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이홍섭
신작시: 섬 ㅡ 손 2 / 오늘 아침 / 된장찌개 한 그릇
자선시: 네루다의 종소리 / 호박
[시인론] 박제영 “나는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신작시
섬
― 손 2
망망대해에
몰록 떠오른 손 하나
아무도 잡아주는 이 없네
잡을 이 없으니
스스로 손을 접네
적막은 파도치고
외로움은 소용돌이치고
섬은 어느덧
딱딱한 주먹이 되어
하늘을 향해
연신 주먹질이네
누가 나를 불러냈냐고
누가 함부로 생을 깨웠냐고
오늘 아침
울 아버지
내 나이 열여덟에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려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나에게는 평생 화두였는데
울 아버지
오늘 아침 요양원에 드셨다
담장 아래
머리를 푹 숙인 해바라기와
우두커니 서 있는 화두를 남기신 채
울 아버지
오늘 아침, 긴 그림자를 끌고
요양원에 드셨다
된장찌개 한 그릇
어린 나이에
절에 맡겨졌던 노스님이
무명의 한 보살에게 전 재산을 주고
입적하시었다
병이 찾아온 노스님께
조석으로 된장찌개를 공양하던 앳된 보살이었다
자식 같은 상좌들도 돌아앉았고
사하촌은 별별 소문으로 들썩였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보살이 공양했던 된장찌개가
출가 전날,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끓여주시던
된장찌개, 바로 그 맛이었다는 것을
노스님은 그렇게
옛날 옛적, 젊디젊으셨던 어머니에게
전 재산을 공양하고
입적하시었다
자선시
네루다의 종소리
본 적 없는 시인의
첫 시집 해설을 쓰다가 문득
네루다의 종소리를 들었다
그는 칠레에서
나는 한국에서
비슷한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심한 멜랑꼴리에 빠지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의 기쁨을 노래했다
첫 시집의 종소리는
발끝을 간지럽히는 어여쁜 파도 같은 것
첫 시집을 낸 시인은
자나 깨나 네루다를 호명했는데
태평양 건너까지 그 소리가 들렸을지 모르겠다
그가 사랑한 칠레의 바닷가에
이제 그는 없고, 태평양을 건너온 파도만이
지금 내 발밑에서 철썩인다
첫 시집 해설을 쓰다가 문득
네루다가 사랑한 바닷가의 종소리를 들었다
ㅡ 시집 『네루다의 종소리』(달아실, 2024)
호박
아픈 몸 이끌고 찾아간 시골 약국 담벼락 아래 호박이 실하다
이 세상을 다 쌈 싸 먹어도 남을 것 같은 너른 호박잎이며
이 세상을 다 밝히고도 남을 것 같은 노란 호박꽃처럼 살지 못한 삶이 비루하다
호박처럼 펑퍼짐하게 살지 못한 삶이 애틋하다
어머니가 꾼 태몽이 들판에서 누런 호박 하나를 딴 것이라는데
내 불효의 넝쿨은 사방팔방으로 뻗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ㅡ 시집 『네루다의 종소리』(달아실, 2024)
이홍섭 l
1990년 《현대시세계》 등단. 시집 『강릉, 프라하, 함흥』 『네루다의 종소리』 등이 있음. 〈박재삼문학상〉 등 수상.
시인론 / 박제영
나는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 이홍섭론(論)
춘천에 ‘달아실’이라는 작은 출판사를 차리고 ‘달아실시선’을 꾸린 지 9년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 달아실시선 100호를 냈다. 달아실출판사와 달아실시선이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는 데에는 이홍섭 시인의 공이 크다.
어떤 시선(詩選)이든 새로운 시선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1번을 어떤 시집, 누구의 시집으로 하느냐가 관건인데, 어려운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이홍섭 형은 흔쾌히 원고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해서 2017년 이홍섭 형의 다섯 번째 시집이자 달아실시선 1번 시집인 『검은 돌을 삼키다』가 세상에 나왔고, 2024년에는 이홍섭 형의 여섯 번째 시집 『네루다의 종소리』가 달아실시선 84번으로 나왔다.
이 두 권의 시집에 대한 간단한 소개 글을 쓴 바 있는데, 시집을 소개하는 글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이홍섭론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여 그대로 옮긴다.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들리는 어떤 울음
1990년 등단한 강릉 촌놈 이홍섭 형이 시인으로 운수납자로 탕아로 산 지도 어느새 28년이다. 그런 그가 이제 갈 데 없는 건달이 되어 돌아왔다. 그동안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 등 네 권의 시집을 펴냈고 이번에 다섯 번째 시집 『검은 돌을 삼키다』를 펴내는 것이니, 시인 건달로 이만하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셈인가.
나는 이제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다
몸으로 밀고 간 산골짜기 끝에는 모난 돌이 하나
마음으로 밀고 간 언덕 너머에는 뭉게구름이 한 점
노래와 향기가 흐른다는 건달바성은 멀고
내 손바닥 위에는
구르는 돌멩이 하나와
흩어지는 뭉게구름이 한 점
내가 부른 노래는 구름과 함께 흘러가버렸고
내가 맡은 향기는 당신이 떠나면서 져버렸다
나는 이제 정녕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으니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어」 전문
“산에 가면 한 그루 나무가 되고 / 바다에 닿으면 한 굽이 파도가 되어야 하는데 / 그리되지 못했다” (「시인의 말」)는 고백은 “나는 이제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참으로 건달이 되어야겠다”(「갈 데 없는 사내가 되어」)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실은 지난 28년간 온몸을 끄~을고 걸어온 이홍섭 시인/시의 이력이자 내력이라 하겠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때로는 성(聖)을 지우고, 때로는 속(俗)을 지우며, 성속이 엉킨 이홍섭만의 서정을 빚어내는 것이니, 그가 갈 데 없는 건달이 된 것은 독자에게는 참 큰 복이겠다.
강릉 촌놈 이홍섭 형과 술 한잔 걸치고 얼큰해지면 2차로 노래방을 갈 때가 있다. 형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장르를 불문하고 부르지만 <모란동백>과 <사랑의 썰물>은 반드시 부르고야 만다. 실은 형의 십팔번이 무엇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형이 노래할 때마다 심퉁한 입술을 노래방 모니터에 갖다 대고는 상하좌우 구석구석을 심퉁하게도 빤다는 거다.
우리 동네 바다에는 심퉁이라는 고기가 산다
심퉁하게도 생긴 이놈은
만사가 심퉁이라 무리를 짓지 못하고
저 홀로 심퉁한 입술을 바위에 대고 산다
내 마음의 바닷가에도 심퉁이라는 고기가 산다
심퉁하게도 생긴 이놈은
세상과의 불화가 끝이 없어
심퉁한 입술을 돌덩이에다 붙이고 하루해를 보낸다
하루에도 열두 번
심퉁한 입술로 돌덩이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 「심퉁이」 전문
「심퉁이」라는 시를 보면서, 비로소 형이 왜 그토록 노래방 모니터를 빨아댔는지 알 수 있었다. 형의 마음에 심퉁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것. 심퉁하게도 생긴 이 물고기는 세상과의 불화가 끝이 없어 형이 노래할 때마다 툭툭 튀어나와서는 그 심퉁한 입술로 노래방 모니터를 빨아댔던 것. 그도 안 되면 마침내 하루 종일 검은 돌이나 삼키는 참 심퉁하게도 생긴 형이다. 그러니 형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형 안의 심퉁이라는 물고기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겠다.
이홍섭 시인은 이십 대에 젊은 나이에 시인이라는 면허를 얻고 신문기자가 되어 속세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등 온갖 판을 다 휘젓고 다녔다. 그렇게 속세를 속속들이 들여다본 그가 이번에는 속(俗)을 훌훌 털고 불목하니가 되어 노스님의 수발을 들었다. 그 당시를 본인 스스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날 이후 노스님을 모시고 10여 년을 살았다. 머리 긴 청맹과니가 절에 산다는 것은, 머리 깎은 스님이 칼을 들고 정육점에서 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처음에는 백담계곡의 돌탑처럼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을 쌓았다가 허물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노스님의 각별한 배려와 자비 덕분에 한 철, 또 한 철이 지나면서 ‘한가하고 적요한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시조 시인이신 노스님을 모시면서 나는 삶과 문학의 ‘골수’를 얻었다. 스님은 때로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때로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청맹과니가 참눈을 뜰 수 있도록 가르치셨다. 단풍보다도 더 눈부신, 다시 올 수 없는 시절이었다.”(불교신문, 2012년 5월 25일 자)
그러니까 이번 시집은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를 거치면서 속(俗)과 성(聖)의 한 시절을 통과한 그가, 비로소 청맹과니에서 벗어난 그가, 당신들에게 들려주는 ‘이홍섭의 삶과 문학의 골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것이다, 내려가
산도 절도 없는 곳에
닿을 것이다
― 「문을 열면」 부분
그러니 독자들이여,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들리는 어떤 울음의 소리를 듣고 싶거든,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흐르는 어떤 울음의 감촉을 느끼고 싶거든, 이홍섭 시집을 읽어 보시라. 검은 돌을 삼켜 보시라.
삶의 감각을 회복하는 시의 종소리
강릉을 대표하는 시인 이홍섭이 여섯 번째 시집 『네루다의 종소리』를 펴냈다.
이홍섭 형이 7년 만에 보내온 신작 시집(『네루다의 종소리』) 원고를 읽다가 그만 먹먹해졌다. 그사이 유발상좌(有髮上佐)의 연으로 모셨던 스승(오현스님)이 입적하고 형은 죽도록 아팠구나. 의사들도 속수무책이라는 신병(神病)을 앓았구나. 그리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마침내 시로 현현하였구나. 편 편마다 쇠북 아닌 것이 없고, 울음 아닌 것이 없고, 편 편마다 종소리를 머금었으니, 읽는 내내 슬픔이 무장무장해지고 먹먹해지는 까닭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형이 세운 ‘가난하지만 이쁜 나라’(「들국」)로 기꺼이 망명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이홍섭 형은 이번 시집에 해설 대신 자신의 산문을 실었다. 「종소리를 머금다」라는 <시인의 산문>에서 형은 이렇게 얘기한다.
“오래전, 기억의 저편에 해질녘에 들었던 종소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작은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사원에서 퍼져 나오던 그 저녁 종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순 평화롭게 만들었고, 마치 비단 천을 덮듯 천천히 도시의 하루를 쓸어 담았다.
신기하게도 그 종소리가 그친 뒤에는 사람보다는 다른 생명이 주인공이 되었다. 바람 소리, 소나무 쓸리는 소리, 물결 소리, 귀뚜라미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살아났고, 나무와 풀의 냄새도 깊숙이 들어왔다. 저녁 종소리는 숱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잡소리들을 잠재우면서, 잊었던, 혹은 저쪽으로 밀려났던 생명과 감각들을 다시 살아나게 했다.”
“문득 종소리가 떠올랐을 때, 시가 종소리를 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종을 누가 치는가 하는 질문은 저 산속의 수좌들이 깨치고자 하는 화두 속에나 있는 것이고, 시인은 다만 건달처럼 그 종소리를, 그리고 그 외의 숱한 종소리를 부단히 담아낼 뿐이다. 화장터의 연기도 종소리고, 어머니의 울음도 종소리고, 노스님의 재도 종소리다. 구름과 새와 서쪽 하늘도 참으로 아름다운 종소리이다. 시인은 하루하루 그 종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담아내는 존재가 아닐까. 배가 고파서, 늘 허기가 져서 그 종소리로 배를 채워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좋은 시는, 아니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이 종소리가 시의 안팎에서 울려 퍼지는 시다. 종소리의 시작도 아니고, 종소리의 끝도 아닌, 늘 종소리가 웅웅한 시, 종소리를 머금고 있는 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내 몸을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길목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종소리를 머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본 적 없는 시인의
첫 시집 해설을 쓰다가 문득
네루다의 종소리를 들었다
그는 칠레에서
나는 한국에서
비슷한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심한 멜랑꼴리에 빠지면서도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을 노래했다
첫 시집의 종소리는
발끝을 간지럽히는 어여쁜 파도 같은 것
첫 시집을 낸 시인은
자나깨나 네루다를 호명했는데
태평양 건너까지 그 소리가 들렸을지 모르겠다
그가 사랑한 칠레의 바닷가에
이제 그는 없고, 태평양을 건너온 파도만이
지금 내 발밑에서 철썩인다
첫 시집 해설을 쓰다가 문득
네루다가 사랑한 바닷가의 종소리를 들었다
― 「네루다의 종소리」 전문
“온 세상은 다 무언가의 은유다(The whole world is a metaphor for something else).”라는 네루다의 대사로 유명한,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일 포스티노>(1994)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1985)를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전속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우정을 담았다. 영화의 배경은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의 작은 섬으로 나오지만, 소설의 배경은 실제 네루다가 살았던,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120km 떨어진, 작은 바닷가 마을 이슬라 네그라이다.
이홍섭 형은 분명히 영화를 보았거나 소설을 읽었거나 아니면 영화도 보고 소설도 읽었을 것이다. 그러니 「네루다의 종소리」를 읽는 독자도 이 시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소설을 읽든가, 영화를 보든가 해야 한다.
이홍섭 형은 마리오가 네루다를 위해 녹음한 소리들 ㅡ 섬마을의 바람 소리, 성당의 종소리, 바닷가의 파도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그리고 배 속에 든 아이가 발길질하는 소리ㅡ 그 소리들이야말로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그리하여 마침내 마리오가 깨우친, 진짜 ‘시’였음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홍섭 형이 얘기하는 종소리란 그런 것일 테다. 소음과 휘황한 불빛의 소란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과 감성, 그리하여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테다.
나는 왜
불현듯 깨어나
시를 쓰고 있는가
꿈꾸다 죽은 노인보다
꿈을 죽인 노인으로
자기 가슴이 다 부서진
고릴라처럼
그렇게 살다가
가고 싶은데
이 야밤에
시는 왜 다시 찾아오는가
― 「아생」 부분
세상은 여전히 숱한 물욕의 소음들로 가득하고, 자기 생존을 위한 방편의 온갖 술수들로 소란하다. 문학과 예술이 그런 비정상의 사태를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하는 일그러진 세상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이홍섭의 시집을 읽으시라. 이홍섭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귀를 씻는다는 것이고, 마침내 고요에 들 종소리를 듣는 것이고 삶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일 테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을 건너 부모와 스승마저 건너 마침내 여여(如如)에 들다
사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췌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 지난 몇 년 사이 이홍섭 형은 원인도 병명도 모르는 몹쓸 병으로 문턱이 닳도록 병원을 다녀야 했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내 생각으로는 마침내 시마(詩魔)가 든 것이다. 그가 “내 거처는 비승비속의 언덕 한편”[「밤비」(『숨결』)]이라며, “좋은 시는 / 바닥을 치는 시”[「모래무지」(『숨결』)]라며, 바닥을 찾아서 탕아가 되어 운수납자가 되어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스스로 쌓은 35년의 시업(詩業)의 결과일 것이고, 그가 진정한 시의 건달이 되기 위한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는 것일 테다.
그 마지막 고비에서 마침내 이홍섭 형은 어미를 불러내고(「호박」), 아비를 불러내고(「오늘 아침」) 그리고 스승을 불러낸(「된장찌개 한 그릇」) 것일 테다.
임제선사는 일찍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북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라고 했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홀로 가련다! 너희도 각각 홀로 길을 떠나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짜라투스트라에 맞서라! 더 바람직한 것은, 그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라! 그가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중략)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중략)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해라. 그리고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에야 나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라고 말했다.
그렇게 지금 이홍섭 형은 부모를 불러내고 스승을 불러내는 것이다. 강을 건넜으니 배를 버리겠다는 듯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탈각(脫殼)이라는 듯이, 그리하여 지나온 이력마저 훌훌 벗어버리려는 듯이, 내 눈에는 자꾸 그렇게 보인다.
망망대해에
몰록 떠오른 손 하나
아무도 잡아주는 이 없네
잡을 이 없으니
스스로 손을 접네
적막은 파도치고
외로움은 소용돌이치고
섬은 어느덧
딱딱한 주먹이 되어
하늘을 향해
연신 주먹질이네
누가 나를 불러냈냐고
누가 함부로 생을 깨웠냐고
― 「섬 ― 손 2」 전문
백담사 만해마을에 가면, 본관 로비에 ‘건달바성’(乾達婆城)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달바는 음악과 향기의 신이다. 하늘에 건달바가 있다면 이홍섭 형은 지상에 유배된 건달이다.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는 형의 말은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다. 비승비속을 건너 부모와 스승마저 건넌 형은 비로소 바닥을 쳤다. 스스로 섬이 되었다. 이제 그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그가 하늘을 향해 주먹질하면 그 해프닝마저도 한 편의 시가 될 수도 있겠다.
십여 년 전쯤, 이홍섭 형인 취해서 내게 한 말이 있다. “박제영, 너는 시에 져야 해.” 요즘도 시에 막힐 때면 문득문득 “시에 져라.” 형의 그 말을 되새김하곤 한다. 오랜만에 형의 시를 읽다 보니 “육백 리 사방이 다 슬프다”(「벗꽃 날리다」).

박제영 l
1992년 《시문학》 등단. 시집 『아흔아홉 개의 달과 아흔아홉 번의 겨울』 『안녕, 오타 벵가』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등, 산문집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소통의 월요시편지』 등, 번역서 『딥체인지』 『어린왕자』 등이 있음. 현재 춘천문화예술매거진 《pot》 ·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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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호(VOL.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