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장석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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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마술 극장 · 2
ㅡ 압구정 옛 주인같이
지난 공연 대본 중 하나가 유출되었다
대본은 공동창작이었는데 단역 겸 참여 작가 중 일부가
이탈했다 그럼에도 공연은 그대로 진행되어
흥행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재상을 지낸 거물이었다
늘 그렇듯 공생하던 흥행 광고업자들의 힘이 컸다
이 극장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각본 없이 어느 날 무대 위로 끌려 나온다는 점이다
누가 끌려 나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건달 구경꾼들에게는 스릴 만점이지만
당사자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이다 구린 자,
재력가, 유력자들은 평생 노심초사 조공을 바친다
드라마의 백미는 대반전이지만 이 극에서 그런 일은 없다
대본가와 그 공연자들이 모두 같은 먹이사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반전을 이루겠지만 먼 훗날의 역사 따위는
이 극장에서는 인기 대본가들의 야식용 냄비 받침일 뿐이다
지난 공연에 불려 나간 거물 주인공은 혹독한 지옥을 살고 있고
관객들은 다음 공연을 기다린다 아직
대본가가 주인공으로 끌려 올라간 적은 없다
흥행가들은 그들이 주인공으로 올라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대로 극장 영업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숨은 관객들은 언젠가
대본가가 주인공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침을 뱉을 것이다 그러나 대본가는 언제나 힘이 세다
저, 압구정 옛 주인을 닮았다
마술 극장 · 3
ㅡ 장미 정원
장미 정원에 공연이 한창이다
대본 따위는 없다
장미가 관통해온 길을
저 마술 극장의 대본가들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왕인 이해득실 전하가 쫓겨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마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빛깔과 향기가 지나면
적막의 비바람, 눈보라가 주인공이다
그 발성은 힘차고 음률은 비감하다
모두 수긍의 눈물을 흘리며
공연을 관람한다
꽃에 눈물을 뿌리면
찬란한 이야기가 꽃잎과 함께 떨어진다
정원은 공연 중에도 늘 고요하다
가면론
ㅡ 미당풍으로
가면을 벗고
섬이 되어서
잔물결이나 몇 폭 데리고
떠돌고 싶더니
역병이 돌아
kf94 마스크를 두 귀에 걸어 쓰고
가면을 가리니
숨은 좀 가쁜 반절의 자유
두 눈마저 가려서
따깍따깍, 숨어버린 세상을 찾는 술래가 되어 돌다가
어느 떠돌이 술래 동지를 만나면
반가운 나머지 그만
그 자리에 꽃이 되어 피어서
그 자리에 돌이 되어 앉아서
비로소 술래를 파하고
가면을 벗으리
광장의 화단 모퉁이 꽃과 돌이
올려다보며 내려다보며
가면을 논하네
자선시
마술 극장
ㅡ 序
극장은 쑥의 나이와 비슷하다
쑥은 극장으로 가는 길 귀퉁이를 떠나지 않는다
잠시 극장은 사철 질서의 드라마로 흥행하였으나
말굽과 군화 자국 몇 차례 지나가고 피바람의 막장극이 한창이더니
그 주연들은 크게 영달하였다
지금은 마술 전용 극장이 되었다
여전히 전속 배우들은 분장이 두껍다 이 업종은 유별나게도 퇴직 후의 수입이
엄청나다 시나브로 예나 지금이나 입단이 만만치 않다
검은 상복 비슷한 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이나
알고 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천혜의 연기다
대본소에서 밀어주거나 억지스럽게 지어낸 대사를 읊는다
(마술 극장이 되기 전에는 여러 대본소의 작품을 납품받았었다)
극장의 상징은 양팔 저울을 들고 눈을 가린 여신인데
한쪽 접시에는 치밀한 자신의 영화를 계산해 올려놓는다
그리고 눈을 가린 척 오늘도 무대에 오른다
마술 공연이 있는 날에는 극장에 입장하지 않고
틈으로 쥐처럼 엿보는 자들이 많다
눈치를 살피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천칭 저울 한쪽에 오늘은
봄바람이 꽃의 눈을 뜨고
앉아 있다
마술 극장 · 1
ㅡ 대본소
마술 전용 극장이 되고부터
대본은 그 전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마술 공연이지만 몇몇 우둔한 관객은 눈물을 흘리며 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면 마술사들은 굳이 정정하고 싶지 않다
십수 년 경마장의 말처럼 곁눈을 가리고 연습, 단련하다 보니 굳이 마술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는다
한편 거기에는 흥행 종사자들의 몫이 크다
대외 홍보 몰이를 하는 분들인데 이분들의 업주는
시나브로 대본가들의 오랜 고용주이기도 하다
서류가 없으니 훨씬 더 끈끈한 관계다
그 홍보 문구에 속은 관객 일부가 대개 마술에 감동한다
대본가는 실질의 공연 주인공이다 무대
측면에 오르니 조연 같지만
역할은 주연이다
대본가 없이 공연은 올려지지 않으니
공연의 애초 기획자이기도 하다
대본소 뜰에 꽃이 핀다
들여다보는 이는 없다
꽃이 알고 있는 비밀이 대본가는 싫다
장석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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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등, 산문집 『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등이 있음.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

‘극장’의 비밀을 폭로하기 위한 알레고리
장석남 시인의 ‘마술 극장’ 연작과 「가면론」을 읽고 떠올린 생각은 프랑스 68혁명 때 활약한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유재홍 옮김, 울력, 2014) ㅡ 이 책은 68 혁명 바로 전 해인 1967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ㅡ 였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들춰보았다.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매개 없이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13쪽) 이 두 문장은 221개의 테제로 구성된 이 책의 첫 번째 테제다. 두 번째 문장은 우리의 삶에서 매개 없는 직접적 경험은 멀어지고 스펙터클에 의해 매개된 경험만이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일 듯하다. 직접적 경험이 사라지다니? 방금 전에 친구와 차를 마시고 왔는데 이것은 직접적 경험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스펙터클로부터 배운 가면을 쓰고 친구를 만난다면, 그리고 스펙터클에 의해 익숙해진 이미지를 친구에게 덧씌우고 친구를 만난다면, 그 만남은 직접적 경험이 아니라 스펙터클의 “표상 속으로 멀어진”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직접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그 경험은 스펙터클에 의해 매개된 경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극장, 텔레비전, 인터넷, 유튜브와 같은 매체들이 방사하고 있는 스펙터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보낸다. 1967년 기 드보르가 포착한, 사람들의 삶을 전도시키면서 사회 전체를 장악해버린 스펙터클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모든 일상의 시공간 속으로 잠입해 들어왔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스펙터클을 소비하거나 이불 속에서 자기 직전에도 유튜브를 보는 지경에 다다랐다. 스펙터클은 우리의 의식뿐만 아니라 감정과 마음마저도 장악한다. 그런데 스펙터클은 누군가에 의해 제작되는 것이다. 삶 자체를 알게 모르게 장악해가는 스펙터클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은 스펙터클의 제작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을 조련할 수 있다. 특히 권력자들, 권력 기관들은 스펙터클의 제작으로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련하고자 한다.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 속에서 그 스펙터클을 별다른 의식 없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은 어느새 권력자들이 원하는 바대로 느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장석남 시인의 ‘마술 극장’ 연작을 읽으면서 이 시편들이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 이론과 맥이 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알레고리 시편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핵심을 짚어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시인이 조준하고 있는 비판 대상은 법정과 같은 근엄한 국가 권력 기관이다. 진실을 가려내고 이에 기초해 시시비비를 가려 벌의 유무를 판정한다는 이 기관은 사실 마술을 상연하는 극장과 같다는 것이 그 비판의 뼈대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는 한국의 사법부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겠다. 이 극장의 연기자들이 “검은 상복 비슷한 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 ‘극장의 상징’은 정의의 여신상 ㅡ “양팔 저울을 들고 눈을 가린 여신” ㅡ 이라는 「마술 극장 ㅡ 序」의 구절들은 비판 대상이 누구인지를 짐작케 한다. 또한 “군화 자국 몇 차례 지나가고 피바람의 막장극이 한창이더니”와 같은 구절은 군부 독재 시절 한국 사법부에서 판결한 피비린내 나는 판결을 떠올리게 한다.
법정이 극장이라면, 장석남 시인에 따르면 그 극장은 ‘마술 극장’이다. 군부 독재 시절의 극장에서는 막장극을 상연했다. 막무가내식 판결을 내렸다는 뜻이다. 현재의 극장은 이와 달리 대본소에서 계산된 대본에 따라 마술을 상연한다. 마술은 미리 치밀하게 조작함으로써 관객의 눈을 속이는 퍼포먼스다. 법정에서의 판결은 이 판결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없던 죄도 유죄로 만들면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유죄라고 믿는다.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 또는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술 아니겠는가. 이 마술의 스펙터클을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진실인 양 수용하고 만다. 그러나 법관들이 “근엄한 표정이나 / 알고 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천혜의 연기”술을 벌여 마술을 상연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들은 “눈을 가린 척 오늘도 무대에 오”르지만, “한쪽 접시에는 치밀한 자신의 영화를 계산해 올려놓”고 있다. 자신의 영화를 이루는 쪽으로 판결을 내린다는 것, 이들의 이러한 행태는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군부 독재 시절 막장극의 주연들-법관들-은 그때에도 그렇게 자신의 영화를 계산한 판결을 내려서 “크게 영달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술 극장 · 1ㅡ 대본소」에 따르면 저 마술 극장이 운영되는 데 있어서 대본은 필수적이다. 특히 “마술 전용 극장이 되고부터 / 대본은 그 전보다 훨씬 중요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본이 하도 그럴 듯해서 관객뿐만 아니라 마술사마저도 “마술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본을 쓰는 대본가는 누구를 가리킬까? 명확하지는 않지만 입법부를 담당하고 있는 국회위원 등의 정치가 또는 정치권력과 관련된 자가 아닐까 짐작된다. 「마술 극장 · 2 ㅡ 압구정 옛 주인같이」를 볼 때 대본가는 압구정의 주인이었던 한명회 같은 정치적 사건의 기획자이기도 하다. 그는 공연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기획자(또는 음모가)다. 그가 쓴 대본에 따라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은 법정이라는 마술 극장의 무대 위에서 스펙터클이 된다. 마술 극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이 기획자가 치밀하게 마련한 대본이 없으면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조연처럼 보이는 이 대본가는 사실 상 마술 공연의 주인공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조연인 것처럼 보이는 음모가 한명회가 사실 상 역사를 뒤바꾼 결정적인 인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 시에는 “대외 홍보 몰이를 하는 분들”도 등장해서 주목된다. 이들은 언론 종사자들일 것이다. 스펙터클의 조작과 생산을 직접 담당한 이들은 마술과 현실이 뒤섞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들이 만든 홍보 문구의 스펙터클에 속은 ‘관객 일부’는 “마술에 감동”하기까지 한다. 이들 흥행 종사자들과 대본가들의 관계는 매우 끈끈하다. 이들의 업주는 “대본가들의 오랜 고용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본가와 ‘흥행 종사자들’은 같은 운명 공동체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 위에는 ‘업주’가 있다. 대본가들은 자신을 고용한 업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영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업주의 이익은 당연히 마술 공연이 흥행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결국 이 마술은 이익을 위해 공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공연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마술 극장 · 2」는 좀 더 마술 공연의 실제에 다가간다. 시인은 이 시에서 “지난 공연 대본 중 하나가 유출되었”으나 “공연은 그대로 진행되”었고 흥행했다는 실례를 보여준다. 법정으로 끌려나온 “비극의 주인공은 재상을 지낸 거물이었다”고 한다. 대본가들은 어떤 희생양을 찾아내어 공연의 볼거리로 내세우는 듯이 보인다. “주인공이 각본 없이 어느 날 무대 위에 끌려나온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주인공 당사자는 ‘청천벽력’의 상황에 급작스럽게 빠지고 “혹독한 지옥을 살”게 된다. 법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마술을 흥행 광고업자는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마술로 인해 겪는 주인공의 고통을 보면서 ‘건달 구경꾼들’은 즐거워한다. 시인이 전해주는 이 실례는 근래 한국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연상시키지만 이 알레고리 시에서 실제 일어난 현실을 그대로 대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알레고리는 실제 현실의 리얼리스틱한 재생보다는 현실의 본질적 구조를 우화를 통해 드러내는 예술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술 극장 · 2」가 보여주는 ‘지난 공연’의 한 우화적 실례는 마술 극장이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운영되는지 드러낸다. 마술 극장의 비밀을 폭로하기 위한 실례인 것이다.
「마술 극장 · 2」를 계속 읽어보자. 마술 극장은 대본가들의 은밀한 기획에 따라 유명인들을 갑자기 호출하여 마술대에 올린다. 유명인이 올라가야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재력가, 유력자들은 평생 노심초사 조공을 바”치는 것이다. 반전은 없다. “모두 같은 먹이사슬 안에 있”는 “대본가와 그 공연자들”은 자신이 짜놓은 마술의 올가미를 뒤집을 생각이 없다. 마술 공연은 반전이 이루어지는 드라마와는 다른 장르의 퍼포먼스다. 이 공연은 놀라움의 스펙터클만을 제공하는 마술이다. 그렇다면 가장 놀라운 마술은 무엇일까? 공연의 막후 실력자인 대본가의 정체가 폭로되고 이 대본가가 “주인공으로 끌려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공연의 제작자인 흥행가들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대본가들이 마술 공연에 끌려 올라가면 대본을 쓸 사람이 없고, 그렇게 되면 극장 영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인은 “수많은 숨은 관객들은 언젠가 / 대본가가 주인공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고 말한다. 이 ‘숨은 관객들’은 누구인가? 마술이 권력자들에 의해 기획되고 공연되고 있음을 감지한 이들 아닐까? 이들은 언젠가 이 권력의 전복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시인에 따르면, 대본가는 “저, 압구정 옛 주인을 닮”아 여전히 교활하게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그러나 장석남 시인은 저 추악한 마술 극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마술 극장 · 3」에서 보여준다. 장미 정원에서 벌어지는 공연이 그것이다. 이 공연에서 “대본 따위는 없”고 대본가들의 “왕인 이해득실 전하”는 오래 전에 쫓겨났다. 이 장미 정원에서는 사실을 조작하고 사람들을 조련하는 마술의 스펙터클이 공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여러 힘이 부딪치고 뒤엉키며 벌어지는 시적인 진실이 공연된다. 이 공연에서 주인공은 “적막의 비바람, 눈보라”이며, ‘비감한 음률’을 통해 ‘찬란한 이야기’가 힘 있게 전개된다. 물론 이 공연은 보고자 하는 이에게만 보일 것이다. 이 공연은 적막한 장미 정원이 벌이는 것, 이 정원은 “공연 중에도 늘 고요”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시끄럽게 벌어지는 저 마술 공연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하게 전개되는 공연. 하지만 이 공연 속에는 거대하고 강력하며 비극적인 진실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것, 이 드라마를 투시하고 청취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시인’과 같은 부류일 테다.
「마술 공연」 연작에서 자연에 내재해 있는 진실은 바람과 꽃으로 상징된다. 장석남 시인은 이 진실이 존재하기에 저 마술 공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진실한 삶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마술 극장 ㅡ 序」의 말미에서 봄바람이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 한쪽에 앉아 저울의 반대쪽에 앉아 있는 공연자-법관-의 ‘영화’로 천칭이 기울어지는 것을 제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술 극장 · 2」에서는 대본소에 핀 꽃이 대본소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스펙터클을 조작하는 권력자인 대본가는 이 꽃이 자신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싫어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이 꽃과 같이 진실된 존재가 되고자 할 때 대본소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꽃-되기’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존재자란 누구일까. 시인 아닐까. 시인이야말로 타자와 접속하여 타자되기를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 말이다. 시인은 꽃과 바람의 힘을 빌려 저 마술 극장을 만드는 대본의 비밀을 꿰뚫어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비밀을 시를 통해 폭로할 가능성을 가지는 사람이다. 바로 이 ‘마술 극장’ 연작과 같이 말이다. 그렇기에 권력자는 (진정한) 시인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여기 실린 장석남 시인의 ‘마술 극장’ 연작을 이렇게 읽어보았는데, 이 연작이 계속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 연작시가 흥미롭게 읽혔기 때문에 시인이 계속 연작을 진행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시에서 풍자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권력은 주로 정치 권력이나 경제 권력이었다. 그런데 사법 권력에 대해서는 비판이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사법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굳이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겠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법부에 대한 시적 비판이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인데, 그래서인지 장석남 시인의 이 비판적 풍자시는 늦은 감이 있지만 반갑게 필자에게 다가왔다. 한편으로 깊이 있는 서정시를 써온 장석남 시인이 이렇듯 한국 사회의 권력이 지닌 비밀을 폭로하기 위한 비판적 알레고리 시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사회 비평을 향한 시, 풍자적인 알레고리 시가 한국 시단에 더욱 필요할 때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현재, 한국인들의 삶이 처한 현재는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문제들이 얽혀 있어서 예전처럼 문제들이 선명히 보이지 않으며 해결 방향도 찾아내기 힘든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만큼 문학인들의 날카로운 지성이 더욱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한다.
아직 「가면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 시의 시적 시선은 자기 자신한테 향해 있다. 이 시의 서두에서 화자는 “가면을 벗고 / 섬이 되어서” 떠돌며 살고 싶었다는 희구를 고백하면서 자신이 그간 가면을 쓰고 살았음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가면이란 역시 조작된 스펙터클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실을 숨기고 보이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기 위한 조작된 스펙터클. 스펙터클의 현대 체제는 개개인 자신이 스스로 스펙터클이 되게 만들었음을 우리들이 쓴 가면은 말해준다. 그런데 ‘역병’의 창궐로 마스크를 쓰게 되면서, 이 시의 화자는 가면을 가릴 수 있게 되어 숨은 좀 가쁘지만 ‘반절의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예 “두 눈마저 가려서” “숨어버린 세상을 찾는 술래가 되어 돌”기를 원한다. 그러다가 또 다른 “떠돌이 술래 동지를 만나”서 그 자리에서 꽃으로 피어나거나 돌처럼 앉은 존재가 됨으로써 “술래를 파하고 / 가면을 벗으리”라는 것이다. 꽃과 돌처럼 자연 자체가 되고 싶은 것이 시인의 희망이다. 그것들은 가면을 쓰지 않은, 쓸 필요가 없는 진실 그 자체의 존재자다. 이러한 존재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이 저 조작된 스펙터클의 마술 극장에 진실을 통해 맞서고자 하는 ‘시인-되기’로 장석남 시인을 이끄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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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혁 ■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사랑은 왜 가능한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등이 있음. |
이달의시인 2021년 9월호
