덜컹 덜컹거리다 선로에 그대로 멈춰선다.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코스모스가 피고 선로에서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 연인들을 지켜보았다. 점점 잠은 녹이 슨 채로 까무룩하다 희미해진다. 이제 이 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폐허가 되어가는 순간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손끝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춘 손을 읽어보려고 손금을 보러 갔다. 어떻게 그 실금들이 내가 살아온 길이라는 걸 증명하는지. 손금이 어디로 뻗어 있고 어떻게 갈라지는가, 어떤 모습으로 끊겨 있는지의 형태로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읽어내는 것인지. 자식은 셋쯤 낳겠고 이혼을 할 수도 있겠고 고집이 좀 센 편이죠? 돈은 들어오는데 모이지는 않네요. 두뇌는 명석한 편이고 예술적인 감각이 있네요. 단명할 일은 없겠어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지만 대충 비슷하다고 퉁친다. 어차피 삶은 거기서 거기인 일들이 왔다가 가니까. 좋은 건 믿고 싶고 틀린 건 잊고 싶으니까. 대충 비슷한 걸 맞다고 우기는 일이니까. 그래도 손금을 믿고 싶은 건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사주를 보거나 점을 보는 행위도 불안을 덜어보려는 심사니까. 인체의 신비를 과학적으로도 다 밝혀낼 수 없는 걸 보면 운명을 아주 미신의 세계로 던져놓는 것도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을 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람은 사람을 더 믿는 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내 손은 늘 차가웠다. 머리에서는 내려놓았다고 하지만 손에서는 여전히 결핍이 묻어 있었다. 사계절 냉기가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축적되어온 결핍이 끊임없이 내 손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시가 되고 산문이 되었다. 어떻게 내 손에서 그런 말들이 흘러나오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악다구니들을 가라앉히고 쓰다듬으며 다시 둥글게 만들려고 애썼다. 날카로운 언어를 쓸수록 마음이 피폐해진다는 걸 알았으니까. 썼다 지우는 날들을 반복하며 손끝은 조금씩 무뎌졌다. 결핍은 그 자체라는 걸 인정하게 되는 순간 손끝은 무감각으로 대응한다.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하고 덥석 올라오는 손을 그러거나 말거나로 무시한다.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손으로 음식을 뒤집는 일도 아무렇지 않다. 지문이 조금씩 지워지면서 감각은 서서히 텅 빈 허공을 지향한다. 이제 무엇을 써야 할까.
눈을 떠보니 어느새 겨울이다. 겨울은 주머니에도 손이 필요한 계절. 비어 있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는다. 손을 치우자 두 발이 소리를 낸다. 손은 발이 내는 소리에 꼼지락거리며 참견한다. 주머니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쉴 새 없이 쫑알거린다. 그런 손을 다른 손이 잡는다. 손에서 움찔거리는 무엇인가가 흐른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면서도 온기가 많은 쪽으로 가려는 두 손의 맞닿음. 손과 손은 잠시 아무 말이 없다. 손에서 흘러나오던 언어들이 일시에 멈췄다. 하나의 주머니에 두 손이 포개어질 때 사랑이다.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말. 손은 그렇게 또 마음을 붙잡는다.

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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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