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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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ㅡ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로 살고 있나
어디에서 온 걸까. 이 얼굴은. 무심코 거울에 비친 초췌하고 주름진 얼굴과 맞닥뜨렸다. 철저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가 거기 흘러나와 있었다. 지리멸렬한 얼굴이 나를 쳐다본다. 갑자기 정체를 들켜버린 가면은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다 거울을 부순다. 나는 나에게, 나를, 너무 오래 가둬놨거나 갇혀있었던 걸까. 거울이 없으니 나도 사라졌다. 너무 가까워서 내가 없는 듯 나를 못 본 척 살았던 걸까. 그리스 신화 속 우로보로스는 자신의 꼬리를 먹어치우는 형상이다. 용 또는 뱀과 비슷한 형태로 원형적인 완전함과 순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생명 혹은 존재의 상징적 의미는 태어나는 순간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작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결국 자신을 먹어치움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자고 일어나니 몸통은 사라지고 어느새 꼬리만 남은 시간. 인생의 팔할은 잃어버린 몸통을 찾아 헤매다 겨우 꼬리를 발견하는 건 아닐까.
겨울인데 계절을 되감는 따사로운 12월 초. 무작정 떠난 곳이 경주다. 왜 하필 경주냐고 친구들은 입을 모았다. 수학여행쯤이나 다녀갈 곳이라는 의미였다. 나 또한 경주를 두어 번쯤 다녀오긴 했다. 그런데도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를 지녔다고 해야 할까. 옛 신라의 이미지만으로 경주를 떠올리기엔 뭔가 아쉬운 구석이 늘 가슴 한편에 남아있었다. 놓친 게 많았거나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같은 것들이. 천 년이라는 시간의 뒷면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지리멸렬한 내 삶에 한 줄기 이유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희망을 품고 찾아간 곳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한 시간 남짓 날아 대구 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검색해 둔 경로를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차를 빌리지 않고 두 발로 경주의 속살을, 나를 걸어 볼 셈이다. 차창 밖으로 옛 기와지붕이 보이고 한 시간 만에 경주에 도착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가까운 곳에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끈다는 황리단길이 있었고 주변 유적지와도 가까웠다. 그 길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주변을 걸었다. 신라의 보물들이 가는 길마다 이정표처럼 놓여 있어 길을 잘못 들어도 실패할 확률은 없어 보였다. 눈앞에 커다란 능들이 비로소 섬을 떠나온 것을 실감 나게 했다. 권력의 높이만큼 우뚝 솟은 무덤. 묘지라는 이미지에서 오는 괴리감이 없을 만큼 이곳과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과거는 현재와 같은 이름인지도 모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어제를 어제처럼 느끼기도 하니까. 우리의 얼굴도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야 현재의 얼굴을 자각한다. 몇 년 전에 여기 왔을 때만 해도 능 앞에 앉아 사진을 찍었었는데 지금은 들어갈 수 없게 철책을 쳐 놓았다. 그때의 사진 속 나는 커다란 능에 가려 개미처럼 작아 보였다. 인간이 쌓아놓은 거대한 욕망을 본다. 살아있을 때 누렸던 삶을 죽은 후에도 누리고 싶은 욕망. 지금은 화장문화로 점차 무덤이 사라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을 추앙한다. 종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지도 모르고.
경주의 옛 이름 신라는 불교의 나라답게 가는 곳마다 불상과 마주한다. 신라가 부처였고 부처가 곧 신라인 나라. 그 많은 조각상이 신라를 지켰을까.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이방인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불교는 교리나 정신보다 정치적이고 권력적으로 변해간다. 맹목적인 믿음은 미신으로 흐르거나 판단을 흐리기 마련이다. 그것은 결국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발목으로 전락한다. 역사를 배제하고 걸을 수 없는 길이 경주다. 잊었던 과거의 이야기들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려 있다 가는 곳마다 풀어 헤쳐지는, 시간의 얼굴을 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내가 지금까지 경주의 내면을 떠올리지 못한 건 경주 남산에 오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관광객으로서 최소한의 일정만 소화했던 것이었다. 예전엔 왜 몰랐을까. 누군가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삶을 살고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으로 여행 마지막 날 아침 경주 남산으로 향했다. 남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고 했다. 비교적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삼릉길을 택했다. 입구에서 얼마 가지 않아 처음 마주친 보물이 얼굴 없는 부처상이다. 갑자기 뒤가 서늘해져 손으로 슥 내 목덜미를 만져볼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였다. 없음으로 인해 있음의 실체를 떠올리다니. 상(像)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지구에 사는 수많은 다른 얼굴들. 그 얼굴은 서로를 구분 짓고 구분하는 기호가 되기도 한다. 존엄성을 따지면서도 차별을 부르짖는. 그렇다면 얼굴이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런 구분조차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이미지로 표현하는 건 아닐까. 각자의 얼굴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인간이라는 존재의 방식이나 관습은 오히려 망각의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행동 같은 것 말이다. 반복과 망각으로 세워진 길. 수만 번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뻐근한 내 안의 울림을 들으며 곳곳에 숨겨진 부처상을 만났다. 이 산 전체가 부처의 거처인 듯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집착에 이르게 했을까. 간절한 마음만으로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얼굴이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한, 인간을 이끄는 힘. 알 수 없는 어떤 기운들이 그들을 이 험한 암석에까지 이끌었을까. 이런 질문은 나를 향한 물음이었다. 나 또한 부처를 찾아 여길 올랐으니.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어떤 작용들. 존재가 존재이기를 갈망하는 통과 의례적인 관습들. 석상에 새긴 부처의 얼굴은 어쩌면 우리가, 내가 보고 싶은 환영(幻影)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처상 앞에 서면 부끄럽고 옹졸한 내 속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게 우리가 믿는 존재는 나를 비추는 거울에 가까울 때 진짜 힘을 발휘한다. 반성과 성찰로 나를 바꾸는 일,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나에 대한 진실은 오직 나만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해서 나에게서 찾고 싶은 이미지는 뭘까 하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물을 바라보다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다는 나르키소스와 누구도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오이디푸스. 여성인 에코는 “나는 에코예요, 나를 만족시킨 나 자신의 이미지가 타자의 눈에 비치는 걸 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미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어떤 모습으로든 자아와 이미지는 실체와 허상이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그림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그림자가 등장한다. 그림자는 오히려 벽에 갇힌 자아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의지를 보인다. 도시라는 거대한 습관에서 주인공 ‘나’가 빠져나오길 바라는 눈치다. 물론 ‘나’ 역시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죽고 그림자 없는 ‘나’만 벽 안의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이로 살아간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서 타인을 통해서 나를 본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나인지는 알 수 없다.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 어쩌면 그림자만이 인간이 자신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아닐까. 경주에 와서 경주 남산에 와서 비로소 나는 나의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경주 남산을 코스별로 다 올라보지 않고서 경주를 봤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나를 제대로 보지 않고서 나라고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나는 나의 허상과 동거의 자세를 취했는지도 모른다. 그 허상이 밖으로 내비치는 얼굴로 나타난 것일 뿐. 하루하루 내가 쌓여 만들어지는 얼굴. 흔히 오십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내려놓지 못하고 너그럽지 못하고 베풀지 못한 나를 본다. 후회는 항상 뒤에 와서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시간. 경주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조우를 통해 지금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얼굴은 늘 바깥이다. 바깥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다. 바깥 날씨에 따라 내 기분도 흐렸다 맑아진다. 생명이 취하는 형식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표상하는 방식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다. 나를 둘러싼 그 세계를 고스란히 내 얼굴에 묻힌 채 걷는다. 바깥은 수많은 얼굴의 표상이자 곧 나 자신들의 열망이기도 하다. 1월은 허공에 새 거울을 내다 거는 시간. 그 바깥에 당신이 서 있다. 언제쯤 타인은 스스로 나 자신이 될 수 있을까.

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서귀포문학작품상〉〈서귀포칠십리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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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