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동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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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공시사 월평
열 번째 걸음. 공감의 한계
● 박동억
공감 능력이 듣는 힘이라면, ChatGPT는 가장 탁월한 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대화형 인공지능 모델은 말 그대로 연구자들이 데이터를 선별하고, 그 데이터에 따라서 사용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라는 말을 건네다고 해서 챗지피티는 스스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챗지피티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무엇이 어려운 상황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할 때, 그 대답은 여러 사람이 행했던 말의 묶음 중에서 가장 적절한 대답을 찾아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각대로 공감하는 말을 건넸겠지만, 챗지피는 대답할 때조차 수많은 목소리가 간직된 데이터를 듣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과연 공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듣는다’는 행위에는 자신을 내어주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인공 지능(적어도 챗지피티)에는 내어줄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공 지능은 감응함으로써 변화하고-변화시키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백과사전이나 녹음기처럼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도구에 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공감한다는 것은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지만, 일방적으로 듣기를 거부하는 ‘나’를 전제한다는 역설을 내포한다. 분명한 것은 공감하고-공감받는 관계는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관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감받는’ 입장에서 말의 교환은 중요치 않을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떠올려보자. 박목월의 시 「향내음」은 부처님 불상 앞에서 향을 피우는 동안 마음 깊숙이 억눌렀던 것들이 풀어지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마치 내 마음을 맡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후련함이 퍼져나가는 ‘향내음’의 이미지와 포개어진다. 한편 이 작품에서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받아주는 부처님의 너그러움은 “부처님은 / 귀가 큼직합니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부처님은 ‘큰 귀’로 제유될 수 있어 보인다. 기도는 대화보다 독백에 가까운 것이고, 따라서 공감과 거리가 먼 것임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기도하는 자는 ‘공감받는’ 기분에 빠져들곤 한다. 설령 신께서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으실 때도 말이다.
이처럼 ‘공감하는’ 입장에 서려면 단지 귀를 키우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공감하는 자가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공감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는 경청할 뿐이다. 경청한다는 것은 적절한 대답을 찾는 것과도 거리가 멀고, 누군가에게 들은 훌륭한 대답을 전한다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경청한다는 것은 ‘나’를 내어준다는 것이다. ‘나’를 내어준다는 것은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휩쓸릴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말은 공감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내어주기 위해서는 침묵해도 좋다. 신이 지극히 ‘공감하는’ 존재라면, 그는 다만 가없는 귀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듣고, 모든 마음을 기억하는 ‘큼직한 귀’이다.
공감하는 것은 타인에게 연루된다는 것이고, 타인에 의해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도한 공감은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이 때문에 공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상황 또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가까운 이의 참혹에도 사람들이 쉽사리 깊은 공감을 행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동정하는 편이 좀 더 쉽다. 동정하기보다 내 생각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이 더 쉽다. 또한 사회적 참사가 벌어졌을 때, 그러한 사건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 적개심을 품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감의 측면에서 볼 때 ‘모욕하는’ 자들은 어떤 의미로는 냉담하게 사건에 대해 ‘회피하거나’ ‘판단하는’ 자들보다 그 참혹을 더 가까운 것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욕하는 자는 박목월이 표현한 ‘큼직한 귀’, 즉 타인을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나’를 지니지 못했다.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기에 모욕하는 자의 ‘나’는 너무나도 좁고, 자신조차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참혹을 단지 말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말의 교환’으로 바꾸어 놓고자 하거나 반대로 상대를 모욕하며 ‘말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신성함이란 가없이 들을 수 있는 입장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비춘다면 반대로 비천함이란 자기 몫의 존재만큼 들을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내 마음만을 경청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나’라면, 그것보다 비천한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자연은 신비롭고 신성하다. 세상의 모든 것, 저 돌과 바위와 나무와 꽃조차 자기 존재보다 더 큰 것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직 자신의 마음만 자신의 귀로 들으며 살아간다. 그러한 존재를 우리는 비천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순도 높은 하나의 물음으로 향해가는 것이다. 조금 더 넓어지는 것과 자신을 공고히 하는 것, 이 이율배반 사이에서 가능한 것이 시 쓰기라면, 시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공감의 역량에 대한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어디까지 들을 수 있는지 혹은 들을 수 없는지 자신을 심문하는 것이다. 자아는 세계 앞에서 세계를 어느 정도로 받아들이지 선택해야 한다. 산문이 본래적으로 지닌 다성성이 어느 정도로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자기 확인에 가깝다면. 시적인 독백은 순수하게 어느 정도로 세상을 받아들일 것이냐는 실존적인 물음으로 옳아가도록 한다. 세계와의 거리를 무화한 채 시인은 증언한다. 목소리를 통해 세계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가 곧 그의 세계이자 공감의 한계선이다.
오하이오주에는 콜럼버스도 있고
더블린도 있다, 미국에 열여덟 개나 있지만
나머지 열일곱 개와는 다른 도시가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눕던 공간과는
이름만 같은 도서관도 하나 있는데
지금은 이곳저곳 자식들도 거느린단다
마을과 마을로 흩어진 도서관 로비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오지 않은 흑인이 대출을 하고
중남미로 가지 않는 히스패닉이 수서를 한다
150년 동안 정기적으로 젊어진 도서관은
이제 여기이면서 저기이고, 그 사람에게서
이 사람에게로 그때엔 앎이었던 것과
지금은 물음인 것을 실어 나른다
푸른 눈의 꼬마가 묻혀 온 서툰 한국말에
시로 가기 직전 잠든 한때의 얼굴
그때와 다른 안색으로 미끄러진다
도서관에서 가장 낡은 의자를 찾아 앉는다
지금 적어두지 않으면 같은 듯 다른 감정이 되는 것
여기에 있었지만, 저기에선 찾을 수 없는 것
앎도 아니어서 물음도 될 수 없는 것
다 미끄러지기 전에 이 풍경을 적어야 한다
오래된 삐걱 소리를 엉덩이에 단단히 밀착시킨다
이 소리의 지분을 가진 백수십 년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야지, 그런 마음 쪽으로
처음 보는 꽃이 봉오리를 움작거린다
꽃을 형용하기 위해 예민한 연필 끝에서
나는 당신으로부터 천천히 늙고
당신은 나로부터 정기적으로 젊어질 것이다
ㅡ 안웅선, 「오하이오 도서관」 전문(《문학수첩》 2024년 상반기호)
“시로 가기 직전 잠든 한때의 얼굴”은 어떠한 장소에 닿아서 시가 되는가. 안웅선 시인이 가리키는 장소는 ‘오하이오 도서관’인데, 그에게 이 도서관은 본래의 기원으로부터 멀어져 떠돌던 것들이 서로 소통하며 새로운 ‘젊음’을 획득하는 장소이다. 일견 이 작품은 미국 문화가 지닌 다문화성을 떠올리게 한다. 보다 정확하게 “아프리카에서 오지 않은 흑인”이 책을 빌리고 “중남미로 가지 않는 히스패닉”이 수서를 하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기원’으로부터 멀어져 하나의 다문화적 공간에 뒤섞인 인종들을 표현한다. 흑인이든 히스패닉이든 그들은 기원과 멀어지더라도 사람으로서 소통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시인을 사로잡는 것은 이국성이나 이질성이 아니라 도리어 무엇인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실어나르고’ 있다는 감각이다.
인종의 경계고 역사적 간극을 뛰어넘어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공간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로 가기 직전 잠든 한때의 얼굴”이라는 표현처럼, 그것이 시의 표정에 가깝다는 시인의 인식이다. 무엇이 결국 시가 되는가. “그때엔 앎이었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물음인 것”, 아니 끝내 “앎도 아니어서 물음도 될 수 없는 것”이 그 풍경 속에서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있다고 시인은 표현한다. 여기서 시인이 떠올리는 ‘시’란 그 미끄러짐 자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미끄러짐은 시공간을 넘어서 소통하고 있다는 감각을 뜻하지만,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시인의 듣고자 하는 의지와 다르지 않다. 낡은 의자와 그 오래된 삐걱 소리에 몸을 맡기는 순간 “백수십 년 전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가능해진다. 이처럼 안웅선 시인에게 ‘시’는 다만 응답하려는 의지이다. 오래된 당신에게 귀 기울일 때 당신 또한 내게 귀 기울이며, 서로의 시간에 가까워진다는 믿음이다.
나이가 들면서 클래식이 좋아진다는 그녀는 식은 커피를
졸졸 부추 화분에 부어 주네
아침의 화답은 이파리 끝이 가늘게 흔들리는 일부터
약함을 신뢰하는 일까지
무얼 대적할 수 없는 이 초록이 왜 자랑스러워
사는 방법이 골똘해지고
세상에 어떻게 폭력이 가능할까를 생각하네
부추가 골목과 계단을 만나면서
이 사랑은 오래되었는데
나를 단정하게 잘라 줘
폭력은 자라지 않는 게 아니라 잘 잘라 주는 거야
그걸 부추가 일러주었다
약한 사람은 건드리지 마,
그게 골목의 룰이잖아
그런데 왜 날이 새면
저 건너 여린 초록의 피 흘리는 소식부터 오는지
포탄 더미를 들춰야 하는지,
이거 초현대적이야
부추를 보고 생각이 많아지면
일월이 미안해지면 그때
부추의 방식이 되는 것
견디는 쪽을 강요할 순 없지만
그럴수록 부추를 믿을래
울면서 따라간 시간이 역사가 된
슬픈 이야기는
한국적이었는데 전 지구적이더군
지친 몸을 데워줄게, 암울하지만
우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기를
힘을 빼려고 해도 힘이 들어갈 때는
부추에게로 와
나이가 들면서 부추도 클래식이 좋아
그녀가 슬리퍼를 끌며 다가올 때쯤
귀를 세우는 이 정적이
아슬하게, 참 좋아
ㅡ 이규리, 「아침의 일」 전문(《딩하돌하》 2024년 봄호)
원치 않는 순간에도 우리는 세상에 던져져 있다. 마찬가지로 공감하기를 원치 않을 때도 세계는 세계에 우리를 연루시키기 때문에 공감은 고뇌가 된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저 멀리 들려오는 포탄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 매체는 저 너머의 폭력이 가까운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현대인은 여기 이규리 시인이 행하듯 화분을 돌보는 아침에도 자신의 손끝을 심문할 수 있다. 약한 자가 희생되고 포탄이 땅에 떨어지는 사건조차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우리 시대에 우리의 두 손은 무엇을 행하는가. 화분에 놓인 부추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정도의, “무얼 대적할 수 없는 이 초록이 왜 자랑스러워”지는 것인지 되묻는 정도의 반성이 최대치일지도 모른다. “우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기를” 다짐하는 독백의 윤리가 최선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징후적인 것은 폭력에 대한 죄의식을 상기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외면한다는 데 있다. 이 작품을 천천히 읽어나가면, 시인이 우리의 두 손이 저 너머의 폭력과 맞설 수 있다거나 저 너머의 폭력을 묵인하고 있다는 ‘정당한’ 윤리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오히려 이 작품은 홀로 방에서 즐기는 ‘정적’과 결국은 세상의 소란스러움에도 깨어지지 않는 ‘아슬아슬한’ 평화에 자족하는 ‘왜소한’ 윤리로 귀결된다. 여기서 끝내 클래식을 듣는 행위에 천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귀를 닫는’ 방식인 셈이다.
그러나 시의 곳곳에서 상기되는 것은 이국의 폭력이고 울음의 역사이다. 어떤 울음의 시간이 흐르고 역사로 쌓이는 과정이 “한국적”일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이라는 자각에 도달하면서도, 결국 왜소한 윤리로 마무리되는 이 작품의 구조는 아이러니하다. ‘사랑’을 떠올리는 동시에 ‘울음’을 떠올리는 이 시의 근본적 정조는 죄의식이다. 이 아이러니가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인간의 공감 능력이 지닌 근원적 죄의식이기도 하다. 타인의 삶과 연루되지 않기를 바라는 순간에도 인간의 귀는 듣는다. 이 작품에서 ‘나’는 자기 삶을 보전하려는 식물적 욕망을 상징하는 ‘부추’를 닮은 존재로 자신을 느끼면서도, 끈질기게 그의 두 귀와 두 손은 ‘초현대적’인 현실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언니에게 화분을 선물받았다
뽁뽁이로 감싼 포장을 풀면서
식물의 호흡법을 가늠한다
얼굴을 구겨 넣고
기다란 종이박스 안에서 후 하 후 하
잎사귀 하나까지 턱 막히는 공간에서
출산을 앞두고 호흡 연습을 하듯이
건강한 화분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미지근하고 반질반질한 잎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환한 물줄기
창가에 올려 놓으면
햇빛을 입고 투명하게 빛난다
더 많은 물을 부어주고 싶어
눈이 마주치면 통통한 잎을 만져주고
아침마다 화분의 위치를 바꾼다
화분은 말을 할 줄 몰랐고
어떤 사랑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화분을 생각하느라 언니를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물발에 튀어오르는 작은 돌멩이들
화분은 앉아서 한 모금씩만 삼킨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물을 흘려보낸다 느리게
뿌리를 흘러온 것들이 물받이 접시에 고인다
하나뿐인 화분을 위한
네모난 창문 물약 세라믹 받침대 구멍 먼지
새큰한 마음
자꾸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아서
앞머리를 기르는 사이
식물은 점점 검어져서
맑은 날 내 그림자 위를 덮는
축 처진 잎사귀 두 장
날 사랑하듯이 인간을 사랑해
그 애가 속삭였다
ㅡ 이세인, 「믿음직한 선물」 전문(《시사사》 2024년 봄호)
죄는 그것을 드러내기 부끄러운 대상으로 여길 때 진정 죄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규리 시인의 시 「아침의 일」과 이세인 시인의 시 「믿음직한 선물」은 주제와 소재 면에서 유사하다. 두 작품은 똑같이 ‘화분을 기르는 일’과 ‘세상에 눈 돌리는 일’ 사이에서 자아가 느끼는 갈등을 그린다. 「믿음직한 선물」은 언니에게 받은 화분을 돌보는 일화를 전한다. ‘나’에게 방 안에서 화분을 기르는 일은 출산이나 아이를 돌보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건강한 화분”이라는 표현처럼,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돌보고자 하는 것은 식물이 아니라 그 식물을 가꾸고 양육하는 울타리로서의 ‘나’, 즉 자기 자신이다. ‘나’는 상처 입고 싶지 않다. 그가 식물을 곁에 두는 이유는 사람처럼 말로서 상처를 주거나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화분을 준 ‘언니’를 잊고 오직 화분에만 골몰한다.
결국 「아침의 일」의 “부추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믿음직한 선물」의 “식물의 호흡법”은 타인이나 세상과의 교류를 두려워하고 꺼리는 왜소한 자아를 표현한다. 「믿음직한 선물」에서 식물과 화분에 대한 모든 비유는 곧 세상과 교류하기를 꺼리는 ‘나’에 대한 제유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마지막 연은 그러한 상태를 반성하는 듯 보인다. “날 사랑하듯이 인간을 사랑해 / 그 애가 속삭였다”라는 식물의 말 건넴은 곧 ‘타인과 교류하라’라는 명령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명령이 그저 외부의 목소리로서 투영된 채, 심지어 그가 돌보는 화분 안의 ‘식물적 속삭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트라우마는 직면하기 두려운 것이다. 쉽게 상기될 수 있고 직시될 수 있는 목소리는 상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징후적인 것은 너무나도 쉽게 반성을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다. 실은 타인을 더욱더 철저히 외면하기 위한 타협안으로서 ‘타인에게 향하는 듯한’ 속삭임은 연출된다.

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평론집 『침묵과 쟁론』,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 시의 아이러니 수사학』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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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