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024
Extra Form Output
저자 임채성 

 

 

 

 

등나무 아래 칡꽃

칡넝쿨 아래 등꽃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에서 파생돼 유래한 이 말은 대중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경고하는 문구로 자주 인용된다. 선거철도 아닌 지금 이 말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12월의 초두에 터진 황당무계한 정치적 내란 사건 때문이다.

  2024년 12월 3일 22시 28분,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북 세력을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독단적이고 반헌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와 용기 있는 시민들의 발 빠른 대처로 6시간 만에 계엄령은 해제됐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하다.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빠져나가면서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권력 공백에 따른 외교 무대에서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였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짐으로써 수출 전선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한마디로 경제는 바닥을 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사회는 갈등과 분열의 혼란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민생과 안보에 대한 걱정이 커져 가는 가운데 왜 정치가 안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현재의 정권이 반면교사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국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혼란의 시기를 겪어온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한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겪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억압적인 독재를 겪다가 4·19 때 잠깐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전제 정치로 복귀했다. 제3공화국 시절 명목상의 민주주의를 하다가 유신 독재가 자행됐고, 1979년 말 신군부가 등장했다. 1980년대의 치열한 반독재 투쟁 끝에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마침내 직선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다. 민주화 이후 제도와 시스템에서는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었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이다. 기득권 세력의 권위주의적 행태에 따른 편법과 불공정, 무책임과 부도덕성은 국민의 불신을 더욱 깊어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우리의 정치판은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국민적 절망감과 그에 따른 자포자기가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지역과 이념, 정파에 따라 사분오열된 상황이다. 정당과 계파 간의 싸움뿐만 아니라 국민들까지 합세하여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언론과 방송도 파가 갈려 보도의 공정성을 잃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 혼란을 부추기기도 한다. 나라가 온통 어지러운 것은 갈등을 야기시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사분오열된 오늘날의 정치판은 조선을 망하게 만든 당파 싸움의 진앙인 붕당정치를 보는 것 같다.

  붕당(朋黨)은 중국과 조선에서, 정치적 사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당파 집단을 이른다. 붕당정치는 학문을 바탕으로 사회경제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는 민주적인 정치형태로 볼 수 있다. 공존이라는 큰 틀에서 상호 비판과 견제로 건강한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가히 고무적인 제도이다. 그러나 세상을 리(理)와 기(氣), 청(淸)과 탁(濁), 정(正)과 사(邪),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관념으로 양분하던 주자학적 이분법에 따라 아(我)와 적(敵)을 나누고,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파당적 근본주의로 흐르면서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조선의 제14대 임금인 선조는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왕권 유지에 불안감을 가져 신하들이 파를 나누어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것이 조선 당파 싸움, 계파정치의 시초라고 한다. 조선 초기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 사림파의 득세로 이어진 후 다시 붕당으로 쪼개진 것이다. 결국, 조선의 신하들은 패거리 정치를 통해 자기 계파 인사를 요직에 앉혔고, 반대파에게는 모함이나 역모의 죄를 씌워 삭탈관직시켰다. 임진왜란을 예견하고도 막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국익과 국민의 안녕 대신 자기 세력 유지와 증강에만 전념함으로써 조선이 멸망하는 데 일조했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이 치러야 했다. 그랬던 당파 싸움이 20세기의 우리나라 정당정치로 이어졌고, 다시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21세기판 ‘증오의 정치’로 탈바꿈한 것이다.

    

동창(東窓)이 발갓나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쇼 칠 아해난 여태 아니 니런나냐

재 너머 사래 긴 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진본)』에 수록된 내용을 현대어 표기로 옮긴 것이다. 『해동가요』, 『가곡원류』, 『병와가곡집』 등에도 실려 있는데, 시조집마다 표기가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다. 이 시조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작품이다. ‘노고지리’는 종다리(종달새)의 옛말이다. 봄에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서 잘 지저귄다고 하여 봄을 상징하는 새로 인식된다. 아침이 훤히 밝아 새들도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소를 치는 아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꾸짖는다. 소에게 여물을 먹여야 밭을 갈러 나갈 텐데 늦잠 자는 아이 때문에 밭일이 늦어진다는 질책이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갈려면 하루해도 짧기 때문에 일찍 일을 나갔어야 한다는 조바심도 깃들어 있다. 본격적인 농사일이 시작되는 봄은 모든 사람에게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봄에 밭갈이를 부지런히 하라는 이 구절 때문에 ‘권농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 있는 속뜻을 곱씹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시조는 남구만이 강릉부 망상리(동해시 망상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지은 것이다. 그 때문에 ‘권농’과 ‘근면’의 주제는 표면적인 내용일 뿐 실제 이 시조가 담고 있는 내용은 작자가 살았던 당시의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농축된 은유와 상징의 세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시조는 음풍농월의 유유자적 속에 자신의 대의를 숨겨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나 정변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중세의 정치적 격변기에는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우의(寓意)’라는 것은, 그 시대의 세태나 정서를 노래하거나 비판하는 데 있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자연에서 소재를 빌려와 그 이면에 작자의 뜻을 숨겨 놓는 은유적 기법, 즉 알레고리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고차원의 시조미학을 남구만의 시조에서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조를 다시 보면, 초장에서는 임금과 신하를 떠올리게 한다. 흔히 태양은 임금을 상징한다. 동창이 밝았다는 것은 임금의 성총이 온 누리에 퍼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노고지리가 시끄럽게 울고 있다. 노고지리는 종다리, 한자어로 된 이름은 고천자(告天子)라고 한다. 고천자의 뜻은 ‘하늘에 일러바치는 자’를 일컬음이니 다시 말해 ‘고자질쟁이’의 점잖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중상과 모략을 일삼는 간신배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임금의 성총을 흐리게 하는 간신배들이 득세한 세상을 초장에서 보여준다는 의미다. ‘소 치는 아이’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관리, 즉 중장에서는 세상이 어지러운데도 복지부동하고 있는 관료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종장은 나랏일이 산적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쟁만 일삼느냐는 내용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당대 시조가 담고 있는 우의적인 측면에 비춰보면 이런 해석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관점이나 빛의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일종의 홀로그램 효과라고나 할까. 다사다난했던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아온 남구만의 인생역정을 돌아볼 때 그가 유배지에서 한가롭게 읊을 만한 내용이냐에 대한 의구심에 따른 것이다.

  남구만은 조선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이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지만, 1629년(인조7) 충주의 외가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51년(효종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효종7)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전라도 관찰사와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숙종 초 대사성·형조판서에 올랐다. 1679년(숙종5) 좌윤이 되었으며, 같은 해 윤휴·허견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경남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역임했으며, 1680년(숙종6)에 이어 1683년(숙종9) 대제학에 올랐으며, 병조판서에도 제수되었다. 1684년(숙종10)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숙종13) 영의정에 올랐다. 이즈음 송시열의 훈척(勳戚) 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해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남해 유배 이후 승승장구하던 남구만의 정치적 역정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전기를 맞게 된다.

  ‘기사환국’이란 1689년(숙종15)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권력을 잡은 정치적 사건을 일컫는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후사가 없자, 숙종은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희빈 장씨다.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를 낳게 되었고,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후에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다. 이에 서인은 반대했고, 남인은 찬성했다. 이 과정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다. 이로써 1680년(숙종6) 경신환국으로 권력을 잃었던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고,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었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계보는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게 되는데, 여기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된다.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던 남구만도 서인의 무리였기 때문에 남인이 득세한 기사환국의 화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이 사건으로 남구만은 강릉부 망상리에 유배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풀려난 남구만은 1694년(숙종20) 인현왕후 복위문제로 촉발된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1696년(숙종22)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숙종27) 장희빈을 엄하게 처벌하자는 노론의 주장에 맞서 가벼운 처벌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자 사직하고 낙향해 버렸다. 그 뒤에도 부처(付處, 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와 파직, 서용(敍用)을 겪다가 1707년(숙종33)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종신 명예직으로 실무는 보지 않고 녹봉만 받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11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윽고 고향 땅은 야전장이 되어 갔다 

 

서울발 꽃상여 하나, 한길 덮은 만장 행렬

   

치열한 오월의 밤이

운암동을 흔들었다

 

가파른 망월 길의 징소리도 멀어지고

 

검게 탄 노점 언저리 두 노인의 긴 그림자…

 

고뿔 든 아침 태양이

빈 폐허를 쓸었다

 

언덕 위 하늘 집이 안개 속에 잠긴 주일

 

대낮에도 촛불 켠 채 아, 얼룩진 말씀이여

 

목 붉은 통성 기도를

파도 타고 흐른다. 

ㅡ 송선영, 「귀성록(歸省錄)」 전문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에는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4·19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이 시의 구절처럼 우리의 민주화 과정에는 수많은 피의 무늬가 흉터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그중의 한 장면을 영사하고 있는 시조가 송선영 시인의 「귀성록」이다. 이 시조는 1991년 4월 26일 학원 자주화 투쟁 중 진압 부대의 무차별 폭행으로 사망한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의 운구가 광주 시내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그것을 저지하려고 했던 경찰과의 사이에 벌어진 ‘운암동 투쟁’을 그리고 있다. 당시 유가족 및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는 강경대 열사의 유해를 아버지의 고향이자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망월묘지공원에 안장하기로 결정하였다.

  강경대 열사의 운구 행렬은 5월 18일 서울에서 출발해 전남도청 앞에서 노제를 지낸 후 망월 묘지공원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운구 행렬의 시내 진입을 불허하고, 망월동으로 직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5월 19일 새벽, 운구 행렬은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서광주 나들목에 도착하였으나 경찰의 저지선에 막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전경 20개 중대의 저지선을 뚫기 위한 전투를 벌였으나, 철제 바리게이드를 치고 다연발 최루탄을 쏘며 공격하는 경찰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결국, 시위대는 우회로를 만들어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광주 시내로 진입한 운구 행렬은 밤 9시 50분경 금남로사거리에서 노제를 지낸 후 망월묘지공원으로 이동하였으며, 장례식은 20일 새벽 4시경에 끝났다.

  송선영 시인의 「귀성록」은 이때의 전쟁 같은 상황을 그리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강경대 열사의 운구 행렬을 그리고 있으나 그 기저에는 5·18민주화운동의 기억이 데칼코마니처럼 깔려 있다. “치열한 오월의 밤이 / 운암동을 흔들어”도 남는 것은 “두 노인의 긴 그림자”나 “고뿔 든 아침 태양”뿐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야전장’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당시 시민들이 느꼈을 무력감과 좌절감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이는 광주의 5월이 그때까지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임을 또한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특히, 1980년 5월 18일과 강경대 열사의 운구 행렬이 광주 시내로 진입하던 1991년 5월 19일이 모두 일요일이었다. 야전장으로 변한 운암동에 “치열한 오월의 밤”이 반복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목 붉은 통성 기도”를 통해 그런 고통의 역사를 딛고 일어서려는 시인의 목소리가 처연하다. 

   

등나무 아래에서 칡꽃을 생각하니

시청 앞 광장이 이상하게 넓어졌다

 

사람이 사람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처럼

 

등나무 아래 칡꽃

칡넝쿨 아래 등꽃

 

등속(等屬)의 꽃들이 세상을 밝힐 때도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모르는 척 지냈다

 

한 사람과 작별하고 세계관이 바뀌었다

 

매혹이 미혹으로

유혹이 당혹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한 계절을 건넜다 

ㅡ 인은주, 「갈등」 전문

    

  향토적 정감이 물씬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소년과 소녀의 아름답고 슬픈 첫사랑의 순수를 서정적으로 그린 소설 황순원의 「소나기」에는 칡꽃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칡꽃을 처음 본 소녀가 “꼭 등꽃 같네!”라며 신기해하던 장면이다. 이처럼 칡과 등나무는 많이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둘 다 콩과의 여러해살이 낙엽 덩굴식물로서 꽃도 비슷하다. 하지만 칡은 등나무와 갈등(葛藤)의 관계로 얽혀 있다. ‘갈등’이란 말에서 갈(葛)은 칡을, 등(藤)은 등나무를 뜻한다. 칡넝쿨은 왼쪽(시계 방향)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아 올라간다. 이처럼 삶의 방식이 다른 두 식물은 길게 뻗어갈수록 점점 더 얽혀들기만 한다. 개인이나 집단 간에 이해관계나 목표가 달라 서로 복잡하게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상태를 뜻하는 ‘갈등’이란 어원은 이 같은 두 나무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은주 시인은 갈등의 관계를 ‘시청 앞 광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광장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서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공론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울의 중심, 광화문에서 시청에 이르는 이곳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민주주의를 고취하는 공간이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02년 월드컵 응원전, 2016년의 촛불집회 등은 다수의 시민들이 모여 결집된 의견을 표출하는 민의의 대변장이었다. 특히, 올해 12월에는 비상계엄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갈등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처럼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민의가 분출하는 광장엔 반목과 갈등의 목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

  인은주 시인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시조의 화자는 ‘시청 앞 광장’에서 ‘갈등’을 겪으며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한다. 눈으로 보는 갈등의 세계가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깨달음에 이르는 인식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작중 화자는 등꽃과 칡꽃이 “세상을 밝힐 때도 /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모르는 척 지냈”지만, “한 사람과 작별하”면서 그러한 무관심과 외면의 태도를 버리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 결과는 “매혹이 미혹으로 / 유혹이 당혹으로” 바뀌는 아연한 세상이다. 세상은 꽃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라 여겼던 그간의 인식이, 그 꽃들은 사실 갈등으로 얽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의 당혹감이다.

  등나무는 5월경에 땅을 향해 보라색이나 흰색 꽃을 피운다. 반면 칡은 8월 즈음에 하늘을 향해 붉은빛이 도는 자주색 꽃을 피운다. 칡과 등나무가 아무리 얽힌다 해도 둘 다 사람에게는 유용하다. 칡은 식용식물이어서 쓸모 있고 등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므로 좋다. 갈등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갈등의 범위는 친구나 동료 등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하다. 갈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각자의 견해와 처지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어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을 분석해 근본적으로 치유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갈등이 폭발적인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도 각오해야 하므로 어느 정도 간극을 좁히는 노력은 꾸준히 시도되어야 한다. 인류발전의 원동력은 이러한 갈등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상호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창의와 도전의 촉매제로 승화시키지 않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한 계절을 건너”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ㅡ 그동안 “임채성의 [시조의 다락]”을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ㅡ

 

 

 

 

 

 

 

 


 

연재-임채성 (2).png

임채성  l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메께라』,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ㅡ

2024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