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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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ㅡ 불안과 동거
입안에서 계속 같은 말이 맴돈다. 이 말을 어딘가로 뱉어내야만 한다. 답답함은 자정을 훨씬 넘기고도 계속 굴러갔다 굴러온다.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른다. 말은 말의 꼬리를 잡으며 달린다. 멈출 생각이 없다. 이해하지만 납득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해는 상대방의 입장이고 납득은 나의 입장이다. 그러니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이해는 되지만 내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말이다. 이해한다는 말은 상대를 온전히 다 흡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타협점이 없는 상황에서는 벗어나기 위한 방책으로도 쓰인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면 처음 입안에서 굴렸던 말은 금세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간다. 생각의 꼬리는 토네이도처럼 어찌나 한곳으로만 휘몰아치는지. 그렇게 심장에 단단한 철심 하나 박아놓은 뒤에야 말의 후렴구는 서서히 잦아든다. 창문이 바깥을 드러낼 때쯤 겨우 말을 놓아주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눈앞에 자루 하나를 툭 떨군다.
자루를 열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에 빠진다. 자세히 보니 자루는 조금씩 꿈틀거렸다. 이 안엔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그 징그러운 무엇인가가 들어 있을 거야. 내 얼굴로 쏟아지는 상상을 한다. 어쩌면 전혀 다른 무엇이 쏟아질지도 모른다.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다. 저걸 열어서 확인하기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걸 굳이 확인하려는 습성. 판도라의 상자는 늘 그렇게 열린다. 조심스럽게 자루를 풀어보려고 끈을 잡아당긴다. 그 순간 띠리리리~~ 갑자기 울리는 기계음. 자루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뱀이었는지 황금이었는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 물론 내가 버리지 못한 쓸데없는 미련이나 오해 덩어리일 확률이 높지만. 꿈이다. 그 잠깐 사이 아이러니하게도 불면은 꿈으로 연결된 작고 가느다란 사다리 하나를 나에게 놓아준 것이었다.
종종 기분이 좋은 상태이든 나쁜 상태이든 어떤 들뜸이 있다. 그 들뜸은 좀처럼 아래로 가라앉지 않는다. 아무리 무거운 누름돌을 올려놓아도 떠오르려는 원심력을 이기지 못한다. 불안은 그런 들뜸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나도 알고 있다. 이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그래도 멈출 수 없다. 만성이 되었다는 건 그렇게 굳어진 하나의 양식이거나 혹처럼 붙어사는 기생의 삶이다. 지구에 기생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마는. 어쩌면 기생. 그것은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떤 것도 그냥 툭 떨어진 건 없다. 외로움도 다 기생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들이다. 그것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도 알고 있다. 조급함, 미래, 걱정, 비교 등등 하지 않아도 될 앞선 생각에 대한 대가였다. 정신과 육체를 오른쪽과 왼쪽 주머니로 분리해서 넣고 다닐 수는 없는 걸까.
불면은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늘 불안과 조급함에 시달린 환경에서 시작된 버릇이었다. 불면을 고치기 위해서 좋다는 건 다 해봤다. 불면에 좋다는 음식이나 차도 마셔보고 약도 먹어보고 운동도 해 보고. 뉴스든 어디서든 말하는 방법은 치료법은 거의 대동소이했다. 무조건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지키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여러 가지를 다 시도하고는 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이는 습관은 여전하다. 그렇게 너무 오래 불면을 겪다 보니 자연스러워졌다고나 할까. 불면 또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타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잘 지내보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 악수를 받아들였는지 그날부터 불면에서 조금 자유로워졌다. 불면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치유라든가 완치는 없었다. 세상 모든 병에 완치가 있을까. 생명은 어디든 조금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어쨌든 그 협상의 대가로 받은 것이 꿈이다. 그러니까 꿈을 꿨다는 건 얕은 잠이나마 잤다는 증거가 된다. 어떤 날은 단편을 쓰듯 꿈을 꾼다. 몇 개의 꿈 중 진짜 알맹이는 무엇일까. 길몽과 흉몽이 섞여 있는 꿈. 삶은 늘 그렇게 양날의 검을 쥐여 주고 선택이라는 갈림길에 세워둔다. 잔인하게도. 꿈의 해석으로 유명한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이 무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물론 무의식이라는 말 자체가 과학적이기보다 주관적인 영역이다. 근거 역시 주관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개인마다 달라서 무의식의 형상도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과학으로도 밝힐 수 없는 그 무엇, 생명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추측만 할 뿐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기에 우리가 겪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때로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또 행운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때 꿈을 맹신했었다.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았다. 어떤 결과를 기다리기 전에 항상 꿈을 꾸었고 해석에 따라 길과 흉이 갈렸다. 간절한 마음이 꿈으로 들어온 것인지 확률이 높은 예측이었다. 특히 동물이 나오는 꿈이 제일 잘 맞았다. 주로 뱀이 나오는데 실뱀이거나 큰 뱀이거나 한 마리거나 여러 마리가 나오기도 한다. 가장 좋은 꿈을 꿨을 때는 새끼 악어들이 내 다리를 물었을 때다. 기적 같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었다. 하지만 꿈만 꿨다고 해서 절대로 그냥 얻어지는 건 없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에서 횡재가 일어나는 그런 운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다. 간절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꿈도 오지 않았다. 꿈에서 숫자를 불러주었다거나 조상님이 나타났거나 하는 일확천금의 꿈은 아무리 애써도 오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걸 꿈꾸는 건 그저 욕심일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고작 사흘이라고 한다. 작심삼일도 아니고 꿈의 유효 기간이 사흘이라니. 사흘 안에 꿈이 실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꿈도 개꿈이라는 말이다. 흉몽을 꿨을 때는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이는 꿈의 유효 기간이 몇 개월 이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꿈이 오래 지속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거의 매일 꿈을 꾸고 욕망도 계속 바뀐다. 구체성을 띤 관념이 꿈이라면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해석에 따라 길몽이 되기도 하고 흉몽이 되기도 한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해석하겠지만. 꿈은 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니 어느 쪽을 믿든 결정은 내 몫이다. 아니면 말고 식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육체는 정신이 하는 말을 곧잘 듣는 편이니까.
고양이는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잠을 잔다고 한다. 깨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 긴 시간 잠을 자면서 꿈도 꾸는 걸까. 동물의 꿈엔 누가 등장할까. 먹이사슬의 최고 위치에 있는 인간이 등장할까. 인간에게 학대를 당한 동물은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심하게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한다. 트라우마는 꿈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트라우마의 대상은 주로 인간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인간과 동물은 서로의 꿈을 드나들며 지배하는 관계가 되었다. 때로는 좋은 영향으로 또 때로는 악몽으로 말이다. 꿈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때론 꿈에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내가 꾸고 싶은 상황으로 흘러가지는 못했다. 늘 잡힐 듯 아스라이 그러다 깨어난다. 무의식은 얼마나 깊은 자신이길래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물론 가끔 꿈이 나를 밀어내는 바람에 몸이 들썩거리다 깨어나는 순간도 있다. 마치 꿈에서 현실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두 개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무수한,
때죽나무 아래 꽃들이 떨어져 있다. 밤새 무엇엔가 시달린 누런 빛이다. 꽃은 나무의 꿈이었을까. 문득 나도 누군가의 꿈이었을까 하는 생각. 발아래 자신의 무덤을 놓아두고 잠을 자는 나무는 어떤 생각일까. 삶에서 지나친 우연이 환생한다고 한들 한낱 꿈으로 와서 꿈으로 잊히는 인간인 것을.
ㅡ 그동안 “김효선의 [사물의 기척]”을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ㅡ

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서귀포칠십리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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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