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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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홍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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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파랑채집가*

 

 

 

마지막 왜 하필 파랑을 집어든 거야

빨간 피를 보면 마음부터 멍드는 걸 알면서

 

밤새 움켜쥔 불안이 풀려나는 새벽

눈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어

파랑의 온도와 숨결

 

하루 치 일용할 양식을 저울 위에 얹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다 던져버리고

파랑만 든 채 가볼까

손끝에서 흔들리는 눈망울을 쓰다듬으며

 

산란하는 빛으로 가득한 숲속에서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지

 

수줍게 자라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묻어

발목에 매달린 채 끌려다니던

의심과 배반을 묻어

흙을 파서, 다름 아닌 그 흙으로 덮어줄게

너무 무거워 쉬고 싶어 하는 것들

 

축축한 어둠 속에서 기다릴 수 있다면

울먹이며 피어나는 새파란 눈빛을 한아름 따줄게

 

까맣게 앉은 딱지처럼 두터워진 그늘을 걸치고

윤기 나는 오후를 함께 건너가줄게

 

 

* 로이스 로리의 소설

 

 

 

 

 

 

 

 

 

순록 바늘

 

 

 

살은 다 사라지고

뼈만 남은 시간이야

 

자신의 뿔 하나를 빌려준 순록 한 마리

내 곁에 잠시 서 있다

눈물 떨구며 돌아서는 것을 보네

 

여인아,

너를 붙잡아두려고

순록의 무리를 뒤쫓았지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들던 무리 속에서

유일하게 뒤를 돌아본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어

기어이 뿔 하나를 얻었지

너의 마음 파고들 듯

깊이 파 들어간 뿔의 속 뼈

흰빛이 어른거렸어

네 몸을 어루만지듯 오래 문질러 얻어낸 바늘 하나

 

너와 나를 이어줄 그 무엇을 떠올렸던 걸까

 

나는 떨고 있는 너를 생각한 것뿐인데

옷깃마다엔 네 피가 점점이 배어 있구나

 

바람은 찬데 너는 자꾸 숲으로 달아나려 하고

너의 찢어진 무릎과 갈라진 발뒤꿈치에서

붉은 실이 흘러나오고 있었어

 

너의 어둠 속에 꽂힌 바늘 찾지 못해 오래 헤매었지만

그것이 내 핏속을 돌고 있을 줄은 몰랐네

친구들과 찬 강물을 건너가는 나의 순록아

나는 너의 뿔 하나를 결국 돌려주지 못하는구나

 

나의 살은 사라지고

뼈만 남은 시간이야

날 찾아온 순록이여,

내게서 너의 뿔을 가져가렴

 

 

 

 

 

 

 

 

 

한 장의 하루

 

 

 

흔한 고백은 백지에 흘린 커피 자국 같아

향기도 색도 점점 엷어져가는

 

노트에 뭔가 적으려 했는데

이미 누군가의 글이 적혀 있으면

거기에 수장되는 느낌이야

빠져나오려고 허우적대다 노트를 덮지

 

같은 말은 반복 안 했으면 좋겠어

우리는 감(感)을 늘려서 감정을 사육해

갇히는 것은 또 늘 우리들

 

하루에 하루를 연장해도 보이는 건

단 한 장의 하루, 쓸쓸한 목덜미의

같은 제목을 가진 나날들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을 끌고 저녁 저수지를 배회할 때

낮의 까만 발바닥을 버려둔 채 혼자 돌아설 때

어깨에 얹히는 손

누구? 돌아보면 번지는 오늘의 얼굴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

 

 

 

 

 

 

 

 


자선시


 

 

속죄양

 

 

 

초록 자욱한 들에 웅덩이처럼 누워 있는 흑염소를 뛰어넘어 우리는 고모 집 마당에 도착했지

집 안에 들어서려면 말뚝에 박힌 흑염소를 한 번 더 통과해야 했는데 가로로 쭉 찢어진 염소 눈이 한 번씩 깜박일 때마다 고무줄넘기를 해야 그 윤기 나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어

 

염소 뱃속에는 풀을 방목하는 고모와 그녀의 오래된 기도를 듣느라 한쪽 귀가 삭아가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 검고 추레한 성경이 누워 있었는데

 

말없이 풀만 잡아 뜯던 엄마는 혼자서 왔던 길을 돌아가고, 고모는 내내 흑염소 똥만 구슬 줍듯 하고, 나는 염소 눈을 쫓아 빛과 어둠 사이를 폴짝폴짝 넘어 다녔는데

 

그날따라 사탄의 색인 505 털실로 짠 빨간 원피스와 빨간 구두를 신은 나는 고모의 기도 속에서 활활 불타오를 것만 같아 오금이 저렸었지

염소 뱃속에서 하루나 이틀 뒹굴면 다시 찾아오는 엄마, 내 손을 잡아끌며

 

뒤돌아보지 마, 염소가 자기 가죽을 훌러덩 뒤집어씌워서 널 데려갈지도 몰라

 

종종걸음 치다 보면 어느새 엄마 손에 들려 있는 염소젖과 달걀 몇 개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의식을 치르듯 양은냄비에 데운 염소젖을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날계란 하나와 함께 내게 먹이곤 했어 그 비릿한 맛에 손을 내저으면서도 나는 왠지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했지 다만 네 발 묶인 짐승처럼 타다만 불 냄새와 미지근한 젖 냄새 속에서 눈물을 찔끔거렸어 방바닥에 모로 누워있다 보면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주문 같은 기도 속으로 혼곤히 빠져들곤 했는데 흑염소가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곤 하는 것이었어

 

 

 

 

 

 

 

고통이 미각에 닿기까지

 

 

 

칼을 쥔 자와 지켜보는 자

난폭한 백열전구 밑

긴장이 흐르는 도마 위에

이 무대를 신선하게 빛내줄 내가 있다

이곳에서 싱싱함이란, 죽음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일

아무도 예를 갖추지 않는 죽음 앞에서

횟집 남자는 염을 하듯 두어 번 내 몸의 물기를 걷어낸다

 

차디찬 도마에 누워 바라보는 시선들이란

뚝, 뚝, 물기처럼 떨어지는 식욕과

조급해진 칼날의 눈빛 같은 것

 

끈질기게 쫓아온 여자의 시선에

불안하게 반짝거리는 비늘

바다를 떠날 때부터 나는 이미 빛을 놓친 것이지만

한줄기 위안처럼 더 선명히 떠오르는 푸른빛의 황홀함

옷자락을 끌며 아련히 사라지는 빛이여

나는 아주 천천히, 저편으로 건너가려 한다

누군가의 혀에 닿을 때까지

스스로의 죽음을 바라보도록 오랫동안 눈 뜨는 법을 배웠던 기억

나를 휘감았던 빛을 떠올리며 깊은숨을 몰아쉰다

당신의 혀가 극에 달한 마지막 숨결을 맛본다

 

모든 미각은 고통의 눈을 감기고서야 눈을 뜬다

 

 

 

 

 

 

 

 

부추

 

 

 

부추를 살 때마다 신중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지

 

머리를 가지런히 맞대고

살을 부비며 누워있는 저들을 보면서

형제도 없고, 이웃도 없는 내가

거창한 연대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는

당위와 변명을 세찬 물살에 흘려보낼 때

 

모두가 새파란데 안쪽을 살피면

서넛은 꼭 끼어 있는 누렇게 뜬 얼굴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자들의 낯빛은

이웃을 오염시킨다

 

시든 것을 물에 담그면 싱싱해진다는 건 몇 프로의 확률일까

변해버린 낯빛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정답을 기다리는 동안

시들어버리는 질문들

동색이지만 함께 묶일 수 없는 부추를 한 다발로

묶어버린 손은 어디에서 쉬고 있나

 

부추 속에는 부추였던 내가 있다

부추이길 포기한 내가 있다

부추가 되지 못하고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내가 있다

 

이만큼 도망쳐 와서야

나와 무관한 것은 무관한 것, 중얼거리며 일어설 때

그건 아니잖아?

와르르 쏟아지는 부추, 부추들

 

 

 

 

이달의_시인_홍순영.jpg

2011년 《시인동네》 등단.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가 있음.

 

 

 

 

 

 

 

 

 

 

 

시인론_임동확.jpg

 

 

 

속죄양의 희망 찾기

 

 

 

 

홍순영 시인은 기껏 “연장해” 봐도 “보이는 건” 단지 “단 한 장”의 종이처럼 “쓸쓸”한 “하루” 속에서 그녀는 문득 “저녁 저수지”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 “같은 말”을 무의하게 “반복”하는 하루 속에서 제 “감정을 사육”하면서 정작 자신이 “갇히는 걸”(「한 장의 하루」)을 체감한다. 애써 “붙잡아두려고” 하지만 그녀는 곧잘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순록 바늘」)드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의 모습들은 결코 우연히 출몰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너무나 무거워 쉬고 싶어 하는 것들”(「파랑채집가」)과 깊게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한사코 “빠져나오려고 허우적대”지만, 어김없이 “수장되는 느낌”(「한 장의 하루」)과 같은 무섭고 두려운 기억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야말로 그녀는 지금 미처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마치 “네 발”이 “묶인 짐승처럼” “방바닥에 모로 누워 있는”(「속죄양」) ‘속죄양’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감당하기 힘든 무형의 무게에 짓눌린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내는가? 그에 대한 단서는 그녀의 대표 자선시 가운데 하나인 「부추」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머리를 가지런히 맞대고

살을 부비며 누워 있는 저들을 보면서

형제도 없고, 이웃도 없는 내가

거창한 연대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는

당위와 변명을 세찬 물살에 흘려보낼 때

 

모두가 새파란데 안쪽을 살피면

서넛은 꼭 끼어 있는 누렇게 뜬 얼굴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자들의 낯빛은

이웃을 오염시킨다

―「부추」 일부

 

여기서 ‘나’는 한 단으로 묶여 서로 “머리를 가지런히 맞”댄 채 “살부비며 누워 있는” “부추들” 속에서 예외자다. 거기에 “꼭 끼어 있”지만 다른 “부추들”과 달리, ‘나’는 그 속에서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있는 “서넛”의 “부추”와 같은 국외자에 속한다. 즉 ‘나’는 서로 부대낄 만한 “형제”나 “이웃”, 혹은 일가친척이 거의 부재한 가운데 성장한 자로서, 타인들과 쉽사리 어울리거나 섞여들지 못한다. 가족이나 “이웃”들의 호의나 친근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타인들에게 “오염”시키는 잉여의 존재다. 특히 그 가운데 ‘나’는 항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쉽게 떨쳐낼 수 없는 태생적인 고립감과 소외감이 세상과 “연대”를 단절시키고 방해하는 “당위와 변명”으로 작용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반복되는 일상과 삶의 조건 속에서 ‘나’가 직면하는 것은 처벌받는 자로서 자신의 모습이다. 스스로의 정신이나 신체를 학대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즘(masochism)이 ‘나’의 시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칼을 쥔 자와 지켜보는 자

난폭한 백열전구 밑

긴장이 흐르는 도마 위에

이 무대를 신선하게 빛내줄 내가 있다

 

차디찬 도마에 누워 바라보는 시선들이란

뚝, 뚝, 물기처럼 떨어지는 식욕과

조급해진 칼날의 눈빛 같은 것

―「고통이 미각에 닿기까지」 일부

 

스스로를 가족집단이나 세상으로부터 아웃사이더 또는 주변자로 여기는 ‘나’는, “차디찬 도마” 위에서 “칼을 쥔 자”과 그걸 “지켜보는 자”들의 “시선들” 아래 놓여 있는 일종의 ‘희생자’다. 하지만 ‘나’는 ‘나’의 살을 탐하는 “뚝, 뚝, 물기처럼 식욕과/조급해진 칼날의 눈빛”에 저항하거나 거부하는 몸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난폭한 백열전구”가 자신을 비추는 무대 조명이며, 일종의 배우로서 ‘나’는 절박한 생사 문제로 “긴장이 흐르는 도마 위”를 “신선하게 빛내줄” 연극 “무대”로 여긴다. 자아실현을 위하여 타자를 파괴하고 부정하기 일쑤인 사디스트와 달리, ‘나’는 자학적인 고통의 무대 위에서 가능한 한 스스로를 학대하고 모멸하는 마조히스트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왜인가? 프로이트나 라캉 식의 환원주의에 따르면, 이러한 ‘나’의 행동방식은 다분히 유년기나 성장기의 상처와 맞물려 있다. ‘나’의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억압적이고 불쾌한 감정이나 가족사에 얽힌 기억들이 어떤 계기로 부단히 출몰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예컨대 “끈질기게 쫓아온 여자의 시선에/불안하게 반짝이는 비늘”(「고통이 미각에 닿기까지」 )과 같은, 아니면 그 “비늘”에 얽힌 그 어떤 트라우마가 반복적으로 의식의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주의적 환원주의는 한 인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매우 편협하게 단선화하고 일원화시킨다는 치명적인 결점을 갖고 있다. 특히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정신이 가진 양극성, 곧 밝으면서도 어둡고, 창조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속성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니까 홍순영 시인의 시에서 개인사적인 과거의 상처나 무의식적인 충동의 흔적의 여부를 읽어내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이러한 환원주의적 접근방식의 경우, 그녀의 정신적 상처가 가진 창조성과 자기실현의 의지를 간과하기 쉽다.

 

종종걸음 치다 보면 어느새 엄마 손에 들려 있는 염소젖과

달걀 몇 개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의식을 치르듯 양은냄비에 데운 염소젖을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날계란 하나와 함께 내게 먹이곤 했어 그 비릿한 맛에 손을 내저으면서도 나는 왠지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했지 다만 네 발 묶인 짐승처럼 타다만 불 냄새와 미지근한 젖 냄새 속에서 눈물을 찔끔거렸어 방바닥에 모로 누워있다 보면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주문 같은 기도 속으로 혼곤히 빠져들곤 했는데 흑염소가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곤 하는 것이었어

―「속죄양」 일부

 

프로이트나 라캉식의 독법에 따르면, 무서워 “종종걸음 치다 보면 어느새 엄마 손에” 붙“들려 있는” “나”’는 악마적 모성에 사로잡혀 있는 자다. 특히 비릿한 맛”으로 대변되는 어머니 세계에서 “도망”가거나 탈출하지 못한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다. “네발”이 “묶”인 상태에서 어떤 “의식”에 바쳐지기 위해 불로 태워진 “짐승”에 비견되고 있는 “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삼켜버리는 ‘무서운 어머니’의 영향권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흑염소”의 “눈”이 “깜박거릴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이 세상으로 떨어지”곤 했던 경험은, 단순히 삶의 추락이나 하강을 의미하지 않는다. 외견상 삶의 체념이나 절망을 연상하기 쉽지만, 이러한 자기실종이나 추락의 경험은 일종의 ‘몰락에의 의지’(니체)로서 자발적인 몰락 또한 무한의 후퇴(regressus in infinitum)를 뜻한다. 일체의 저항 없이 기꺼이 자신을 희생제물이 되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또한 마치 잿더미만 남은 폐허 속에서 날아오르는 불사조의 전설처럼 새로운 존재전환이나 존재론적 모험을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놀랄만한 ‘퇴행’ 또는 무한한 후퇴의 거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살은 다 사라지고/뼈만 남은 시간”(「순록바늘」)은 단순히 존재론적인 폐허나 무조건적인 소멸의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엔 굳이 “눈 뜨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파랑의 온도와 숨결”이 살아 있다. 아물어가는 상처의 “딱지”가 보여주듯이 “두터워진” 삶의 “그늘” 속에서도 현재적 삶에 대한 더할 수 없는 고양감과 충만함이 구현되어 있다. “발목에 매달린 채 끌려 다니던/의심과 배반”조차 “흙을 파서” “그 흙으로 덮어”(「파랑채집가」)주려는 일종의 내향화(Introversion)가 진행 중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시는 일체의 외향화를 지양하는, “극에 달한” “불안”과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신음 없이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몰아”쉬는 “깊은 숨” 또는 “마지막 숨결”에서 탄생한다. 극심한 “고통의 눈을 감기고서야 눈”을 뜨는 “미각(味覺)”(「고통이 미각에 닿기까지」) 혹은 심미안적인 ‘미각(美覺)’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순간 외부 대상과의 또는 고립 속에서 일종의 비상사태 같은 급격한 내향화의 결과로 얻어진 ‘심혼의 소리’가 그녀의 시세계라고 할 수 있다.

홍순영 시인은 한 때 “부추 속에서 부추였던 내가” 스스로 “부추이길 포기”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치부하지만, “그건 아니잖아?”고 “와르르 쏟아지는” 게 “부추들”인 것처럼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삶의 상처나 실존적 위기는 “신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반성”이나 자기성찰만으로 극복해내기에 부족하다. 비록 마뜩치 않더라도 결코 “나”와 “결코 무관”(「부추」)하지 않은 타자와의 연대나 깊은 소통의 노력 속에서 극복된다.

달리 말해, “빨간 피” (「파랑채집가」) 또는 “붉은 실”로 대변되는 삶의 “축축한 어둠”과 실존적 “불안”(「순록 바늘」) 속에 자신을 오래도록 방치한다면, 그녀가 원하는 희망과 초월의 빛으로서 “파랑”(「파랑채집가」) 또는 “흰빛”의 세계로의 이행이나 전환은 그저 한낱 백일몽이거나 관념적인 소망으로 끝날 수 있다. 필시 세상의 온갖 도전이나 공격으로부터 자기 방어의 수단이자 자존의 상징일 “순록”의 “뿔은, “너와 나를 이어줄 그 무엇”(「순록 바늘」)과의 부대낌 또는 뒤엉킴이 없이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홍순영 시인의 시세계는 바로 그 접점에 서 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오후를 함께 건너가”(「파랑채집가」)는 연습과 실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글 · 임동확 | 시인. 광주 출생. 서강대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1987년 시집 『매장시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처음 사랑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등이 있음. 현재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