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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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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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정현종
  신작시: 나는 시예요 / 그런 말 / 마음이 잘 익어서

  자선시: 천둥을 기리는 노래 / 샘을 기리는 노래

 
  [시인론] 고봉준 “시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신작시 


 

 

 

 나는 시예요

  

 

 

       

 

 나는 태양에서 왔어요.

 나는 에너지예요.

 나는 바람에서 오고

 파도에서 왔어요.

 나는 에너지예요.

 나는 사랑에서 오고

 기억에서 왔어요.

 기쁨에서 오고

 슬픔에서도 왔어요.

 나는 에너지예요.

 이제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시예요.

 

 

 

 

 

 

 

 

 

 

 



 

 

 그런 말

     

 

 

 

 

 그래요.

 드넓은 침묵에 둘러싸여 있는 말이 있어요.

 침묵의 우주인 마음에서 싹트는 말이에요.

 캄캄한 우주의 머나먼 끝에서 빛이 태어나듯이

 그렇게 움직이는 말이 있어요.

 말보다 침묵이 더 쟁쟁하게 들리는 말.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침묵으로 둘러싸인 말.

 인류의 역사에서 시가 그런 말이었는데,

 그래서 삶은 겨우 지탱이 되어 왔는데,

 요새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없이 천박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마음이 잘 익어서 

   

    

 

 

 

 생각과 감정이 곰삭아야지요.

 익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붕어빵 찍어내듯이 쓴 시가 무슨 시입니까.

 마음이 잘 익어서 해와 달도 잘 익으면

 그때 해를 따든지 달을 따든지 하는 거지요.

 그러려면 어떻든

 열 달 가지고도 안되지요.

 열 달이 뭡니까, 십 년도 모자라지요.

 

 

  

 

 

 

 

 

 

 

 


 자선시 


 

 

 

천둥을 기리는 노래

 

 

 

 

  

 여름날의 저

 천지 밑빠지게 우르릉대는 천둥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 마음과 몸을

 씻었겠느냐,

 씻어

 참 서늘하게는 씻어

 문득 가볍기는 허공과 같고

 움직임은 바람과 같아

 왼통 새벽빛으로 물들었겠느냐

 

 천둥이여

 네 소리의 탯줄은

 우리를 모두 新生兒로 싱글거리게 한다

 땅 위에 어떤 것도 일찍이

 네 소리의 맑은 피와

 네 소리의 드높은 음식을

 우리한테 준 적이 없다

 무슨 이념, 무슨 책도

 무슨 승리, 무슨 도취

 무슨 미주알고주알도

 우주의 내장을 훑어내리는 네

 소리의 근육이 점지하는

 세상의 탄생을 막을 수 없고

 네가 다니는 길의 눈부신

 길 없음을 시비하지 못한다.

 

    천둥이여, 가령

    내 머리와 갈비뼈 속에서 우르릉거리다

    말다 하는 내 천둥은

    시작과 끝에 두려움이 없는 너와 같이

    천하를 두루 흐르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무덤 파는 되풀이를 끊고

    이 냄새 나는 조직을 벗고

    엉거주춤과 뜨뜻미지근

    마음 없는 움직임에 일격을 가해

    가령 어저께 나한테 「선생님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떠도는 꽃씨 비탈에 터잡을까

    망설이는 목소리로 딴죽을 건

    그 여학생 아이의

    파르스름 果紛 서린 포도알 같은 눈동자의

    참 그런 열심이 마름하는 치수로 출렁거리고도 싶거니

 

 하여간 항상 위험한 진실이여 

 죽음과 겨루는 그 나체여, 그러니만큼

 몸살 속에서 그러나 시와 더불어

 내 연금술은 화끈거리리니

 불순한 비빔밥 내 노래와 인생의

 主調로 흘러다오 천둥이여

 가난한 번뇌 입이 찢어지게

 우르릉거리는 열반이여

 

 네 소리는 이미 그 속에

 메아리도 돌아다니고 있느니

 이 新生兒를 보아라 천둥 벌거숭이

 네 소리의 맑은 피와

 네 소리의 드높은 음식을 먹으며

 네가 다니는 길의 눈부신

 길 없음에 놀아난다, 우르릉……

 

 

 

 

 

 

 

 

 

 

 


 

 

 

 샘을 기리는 노래

         

    

     

  

 

 어린 시절

 뒷산 기슭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내 동공 속에서,

 솟아나고 있어요.

 그때와 똑같이

 작은 궁륭 모양으로

 솟아나고 있어요.

 지상의 모든 숨어 있는 샘들을

 계시한

 그 신비의 샘은

 또한 마음을 샘솟게 하는

 신비.

 어린 시절 뒷산 기슭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

 내 마음에 샘솟는,

 오 마음이 샘솟는 원천!

 

 

 

 

 

 

 

 

 

정현종  l

1965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광휘의 속삭임』 『그림자에 불타다』, 시선집 『고통의 축제』 『이슬』, 산문집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날아라 버스야』 『두터운 삶을 향하여』 등과 다수의 번역서가 있음.

 

 

 

 

 

 

   


 시인론 / 고봉준   


  

 

 

 

 

시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ㅡ 정현종의 신작에 대하여

        

 

 

 

  앙드레 지드는 현자(賢者)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라고 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그리고 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빌려 어린아이를 가장 높은 정신의 단계라고 주장했다. “어린아이는 천진무구하며 망각이다. 하나의 출발이며 하나의 놀이다. 자전하는 수레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다. 그리고 신성한 긍정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현자(賢者)와 어린아이의 공통점은 기존의 척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기존의 척도(상식)를 재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존재, 즉 입법자이다. 그런데 이들의 입법은 초월적이지 않아서 현자는 세상 모든 것에 경탄함으로써, 아이는 대상에 대한 순수한 긍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안한다. 경탄이란 숨겨진 이면을 발견하는 것, 즉 새로운 면모를 찾아내는 능력의 산물이다. 어린아이의 긍정 역시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등짝에 실리는 짐짝을 무조건 수락하는 낙타의 긍정이 아니라 이전의 경험과 기존의 잣대를 망각함으로써 대상과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즉 능력의 현현이다.

  정현종은 현실과의 불화에 근거한 실존적 문제의식에 출발해 생명의 역동성과 생태적 감각에 대한 사유로 시적 세계를 확장해 왔다. 이러한 시적 관심의 이동과 변화는 오래전부터 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목격되는 소위 ‘~을 기리는 노래’라는 형태에서 확인 된다. ‘기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난 일의 결과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등을 훌륭하거나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 즉 칭송한다는 것이다. ‘기루다’가 한용운만의 언어라면, ‘기리다’는 정현종만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시인을 사적인 세계, 그리하여 대체할 수 없는 사적 경험을 ‘고백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현종에게 시인은 가장 사적인 순간에도 무언가를 ‘기리는 존재’이다.

  그는 무엇을 기리는 것일까? 시인이 ‘~을 기리는 노래’라는 형태로 표현한 것들을 살펴보자. 정현종 시편들 가운데 ‘~을 기리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들은 「천둥을 기리는 노래」, 「어스름을 기리는 노래」(『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나무껍질을 기리는 노래」(『한 꽃송이』(1992)), 「부엌을 기리는 노래」, 「여행을 기리는 노래」(『세상의 나무들』(1995)), 「구두수선소를 기리는 노래」(『광휘의 속삭임』(2008)), 「샘을 기리는 노래」, 「시선을 기리는 노래」( 『그림자에 불타다』(2015)) 등이다. 그가 기리는 대상에는 소위 세속적·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교환가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또한 첨단 문명의 산물도 없다. 일상적인 것, 지나치게 일상적이어서 눈에 띄지 않는 것들, ‘천둥’이나 ‘어스름’처럼 인간종(種)을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들, 고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아 언어로는 정확히 재현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작고 여리지만 시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대상이 바로 시인이 ‘기리는’ 것들이다. 시인은 자신이 번역한 『네루다 시선』에서도 「내 양말을 기리는 노래」, 「수박을 기리는 노래」, 「소금을 기리는 노래」, 「책에 부치는 노래 I」, 「떨어진 밤을 기리는 노래」, 「탐조(探鳥)를 기리는 노래」, 「폭풍우를 기리는 노래」처럼 몇몇 작품에 ‘~을 기리는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찍이 한용운은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말로 ‘기루다’라는 태도가 자신의 시적 지향임을 밝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현종은 ‘~을 기리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대상과 세계를 대하는 자신의 시적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해 ‘~에 대하여/관하여’라고 말하는 것과 ‘~을 기리는 노래’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전혀 다르다. 전자가 주체-대상이라는 근대적인 이항관계를 전제한다면 후자는 ‘기리다’라는 술어로 인해 이러한 이항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후자에서 시인은 ‘주체’가 아니며, 시적 대상 또한 단순한 외부적 사물이 아니라 시인과 더불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이다. 이 관계에서 시인과 대상은 수평적이다. 90년대 이후 정현종 시의 주요 모티프인 생명과 생태에 대한 감각은 바로 이러한 관계에서 기원한 것이다.

 

  어린 시절

  뒷산 기슭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내 동공 속에서,

  솟아나고 있어요.

  그때와 똑같이

  작은 궁륭 모양으로

  솟아나고 있어요.

  지상의 모든 숨어 있는 샘들을

  계시한

  그 신비의 샘은

  또한 마음을 샘솟게 하는

  신비.

  어린 시절 뒷산 기슭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

  내 마음에 샘솟는,

  오 마음이 샘솟는 원천!

- 「샘을 기리는 노래」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샘’이라는 기호는 현전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물’이 솟구치는 물질적·실체적 대상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이 시에서 ‘샘’은 물질적 대상이면서 자연의 표상이고, 나아가 자연의 원초적 역동성을 상징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현전하는 대상으로서의 ‘샘’이 감각적·물질적 층위에 속한다면, “어린 시절 / 뒷산 기슭에서 /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은 ‘물질’의 층위를 벗어남으로써 생명력을 잃지 않는 영속적 존재가 된다. 이 시에서 ‘샘’과 시인의 관계는 유년의 화자와 뒷산 기슭에서 솟아나던 ‘샘물’의 사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적 대상과 인간이 맺는 근원적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정현종의 시에서 인간과 자연, 혹은 시적 대상과의 관계는 일회적이지 않다. 비록 그것이 짧은 순간의 만남일지라도 그 마주침이 한 인간의 내면에 남기는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래 지속된다. 일찍이 바슐라르는 ‘물의 꿈’을 가리켜 물이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의 자극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에게 ‘물의 꿈’은 ‘물’이라는 대상에 대한 꿈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리하여 물의 꿈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인용시의 ‘샘’ 또한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샘’에 국한되지 않고 시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분출하는 생명력에 대한 표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시인에게 ‘샘’은 유년, 즉 과거에 머물러 있는 고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이미-항상 솟아나고 있다. 시인의 이 분출하는 ‘샘’으로 인해 자신의 내면이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신비의 샘’이라고 명명한다. “내 마음에 샘솟는, / 오 마음이 샘솟는 원천!”이라는 진술에서 ‘샘’은 한 인간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이다.

 

  나는 태양에서 왔어요.

  나는 에너지예요.

  나는 바람에서 오고

  파도에서 왔어요.

  나는 에너지예요.

  나는 사랑에서 오고

  기억에서 왔어요.

  기쁨에서 오고

  슬픔에서도 왔어요.

  나는 에너지예요.

  이제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시예요.

- 「나는 시예요」 전문

 

  정현종의 근작에서 ‘시’는 생명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 언어로 인식된다. 아니, ‘언어’ 자체가 ‘생명’의 에너지로 간주된다.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문학과지성사, 2022)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무슨 시 같은 게 태어나려는 / 기운, / 산기(産氣). / 늘 그렇듯이 / 온 우주의  에너지가 / 씨앗 하나에 모인다. / 물질, 반물질 / 감각, 기억 / 빛과 어둠.”(「한 씨앗」) 여기에서 시인은 하나의 씨앗에 “온 우주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음을 본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시는, 시의 언어는,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의 층위를 벗어나 ‘우주’와 연결된다. 인용시 「나는 시예요」는 이러한 비전에 근거하고 있는 일종의 시론(詩論)이다. 이 시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 즉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처럼 읽힌다. 예컨대 시는 ‘사랑’과 ‘기억’ 같은 개인의 층위에서 발원하며, 또한 그것은 ‘기쁨’과 ‘슬픔’ 같은 감정에서 온다는 진술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익숙한 물음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 그 물음보다 중요한 것은 세 번 반복되는 “나는 에너지예요.” 라는 진술이다. ‘시=에너지’라는 이 새로운 등식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알다시피 에너지(Energy)란 물리학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활동, 운동을 뜻하는 그리스어 Ενέργεια(Energia)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시=언어’가 단순히 의미를 밝히거나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의 차원을 벗어나 ‘에너지=활기’를 응축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요.

  드넓은 침묵에 둘러싸여 있는 말이 있어요.

  침묵의 우주인 마음에서 싹트는 말이에요.

  캄캄한 우주의 머나먼 끝에서 빛이 태어나듯이

  그렇게 움직이는 말이 있어요.

  말보다 침묵이 더 쟁쟁하게 들리는 말.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침묵으로 둘러싸인 말.

  인류의 역사에서 시가 그런 말이었는데,

  그래서 삶은 겨우 지탱이 되어 왔는데,

  요새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없이 천박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 「그런 말」 전문

 

  일찍이 시인은 니체의 목소리를 빌려 예술이 우리의 삶을 견디게 한다고 주장했다. 삶을 견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니체에 따르면 세속의 삶은 비참하기만 할 뿐이어서 예술이 없으면 이러한 삶의 비참함과 괴로움은 씻어내기가 불가능하다. 니체는 바그너와 결별하면서‘가상=예술’ 없는 삶을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반시대적 고찰』 시기까지 니체에게 예술은 세속적 삶의 비참함을 견디게 하는 치료제였다. 그에게 예술은 무관심한 미적 대상이 아니라 타락한 현실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치료제였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시인은 자신의 삶을 견디는 존재이고, 나아가 예술을 통해 다른 사람을 견디게 하는 존재이다. 인용시에 등장하는 “인류의 역사에서 시가 그런 말이었는데, / 그래서 삶은 겨우 지탱이 되어 왔는데”라는 진술은 바로 이 견딤을 가리킨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도 예술이 여전히 이러한 치료제의 역할을 수행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요새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 한없이 천박해지고 있는 세상에서.”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예술(언어)’의 문제일까 ‘시대’의 문제일까? 시의 제목이 ‘그런 말’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의 관심은 ‘시대’보다는 ‘예술(언어)’를 겨냥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은 “인류의 역사에서 시가 그런 말이었는데”라고 진술함으로써 현재에는 그렇지 못함을 지적한다. 시인이 주장하는 ‘그런 말’이란 어떤 것일까? “드넓은 침묵에 둘러싸여 있는 말”, “침묵의 우주인 마음에서 싹트는 말”, “캄캄한 우주의 머나먼 끝에서 빛이 태어나듯이 / 그렇게 움직이는 말”, “말보다 침묵이 더 쟁쟁하게 들리는 말”,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침묵으로 둘러싸인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의 ‘말’은 ‘침묵’에 둘러싸여 있고, ‘싹트는’, ‘태어나듯이’, ‘움직이는’ 같은 술어에서 확인되듯이 강력하게 분출하는 생명의 언어이다. 또한 이 ‘말’은 침묵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소리(sound)가 아니며, 때로는 말보다 더 쟁쟁하게 들린다는 점에서 ‘침묵’의 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그림자에 불타다』에 수록된 산문에 등장하는 구절(“최상의 말은 아직 발설되지 않은 말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말, 미래의 말. 말이 신선하려면 고독이라는 오크통과 침묵이라는 효모가 필요하다.”)과 연결된다.

 

  생각과 감정이 곰삭아야지요.

  익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붕어빵 찍어내듯이 쓴 시가 무슨 시입니까.

  마음이 잘 익어서 해와 달도 잘 익으면

  그때 해를 따든지 달을 따든지 하는 거지요.

  그러려면 어떻든

  열 달 가지고도 안되지요.

  열 달이 뭡니까, 십 년도 모자라지요.

- 「마음이 잘 익어서」 전문

 

  정현종에게 시는 “생각과 감정이 곰삭아” 만들어지는 것이니 “익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진술에는 두 개의 주장이 들어있다. 먼저 한 편의 좋은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로 하다는 것. 이 주장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붕어빵 찍어내듯이 쓴 시”이다. 이것은 (좋은) 시를 판단하는 근본적인 잣대에 대한 일반적 진술일 수도 있지만 맥락상 최근 시의 경향과 풍조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 진술에는 더욱 근본적인 주장이 담겨 있다. 비유컨대 잘 익어서 떨어질 때까지 숙성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 시작(詩作)의 원리라면 ‘시=말’의 주체를 시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말’의 탄생에 있어서 시인의 역할은 기다리는 것, 그리고 받아적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시예요」에서 시를 ‘에너지’라고 명명하면서 ‘오는 것’이라고 표현한 까닭도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정현종에게 있어서 시는 인간-주체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향해 ‘도래하는 것’이다. 베케트의 고도(godot)처럼 그것이 언제 도착할 것인지 시인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말하려는 바는 시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게 아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접촉함으로써 세계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존재이고, 이 경험을 통해 사적인 감각과 인식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보편성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도록 세계를 품는 존재이다. 이 품는 적극적인 행위 속에서만 생각과 감정은 무르익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생각과 감정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존재인 동시에 그것이 충분히 무르익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세계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적극적인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시(‘말’)에 관한 세 편의 시는 시로 쓴 시론(詩論)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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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l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유령들』 『비인칭적인 것』 『문학 이후의 문학』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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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