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수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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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공시사 월평
나는 나의 미래이다
● 신수진
뒤돌아보지 마라. 한 세계를 지나 다른 한 세계로 완전히 넘어서기 전에는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는 동서고금의 많은 이야기 속에서 원형처럼 변주되어 왔다. 예컨대 장자못 설화에서 시주를 청하는 스님에게 악행을 저지른 욕심 많은 부자의 집은 물에 잠기고 스님을 따라나섰던 그 집 며느리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 자리에서 돌이 된다. 한편 구약 성서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죄를 심판을 받을 때 롯의 아내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도 명부까지 내려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지만 지상에 올라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영원히 그녀를 잃고 만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 끝내 뒤를 돌아보고 만 자들은 목격하고 증언하려는 순간, 의심하고 확인하려는 순간, 두려워하고 그리워하는 순간, 그 자리에 영구히 굳어버린다. 지난 세계 속에 유폐되고 박제되고 봉인되듯 꿈꾸었던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낮과 밤이 서로의 자리를 내어주듯이, 삶과 죽음이 각자의 시계로 지켜지듯이, 과거가 지나가야 현재를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지나온 뒤 다시 되돌아봐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나아가야 한다.
뒤돌아본 순간 사라져버린 에우리디케처럼 시는 현현되리라 믿었던 바로 그 찰나에 사라져 버린다.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무지개와 같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에우리디케를 잃고 홀로 귀환한 뒤 그 부재와 결핍으로부터 시작된다. 절대적 상실과 결여의 고통 속에서, 신성 모독과 금기 위반의 반항 너머에서, 필연적인 몰락과 방랑의 역사 중에서, 마침내 시는 탄생한다. 시는 불가능성으로 점철된 파고 속에서 자기 운명의 부름에 응답하는 역설적인 형식이다.
1
내가 뚫고 온 어스름이었다, 나는
내 발밑에서 갈라지는 얼음이었다
나는 우연을 섬겼고
나를 파괴하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불 속에서 태어나 물속에서 사는
구멍 숭숭 뚫린 돌
나는 나를 증오하면서 그리워하였다
그것이 죄였으니
다른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창문들은 흐려지고
신발은 헐렁해지고
말없이 하늘을 쳐다봐야 하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2
매일매일 나를 부르는 다른 목소리가 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파란 뱀들,
손으로 만지면
순식간에 부서지고 태어나는 수많은 얼굴이 있다
더 늦지 전에 나는
그에게 가야 한다
무덤의 흙을 파며 혼자 노는
그에게 고백했던 말
그 소년이 흙에게 속삭이던 말을 찾으러 가야 한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기록할 수 없는
기록하는 순간
사라질지 모를
― 전동균, 「기록」 전문(《현대시》 2022년 12월호)
‘세계의 자아화’라고 일컬어질 만큼 시는 나와 세계의 창조적 성립과 관계에 주목한다. 시는 불완전한 자신에 대한 정직한 탐구이고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뚫고 온 어스름”이자 “내 발밑에서 갈라지는 얼음”이다. ‘나’는 “우연을 섬”기고 “나를 파괴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나’는 “불 속에서 태어나 물 속에서 사”는 “구멍 숭숭 뚫린 돌”이다. 시적 화자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선언하고 있는 이 음성에는 세계와 불화하는 자아에 대한 순순한 인정이 있다. 금이 간 마음을 안은 채 버텨온 한 생에 대한 견고한 기억이 있다. 자신에 대한 증오와 그리움을 죄로 여기는 곳, 다른 날은 오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는 곳, 창문들이 흐려지는 곳. 지금 여기의 황무지를 인화하면서 ‘나’는 ‘나’를 횡단하는 실험과 모험을 계속한다.
“매일매일 나를 부르는 다른 목소리” “공중을 날아다니는 파란 뱀들” “만지면 순식간에 부서지고 태어나는 수많은 얼굴”들의 환영이 번갈아 나타난다. 그러나 불현듯 찾아오는 이 미지의 장면들 현기증을 일으키는 낯익은 장면들로부터 시인은 자신이 가야 할 먼 시의 첫 장면을 기획한다. 그것은 더 늦게 전에 무덤의 흙을 파며 혼자 놀던 소년에게 가는 일이다. 그 소년이 흙에게 속삭이던 말을 찾으러 가는 일이다. 길은 여러 갈래로 자라나고 있다. 그 길들을 따라가다보면 떠나보내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나고 어린 날의 자신도 만날 수 있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진실과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들은 시의 기표로 ‘기록’되어간다. 신화와 전설 속의 인물들이 뒤돌아보아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결코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때 시가 출현하는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오래전 ‘나’들을 마주하고 겹겹의 ‘나’들을 들어주는 일. 너이다가, 나이다가, 모두의 말로 바뀌는 순간들을 기록하는 시인은 폐허와 구원을 동시에 기도하는 자다. 존재와 부재를 함께 꿈꾸는 자다. 과거를 기다리고 미래를 기억하는 자다.
저수지 모퉁이를 돌아
낮에도 희뿌연 안개를 걷다 보면
작은 샛길이 나온다 했어요
길 끝에 딱 한 채,
물결 기와가 반짝이는 집
지도는 아무 소용 없으니
핸드폰 앱도 끄고 마음도 끄고
길 잃은 듯 오라 했어요
어린 내가 부르르, 등목을 하거나
늙은 내가 꾸벅꾸벅, 마루에서 졸거나
시간이 여러 겹으로 출렁여도
당황하지 말라 했어요
흰빛, 분홍빛, 붉은빛
담 밑의 봉숭아가 꽃즙을 짜내
모여든 귀신들 혈색을 되살려놓는 집
물 위에 얹어놓은 돌멩이가 가라앉기 전에
세계가 중력을 되찾기 전에
조금 서두르라 했어요
작은 바람 한 줄만 지나가도
집이 흩어져버릴 수 있다 했어요
― 길상호, 「수잠」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12월호)
저수지 “모퉁이”를 돌면 낮에도 희뿌연 “안개” 속에서 나타나는 “작은 샛길”이 있고 그 길 끝에는 반짝이는 집이 한 채 기다리고 있다. 모퉁이와 안개와 샛길이 인도하는 곳, 지도도 앱도 소용이 없는 곳,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에 갈 때는 그래서 “마음”조차 끄고 가야 한다. “길 잃은 듯 오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힘도 작용하지 않는 이 성역의 집으로부터 초대받은 자다. ‘나’가 홀린 듯 이끌려 가기도 하거니와 누군가 ‘나’를 부르듯 데리고 가는 형국이다. 물론 이 길 위에서도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서 배워왔듯 뒤돌아보면 안 될 것이다.
상처와 꿈으로 점철된 세계의 극점들을 순례하는 ‘나’는 “흰빛, 분홍빛, 붉은 빛” 봉숭아 꽃즙으로 귀신들을 형형색색 살려놓는 집에서 “어린 내가 부르르, 등목을 하”고 “늙은 내가 꾸벅꾸벅, 마루에서 조”는 시간과 출렁이며 조우한다.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듯 이상한 조화 속에 들어선 ‘나’에게 “물 위에 얹어놓은 돌멩이가 가라앉기 전에” “세계가 중력을 되찾기 전에” 작은 바람에도 “집이 흩어져버릴 수 있”으니 서두르라고 재촉하는 음성이 있다.
꿈속의 꿈과 같은 장면들을 그러모은 길상호의 시적 고백은 시 쓰기에 대한 메타적 연출에 다름 아니다. 시를 쓰는 것은 자기 세계를 갖는 것이다. 그 자기 세계가 비록 곰팡이와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지하실일지라도 열쇠며 사다리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어둠과 악취를 견디며 두려움 없이 치열하게 서식하는 일. 혹여 내 안의 꿈이 나를 저버릴까 봐 나와 너를 기억할 수 있는 감각을 망각할까 봐 언제일지 모를 개화의 순간을 지나칠까 봐 숨죽이면서 안달하면서 서성이면서 기꺼이 꿈속의 꿈에 잠입해 음모와 배후를 갖는 일. ‘나’가 찾아간 집이자 ‘나’를 불렀던 그 집은 획일적 현실 속에서 고유한 자기 세계를 지어가기 위한 시인의 노력을 보여주는 오브제다.
내가 아는 시의 방식은 현실의 딜레마와 대결하고 극복하기 위해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 처한 모순과 부당을 끌어안고 그마저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시는 어떤 다른 차원에 당도해서 판타지를 이루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험난하고 고된 여정을 경유하여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집으로 귀환함으로써 가까스로 계몽과 갱신의 순간을 획득한다.
옅은 잠을 의미하는 ‘수잠’은 꿈과 현실의 두 겹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비의를 깨닫게 하기 위한 대전제의 서막으로서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로 거듭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상처와 꿈으로 남았던 괄호에 가능성으로서의 ‘나’와 ‘너’ 그리고 ‘모두’라는 충분조건을 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핑계도 없이 고독하다.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져 있다. 인간은 어딘가 의지할 곳도 없이, 무언가 도움도 없이, 각각의 인간을 만들어 내야 하는 형벌에 처해져 있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라고 했던 『존재와 무』의 사르트르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나는 나의 미래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하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을 기억하면서 나는 홀로 무한히 자유롭게 나아갈 것이다. 시는 바로 그 존재와 비존재의 틈에서 현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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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 《공정한 시인의 사회》의 월평 연재를 맡으며 시적 발견의 순간을 공유하고 남겨두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등장하는 ‘자신과 세계를 한 번 더-깨닫는 마음’이라는 뜻의 ‘아나-그노리시스’를 코너의 제목으로 지었는데 어느덧 마지막 회를 쓰게 되었다. 이런 저런 글을 쓰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새벽마다 나의 작은 공간에 찾아와 불을 밝히는 심정으로 이곳에서 따뜻하게 머무르곤 했음을 고백한다. 매달 별자리처럼 탄생해 나에게 아득한 영감을 주었던 시인들의 작품과 어디선가 나의 월평을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셨을 독자 여러분께 깊이 깊이 감사드린다. 이 방을 나서자마자 금방 뒤돌아보고 싶어지겠지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날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또 멀리 멀리 갈 것을 약속드리고 싶다.
ㅡ 그동안 “신수진의 [아나그노리시스 시학]”을 애독해주신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ㅡ

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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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